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액체가 찰랑이는 방을 넘어서 들어선 방은 이어지는 문이 없는 막다른 방이었다.
하얀색 벽을 가진 건물의 다른 구역과는 달리 베이지색으로 꾸며진 벽면.
사각형으로 각이 진 방의 구석에는 원래 전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액자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쌓여 있었다.
대신 그 방의 벽면에는 온갖 색깔을 가진 아귀들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빨간 아귀, 푸른 아귀, 초록 아귀 등등, 다양한 색의 아귀.
그 그림들은 아귀의 조그마한 차이점들을 만화처럼 과장한 것들이었다.
그런 이상한 공간에서 제복을 입은 아귀가 한 손에 하얀 구슬을 들고,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군요.]
제복 아귀는 약간 초조한 것 같은 목소리로 염파를 쏘아 보냈다.
표정도 최대한 평범하게 지으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귀의 얼굴은 초조함에 점점 찌그러지고 있었다.
“임무? 그게 뭐야?”
분홍 소녀는 그런 아귀의 기색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다만 푸른 사신은 아귀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자, 긴장으로 지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 마지막 임무. 그것은 이곳을 방문한 인간에게 어떤 기록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보고 싶으신가요?]
“응. 보여줘.”
그러자 제복 아귀는 막힌 벽으로 다가가서, 그 벽을 독특한 리듬으로 두들겼다.
그으윽.
그러자 거대한 벽면이 통째로 열리며 숨겨진 방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형 아카데미의 전시실처럼, 움직이는 거울이 가득한 방이었다.
“여기도 거울이 잔뜩 있네.”
분홍 소녀는 아귀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거울에서는 심각한 표정의 사람이 잔뜩 나와서, 소리치고 절규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벌써 2년째 탑에서는 생명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원인이 뭐지?]
[연금술은 영원하지 않다. 탑도 마찬가지. 진화액도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밭에서 씨앗이 발아하지 않는다. 빛도 영양도 물도 충분한데!]
[그래도 학생들은 풍족히 먹을 수 있기를….]
[탑은 자생력을 잃어버렸다. 외부에서 길을 찾아야 해.]
[낮이야. 태양이 우릴 저주하고 있어.]
[뭐가 잘못된 거지? 우리는 이미 인간이 아닌 걸까?]
[거미여. 태양을 먹어 치워라.]
[탑이 망가지고 있어.]
[거미가 망가졌다.]
[도대체 왜?]
[외부에서, 다른 공간에서 물질을 가지고 와야 해.]
[실험은 성공했다. 겨우 금속 조각 하나지만, 성공은 성공이야.]
[이 탑의 모든 연금술사를 모아라. 강철로 만든 이 탑이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 것이다.]
거울 속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마구마구 떠들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느껴지는 것은 하나.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인간들의 감정이었다.
푸른 사신은 슬픈 얼굴로 불쌍한 인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처럼 거울에서 잔뜩 튀어나와 뒤섞인 소리를 구분해서 듣지 못했다.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뚜벅뚜벅 아귀의 등 뒤를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귀는 방의 가장 깊숙이 남겨진 거울 옆에 섰다.
거울 안에는 멀리서 이 탑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영상의 시작은 거대한 원판이 넓게 퍼진 구조물이 점점 우그러들면서 압착되는 것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소음.
거대하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끝의 탑’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없이 우그러들던 탑의 상층부는 어느새 거대한 강철로 만들어진 막대처럼 뭉쳐져 버렸다.
번쩍.
그와 동시에 탑의 꼭대기에서 시작된 섬광이 화면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섬광이 잦아들자, 드러난 것은 우그러든 부분이 사라져 반토막이 되어버린 탑의 모습이었다.
[이 거울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제 설명은 끝입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제복 아귀는 그렇게 말하며, 구슬을 든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푸른 사신은 지금 아귀의 분위기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 거울들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설명해 줄 수 있어?”
[제 임무는 인간을 거울에 안내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럼, 이 계층 위에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아귀는 초조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홍 소녀는 아귀의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하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는 다른 층의 정보는 알지 못합니다.]
아귀의 얼굴이 조금씩 호두의 표면처럼 찌그러지고 있었다.
구슬을 든 손이 더욱 잘게 떨기 시작했다.
“팔이 길고, 다리가 없는 길쭉한 석상은 뭐야?”
[그건 있을 수가 없는 동상이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귀는 무의식중에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뭔가를 먹는 것처럼.
“건물 밖에 잔뜩 있는 아귀 시체들은 뭐야?”
[아귀? 아, 저와 같은 수호자를 말하시는 거군요.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그것은 모두 코어를 먹은 아귀들입니다. 그들은 제가 모두 처리했죠.]
[코어를 먹은 아귀를 처리하는 것도 제 ‘임무’니까요.]
분홍 소녀는 느끼지 못했지만, 아귀의 몸에서 근육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저 방에 있는 문구들은 누가 쓴 거지? 그리고 그 검은 액체는 뭐야?”
분홍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뒤쪽 문을 가리켰다.
[그것은 절대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아귀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서, 호두처럼 흉악하게 변했다.
하지만 분홍 소녀는 인간과 지낸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다리가 긴 검은 아귀’는 뭐야?”
푸른 사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애착 인간의 뺨을 때찌때찌했지만, 분홍 소녀는 이미 말을 뱉어버린 상태였다.
[그것도 대답이 불가능합니다.]
아귀는 이제 빨갛게 물든 얼굴로 대답하면서, 손에 들린 구체를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니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탑에 ‘검은색 수호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얀 구체를 삼켜버렸다.
[임무가 끝났어.]
[드디어!]
그러자 아귀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으드득.
엄청 고통스러워 보이는 뒤틀림이었지만, 아귀는 정말 후련한 것 같은 염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말 먹고 싶었어.]
아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고 씨익 웃었다.
그 입속에는 수없이 많은 하얀 이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
나는 ‘댖지’로 만든 황금 사신들을 탑처럼 쌓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글동글.
통통.
댖지 황금 사신.
말랑말랑 황금 사신 탑을 쌓고 놀다가, 댖지 황금 사신을 데굴데굴 굴려서 볼링하기도 했다.
황금 사신의 ‘댖지’화가 풀릴 때까지.
그리고 황금 사신이 본 모습을 되찾자, 나는 바닥에 누워서 후련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골든-메카-티라노 아머가 이미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웃고 있었더니, 황금 사신들이 몰려와서 내 뱃살 위에서 점프를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졌어!’
‘엄마 댖지!’
나는 일부러 배를 내밀면서 황금 사신들을 높이 띄워주었다.
그러자 황금 사신들은 재밌다는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더 높은 데서 뛰어내린 적도 많으면서, 신기하게도 매번 재밌어하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티라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임스가 공룡 갑옷을 만들려면 또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지?
기다리기 귀찮아.
그러고 보니 푸른 사신이 향한 공간이랑 연결하는 데 성공했었지?
푸른 사신이 향한 공간은 강철탑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고, 공간 유실도 강철탑이랑 연관이 있어 보여.
그럼, 푸른 사신이 있는 곳에 티라노의 머리가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앙!’
그러자 내 배 위에서 놀던 황금 사신들은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감각을 뻗어서, 푸른 사신이 있는 곳을 향해 순간 이동했다.
***
풍덩.
푸른 사신과 연결된 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전혀 다른 세계로 도착할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을 너무 멀리해서 그런가, 엄청 어지러워.’
‘여기는 어디지?’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기게 만드는 진화액의 냄새.
뭐, 통로를 조그맣게 여는 것만으로도 진화액이 쏟아질 정도로 엉망인 세계니까 그럴 거 같긴 했어.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늘 위를 장식한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밤하늘이었지만, 얼기설기 엮인 천막이 하늘을 뒤덮은 점과 달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보면 보이는 것은 매끈한 하얀 돌로 꾸며진 건물들이 보였다.
마치 수영장처럼 만들어진 물웅덩이와 둥글둥글 귀여운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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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휴양지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였다.
처음에는 ‘설마 푸른 사신은 이런 곳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휴양지에는 상당히 강력한 석상 오브젝트들이 우글우글 도사리고 있었다.
길쭉한 두 팔과 지면에 뿌리내린 다리.
검은 사신이 취한 ‘옛 신’의 모습과 닮은 오브젝트들이었다.
그르륵. 그르륵.
어찌나 많이 몰려왔는지, 석상들이 기어가는 묵직한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워버렸다.
나는 어지러운 것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허공을 움켜쥐며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상들이 보내는 혼란스러운 의지가 들려왔다.
‘돌아, 왔다?’
‘돌아왔어?’
‘배고파.’
‘어디야?’
‘안 보여.’
‘거짓말!’
어수선하고 정돈이 되지 않은 의지들.
그리고 그런 의지들이 점점 일치되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단어를 내뱉었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