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7
지옥과도 같았던 칭찬세례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해가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불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지금쯤 훈련장에 나가서 몸을 풀고 있었겠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매일 같이 해왔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기는커녕 나갈 준비조차 안 했다.
왜냐고 물어봐도 이유는 없다. 그냥 게으르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게으르기로 결정했을 뿐.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나서 죽어라고 달려왔던 나잖아?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날도 필요하지 않겠어?
솔직히 말해서 당장 죽어라 발악을 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2학기 메인스토리의 악역이 되었어야 할 나크라드가 예술 교단 지하에 처박혀서 심문당하고 있는데 뭐 하러 필사적이겠어.
지난 번 장신구를 받기 위해 변태 사도를 만나러 갔을 무렵.
나는 그 녀석에게 나크라드가 어찌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물었다.
처참하고도 웃긴 몰골로 만들어두긴 했지만 명줄을 끊지는 못했으니까.
예술 교단 지하에 갇혀 있는 녀석이 무얼 하고 있을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변태 사도 녀석은 내가 이런 질문을 하리라 생각했던 듯 별 망설임 없이 녀석에 대한 걸 이야기 해주었다.
우선 나크라드가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완벽히 무력화해두었다는 것.
그리고 녀석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것.
‘아직은 교차검증이 안 된 상태인지라 무언가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나면 카리아님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변태 사도의 이야기에는 나조차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빈 구석이 많았지만 난 그 부분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캐물을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하려나.
변태 사도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얼빠여우가 튀어나와서 내 그림은 어디에 있느냐며 목소리를 드높였으니까.
액자에 보관된 내 바니걸 그림을 껴안고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얼빠여우의 모습은 내 눈가에 절로 혐오를 담게 만들어주었지.
장신구를 머리에 착용한 걸 보고 뒤로 넘어갔을 때는 제발 저대로 죽었으면 좋겠단 생각까지 했다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
그 때 얼빠여우가 뒤졌더라면 어제 내가 쓴 수건을 끌어안은 채 헤헤거리며 자는 얼빠여우도 없었을 테니까.
…어제 칭찬세례를 받을 때 옆에 얼빠여우가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이 녀석이 있었다면 어떤 소리를 지껄였을지.
아아. 그 일 생각하니까 또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내가 칭찬에 이렇게까지 내성이 없을 줄은 몰랐어.
진짜 내가 대단하다 생각한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눈치 보는 거라는 걸 아는데.
그 중에서 진심을 담은 사람이 없다시피함을 알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지다 못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더라.
중간에 칼이 찾아와서 전투학 시험과 관련해 이야기할 게 있단 핑계로 날 데려가지 않았다면 창문으로 긴급탈출을 했을 거야.
뭐 어쨌든 칼이 오랜만에 호위기사 다운 행동을 해 준 덕에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나는 녀석에게 어떤 식으로건 감사를 표하려 했다만.
‘아가씨께서도 풋풋한 구석이 있으시군요. 당주님께 이야기 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겁니다.’
칼이 내뱉은 이 한 마디에 감사함이 싹 달아나버렸다.
칼 그 녀석은 아서 일행이 만들어낸 오해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게 내가 그럴 사람이냐고?!
평소의 나는 사려깊음이랑 거리가 먼 이미지잖아!
허접이니 얼빵하니 바보니 병신이니 지껄이고 다니는 꼬마아이의 어디에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는 건데!
방금 전의 칭찬세례가 떠올라 기겁을 하게 된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이 오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칼 그 빌어먹을 녀석은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아하하.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말이 옳은 걸로… 크헉!’
내가 진심을 담아 칼의 복부를 후려친 것은 정당방위였다.
애완견주제에 주인을 놀리려 들다니 건방지잖아.
별로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엄살을 피우는 칼을 내버린 나는 못 다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던전학 교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략 시연이 끝나면 해 줄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었거든.
교수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소란을 수습하고 돌아올 거라 생각한 나는 느긋하게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보니 굳이 귀담아 들으려 했던 게 아님에도 주변의 이야기가 들리더라.
평상시 내 주변에서 새어나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말이야.
평소 내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짜증난다느니 재수 없다느니 꼴 보기 싫다느니 하는 것들밖에 없다.
여전히 아카데미에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니까.
나랑 내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덤비진 못하지만 그래도 뒤편에선 안 좋은 이야기가 잔뜩 흘러나오지.
헌데 그 때 내 주변에서 들린 말은 평소에 상상도 하지 못 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달라진 걸까?’
‘맞아요! 영애는 좋은 분… 헤엑! 목소리 높여서 죄송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쓴다는 거려나?’
‘성녀님께서 괜히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지. 주신의 축복을 받아 회개한 걸 거야.’
‘내가 항상 말했잖아. 저 분 좋은 분이라니까? 나 같은 놈 살리겠다고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
아서 일행이 했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내가 바뀌었다는 걸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난 루시인 걸!
과거의 루시가 벌이던 패악질을 생각해보라고!
그 미친년이 달라졌다고 믿는 게 가당키나 해?
뭐. 이런 이야기를 하던 이들이 대부분 평민이거나 하위 귀족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루시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고갤 갸웃거리는 걸 거야.
루시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을 듣는다면 달라질 수 있단 이야기 절대 못 할 걸?
‘그 분들은 저 년을 너무 착하게 봐.’
‘분명 그냥 우리보고 허접이라면서 놀릴 생각이었을 걸.’
‘루시 알른에게 그런 사려심이 있을 리가.’
‘그 미친 년이 바뀌었을 리가 있나.’
실제로 아카데미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루시 알른이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 아는 이들은 아서 일행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뿐일까. 본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데다 아서 일행이 오해했을 뿐이란 진상까지 알아차렸지.
내가 생각하기엔 이 쪽이 정상이야.
예전에 루시가 저질러 놓은 업보를 생각해 봐.
그걸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루시 알른에겐 타인을 배려할 지능이 없다는 이야기가 절로 나오지 않겠어?
그러니 아카데미 전체의 여론은 크게 변화하지 않은 셈이다만.
몇 명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꽤 기쁘더라.
내게 치욕을 안겨 주었던 세 사람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될 정도로.
왜 잠시냐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거든.
아카데미의 여론이 바뀌었다는 건 결국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기준이다.
과거의 루시만을 알거나, 과거와 지금의 루시 양 쪽 모두를 모르는 사람 말이야.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튀어 나오는데 지금의 나와 밀접한 사람은 어떻겠어.
‘영애가 절차를 무시한 공략을 한 의도는 이해했습니다만 그분들에게는 특혜를 줄 순 없습니다. 공평성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칼의 반응은 호들갑이 아니었어!
내가 과거에 비해 유해졌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서 일행의 오해를 진실이라 받아들인 거라고!
던전학 교수의 흐뭇한 시선을 받던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이 오해임을 주장했지만 교수는 내 말을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아닌 척하는 것이라 생각할 뿐.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걸 보던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이야기를 틀어버렸다.
무슨 말을 꺼내도 들어주질 않으니 설득할 자신이 없더라고.
이런 내 행동을 어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던전학 교수는 내 의도에 맞춰 본론을 꺼내줬다.
별 대단한 건 아니었어.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기말 던전을 계속 개방할 생각이라던가. 내가 만든 던전을 학술지에 올리겠다던가. 하는 내용이 끝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만든 던전에 큰 애정을 지니고 있던 나는 더 많은 이들이 내 던전의 진가를 알아주길 바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후에는 뭐. 별 다른 일이 없었다.
평상시에 하던 저녁 훈련도 거르고 기숙사에 들어와 버렸으니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영애? 안 계세요?”
“루시 알른. 안에 있으면 대답해라.”
젠장!
쟤네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틀어박힌 거였는데 저 쪽에서 직접 찾아올 줄이야!
입술을 꾹 씹은 나는 언젠가 카리아가 기척을 숨기던 것을 흉내내보았다.
절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
그랬다간 쟤네들 손에 끌려가서 벌칙을 받게 될 거라고!
“이상하군. 분명 바깥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러게요. 어디에 가셨을까요?”
그래! 그거야!
내가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데를 뒤지러가!
빨리!
“아뇨. 여러분들. 영애님께선 이 곳에 계시답니다.”
페이비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끼고 양 팔을 껴안았다.
“이 안에서 따스한 신성이 느껴지는 걸요. 제가 영애님의 신성을 착각할 리 없잖아요?”
맞아. 내가 신성으로 페이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페이비도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겠구나!
흐아악! 이런 기본적인 걸 떠올리지 못하다니!
멍청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
“빨리 나와라. 루시 알른.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부탁할 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그래. 하루 종일 시녀 복장을 입고…”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요!’
“푸하핳. 우와. 불쌍 왕자님. 이제는 변태라는 걸 감추는 것도 포기하셔군요?! 역겨워라!”
“누가 변!… 크흠! 어쨌든 나오기나 해라! 다 들켰으니!”
크윽! 얼빠여우나 할 법한 발상에 놀라서 실수를 저지르다니!
분함에 입술을 깨문 나였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패널티에 따라 저들의 요구를 강제한다는 나는 절대적인 을이었으니까.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문 앞에 선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어머. 막 자다 깨신 건가요?”
“부스스한 영애님은 처음 보는 것 같네요.”
그랬더니 내가 예상했던 대로 조이와 페이비, 그리고 아서에게서 흐뭇하다는 시선이.
아니네.
아서 쟤 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분명 한 소리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 조이의 뒤편에서 튀어나온 프레이가 내 시야를 가로 막았다.
“루시. 루시.”
‘…뭔가요?’
“왜. 바보 검사.”
“루시는 사실 부끄럼쟁이인거야?”
순수함으로 가득한 질문을 들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진짜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는 거 진짜 악질이야.
더 짜증나는 건 조이와 페이비가 대놓고 느슨한 웃음을 짓고 있단 사실이다.
저 웃음은 쟤네들 머릿속 내가 이미 자기 배려가 들켜 부끄러워하는 자그마한 여자애란 의미니까.
흐아아악!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얘네들을 만나기 싫었던 거라고!
그만둬!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