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
하얀빛을 은은하게 뿌리는 검은 아귀와 푸른 사신의 시선이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떼서 창문 아래로 숨어야 했지만, 푸른 사신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위험해 보이지 않아. 하얀 아귀처럼 이빨이 없는 아귀라서 그런 걸까?’
푸른 사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저 계속 검은 아귀의 하얗게 빛나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검은 아귀의 동글동글한 형태가 조금 일그러져서 꿈틀거렸다.
그렇게 꿈틀거리던 검은 아귀는 힘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어디론가 천천히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살았다아아아.”
검은 아귀가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잔뜩 굳어 있던 분홍 소녀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하지만 푸른 사신은 점점 멀어져가는 거대한 검은 아귀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
푸른 사신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왜 그렇게 지쳐있으면서 돌아다니던 걸까?’
푸른 사신이 보기에 검은 아귀가 마지막에 보낸 시선은 굉장히 지쳐 보였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처럼.
‘그리고 왜 계속 쳐다봤던 걸까?’
검은 아귀는 고개를 돌리는 그 직전까지 계속, 푸른 사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푸른 사신이 그랬던 것처럼.
‘검은 아귀도 나를 보면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푸른 사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검은 아귀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슬슬 자자!”
그때, 긴장이 모두 풀려서 그런지,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분홍 소녀가 푸른 사신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애착 인간의 모습을 보고, 푸른 사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워버린 애착 인간의 뺨에 달라붙었다.
‘내일 아침도 오늘만큼만 즐거운 날이 계속되기를.’
푸른 사신은 애착 인간의 뺨에 자기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
나는 제임스 타워에 마련된 거대한 창고 한복판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쓰러진 내 시선 끝에는 처참하게 머리가 떨어져 나간 골든-메카-티라노 아머가 있었다.
아무리 눈을 감고,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도 처참한 골든-메카-티라노 아머를 내 시야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피부로 보는 것이 이렇게나 슬픈 일이었다니!
티라노 갑옷을 자세히 살펴보니 공간 절단을 쓴 것처럼 예리하게 잘려 나간 흔적이 보였다.
요즘 빈번하게 일어나는 공간 유실 현상이었다.
아무리 원인을 찾아도 원인이 되는 오브젝트가 없는, 그저 ‘자연 현상’처럼 느껴지는 참사였다.
‘원수를 찾을 수도 없겠네….’
자연 현상에게 복수를 하는 것만큼 웃긴 것도 없으니까.
‘엄마 괜찮아?’
그때 나를 따라서 제임스 타워까지 놀러 온 검은 사신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지를 뿜어왔다.
‘엄마 힘내!’
그 뒤를 이어, 황금 사신들과 다른 미니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위로로는 나의 끝없는 슬픔을 채울 수 없었다.
미니 사신들이 계속 위로하고 토닥여도 내가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한 황금 사신이 뚜방뚜방 다가왔다.
그렇게 내 코앞까지 도착한 황금 사신은 눈을 질끈 감고, 굉장히 망설이며 배를 볼록 내밀었다.
뭘까?
‘대… 댖지로 만들어도 돼!’
그러자 다른 황금 사신들이 엄청나게 놀라서, 그 황금 사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
‘!!!!’
그리고 다른 황금 사신들도 머뭇거리면서, 차례로 배를 내밀었다.
‘대… 댖지 괜찮아!’
울 것 같은 표정의 황금 사신들.
그렇게 ‘댖지’가 되기 싫은 건가?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배를 내민 황금 사신들을 모두 붙잡아서 댖지로 만들어버렸다.
‘으앙!’
‘앙대!’
호기롭게 나선 황금 사신들은 모두 댖지가 돼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머뭇머뭇 다가오고 있었던 황금 사신들이 깜짝 놀라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운 차렸어!’
‘도망가야 해!’
‘도망쳐!’
나는 다른 황금 사신들을 제물로 바치고 살아남은 황금 사신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히히.
***
끝의 탑, 아카데미 모형 도시.
분홍 소녀는 어느새 높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봐도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 모형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말로 있었던 도시를 베껴 만든 도시 같아.”
“계속 탑을 오르다 보면 진짜 아카데미도 볼 수 있겠지?”
분홍 소녀는 히히 웃으며, 손아귀에 쥔 금속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 금속 조각은 복잡한 그림이 그려진 작은 배지였다.
파이프를 깎아서 만든 정교한 모조품.
이 배지는 아카데미 학생 파이프 동상들이 모두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언젠가는 이 배지의 원본을 직접 보고 싶네.”
<볼 수 있을 거예요!>
아카데미 모형 도시에서 의욕을 잔뜩 얻은 분홍 소녀는 씩씩한 표정으로 계층 탑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모형 도시는 누가 만들었을까?”
“왜 만들었을까?”
“마치 도시만 분지처럼 움푹 들어가 있어. 역시 저 도시는 계층을 이루는 원판을 파고들어서 만든 것 같네.”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떠들며, 계층 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
더욱 엉성해진 계층 탑을 지나, 분홍 소녀가 새로운 계층에 발을 디뎠다.
“도착!”
엉성한 탑은 능숙하게 파이프를 탈 수 있는 소녀에게도 조금 어려웠는지, 꽤 뿌듯해 보였다.
<피로는 사라져 주세요!>
푸른 사신은 물로 만든 수건을 들고는 분홍 소녀의 땀을 닦아주며, 마법으로 피로를 풀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새로운 계층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저 멀리 보이는 새하얀 원통형 건물.
그리고 그 건물로 이어진, 화려하게 꾸며진 도로.
분홍 소녀는 숨을 고르며 그 건물을 향하는 일직선 도로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도로의 양옆에는 알록달록하고 둥글둥글한 무언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꽃밭처럼 빨간색부터 시작해서, 보라색까지 형형색색.
“이건 도대체 뭘까?”
분홍 소녀는 궁금해 보이는 표정으로 도로 주변에 쌓인 것 중 하나를 들어서 살펴보았다.
둥근 몸통.
짧은 팔다리와 꼬리.
어딘가 하찮아 보이는 눈.
그리고 입속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인간의 하얀 이빨.
도로 주변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은 이빨 아귀의 시체였다.
“!!!!”
<이빨 아귀!>
분홍 소녀는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빨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귀를 집어 던져 버렸다.
“아, 깜짝 놀랐네. 그런데 이 녀석들 어딘가 그 길쭉한 검은 녀석 닮은 것 같지 않아?”
푸른 사신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동의했다.
도로의 장식품처럼 보였던 것이, 마도서의 시체였다니.
분홍 소녀는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건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거대한 출입구는 문도 없이 뻥 뚫려있었고, 건물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긁어낸 것 같은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분홍 소녀는 그 흔적을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어라?”
그렇게 건물 속으로 들어서자, 분홍 소녀는 기시감을 느꼈다.
액자가 잔뜩 걸린 하얀 벽이 쭈욱 이어지는 공간.
아카데미에 있었던 전시실을 한없이 닮아서 그런지, 이 장소에 와본 것만 같았다.
전시실처럼 의자가 놓여있진 않았지만, 이곳은 전시실이 분명했다.
다만 거울을 전시했던 아카데미의 전시실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어떤 일지를 액자 속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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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도 실패. 원인 불명.>
<두 번째 시도 실패. 출력 부족.>
<….>
<백스물다섯 번째 시도 실패. 이제는 숫자를 세는 것도 지겹다.>
<오백서른한 번째 시도. 조금 진전이 있었다. 태양이 뜨지 않는 순간이 가장 유효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이해할 수 없는 액자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분홍 소녀는 그 일지들을 조금 읽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연금술 실험 같은 걸까? 모르겠어.”
분홍 소녀는 이해하기 힘든 일지들을 무시하며, 계속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 조금 이상한 공간이 나왔다.
공간의 구성 자체는 평범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움푹 꺼진 커다랗고 둥근 형태의 방.
전시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꾸며진 새하얀 벽.
그 벽에 다가갈 수 없도록 설치된 돌기둥들.
그리고 분홍 소녀의 반대쪽에도 똑같이 생긴 계단과 문이 하나 달려있었다.
하지만 바닥은 검은색 액체로 찰랑였고, 벽면에는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았다.
벽에는 액자 대신 날카로운 발톱으로 벽면을 마구마구 긁어낸 흔적만이 가득했다.
<어디야?>
<추워.> <배고파.>
<외로워.> <왜 우리들만?>
<언제 와?> <언제 오는 거야?>
<보고 싶어.>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문구들이 가득했다.
천장까지 빼곡하게 <보고 싶어.>라고 쓰여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여긴 뭐지?”
<….>
푸른 사신도 어떤 일인지 모르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홍 소녀는 왠지 검은 액체를 밟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액체 밖으로 나온 살짝 튀어나온 돌기둥을 밟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 돌기둥처럼 둥글게.
그렇게 검은 액체의 바다를 건너 계단 끝에 달린 문을 열고 나가자, 문 건너편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연금술사 아카데미 제복과 비슷하게 생긴 깔끔한 제복.
허리춤에는 날카로운 칼 한 자루.
머리에는 각이 잡힌 커다란 모자.
그리고 손에는 하얗게 빛을 뿌리는 둥근 구슬을 들고 있었다.
[아, 손님이 오셨군요.]
그 인영은 마도서처럼 의지를 직접 뇌리에 박아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서히 그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찮은 점 눈과 커다란 입.
고개를 돌리자 드러난 얼굴은 건물 밖에 잔뜩 죽어 있던, ‘아귀’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