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는 그 색깔만큼이나 무심하고도 냉정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저 눈빛을 마주했다면 겁에 질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 눈을 마주하고도 태연했다.
조이 파르탄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조이는 겉모습만 보면 어느 로맨스 소설에 나올 것 같은 악역영애처럼 생겼다.
날이 선 눈이나 커다란 키.
살짝 컬이 들어간, 흔히 롤빵머리라 부르는 스타일의 금발.
건드리면 찔릴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공작가문의 영애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 고고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속은 다르다.
파르탄 공작가문은 대중에 나도는 여러 험악한 소문과는 달리 평범한 가문에 불과하고.
무뚝뚝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어머니의 아래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조이도 그 속은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이다.
캐릭터 설명에도 이렇게 적혀 있었지.
악역영애의 외모와 소심한 여고생의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고.
소울 아카데미 플레이어들은 능력은 뛰어난데 쉽게 당황하고 패닉에 질리는 성격 탓에 실수로 자기 실력을 다 까먹는 조이를 보고서 얼빵영애라고 불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무뚝뚝하고 고압적인 어투를 들은 순간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모니터 너머로 볼 때는 조이가 아카데미 내에서 친한 사람 이외에게 공포를 산단 설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조이의 외모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긴 하지만 소심하고 착한 성미를 지닌 그녀가 공포의 대상이 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허나 현실에서 조이를 만나고 나니 그 설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소리도. 눈빛도. 행동도. 그녀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의 위에 군림하여 타인을 아래로 짓누르고 있었다.
뒷사정을 다 알고 있는 나조차도 살짝 움츠러들 지경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조이를 보았다면 두려움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티어라 마스에 방문하러 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맞아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이 쓰레기 같은 가게는 예약한 손님만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메스가키 어로 번역된 말을 들은 조이의 입가가 일자로 굳었다.
얼핏 보면 무례한 루시의 발언이 거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진 않을 거다.
조이는 주변에 학교에 한 명쯤은 있을 실없는 호인이다.
얼마 안 있어 만나게 될 성녀님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애로움을 지닌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일로는 화는커녕 짜증도 내지 않는다.
자기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을 뺏기고도 앞에서는 행복을 빌어준 후에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얼빵영애가 이 정도 발언에 화를 낼 리가 있나.
지금 저 표정은 쓴웃음을 지은 것이리라.
잘 보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으니까.
“예약제인 걸 모르셨나요?”
‘네…’
“네. 소문만 듣고 왔거든요. 이런 무례한 곳일 줄 몰랐죠.”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말을 하는 게 무섭다.
내가 평범하게 뱉은 말이 어떤 식으로 왜곡될지 몰라서 더더욱.
여태까지는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시종들은 지위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베네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허허 웃어넘기는 데다가,
기사단의 사람들은 전장에서 들었던 것에 비하면 별 말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이는 내 아랫 사람도 아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웃어줄 사람도 아니다.
내가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그 무례는 조이에게 미움을 사는 결과로 돌아오겠지.
나는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다.
예전에 매도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헛소리를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경멸당하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냐고!
적어도 나는 아냐!
일단 조이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피하자.
영애님이라고도 부르지 말자.
베네딕한테도 바보 아버님 소리를 지껄이는 이 입이 조이를 어떤 호칭으로 부를지 감도 안 잡히니까.
호칭 부분만 제외한다면 좀 임버릇 나쁜 사람 정도이니 조이도 쓴웃음을 짓고는 넘어갈 것이다.
진짜 입장상 아래일 때는 존댓말을 써줘서 다행이야.
공작 영애님한테 야. 허접.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테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규칙은 규칙이니까.”
‘잘 알아보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알아보지 않았다곤 하지만 참 건방진 식당이에요.”
조이가 여기에 왔다는 건 그녀도 티어라 마스에 방문할 생각이라는 소리겠지?
내가 예약 이야기를 했을 때 당황하지 않았던 걸 보면 예약을 하고서 온 모양이네.
지금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저게 예약표인가.
부럽네. 감정표현이 드문 히로인이 웃음을 짓던 티어라 마스의 음식은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떡하겠는가.
공작 가문의 영애님도 예약을 하고서 찾아오는 장소에 맨 손으로 온 게 잘못이지.
다음번에 다시 예약을 하고서 찾아오도록 하자.
그럼 식사는 어디서 해야 하려나.
소울 아카데미에서 공략가능 캐릭터들과 데이트를 할 때 매번 방문하던 케이크 가게는 어떨까.
거기에 같이 가기만 하면 이상할 정도로 호감도가 잘 올라서 케이크에 뭘 집어넣은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던 곳이었는데.
거기에 가서 호감작 케이크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첫 끼부터 디저트를 먹으러 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맛만 있으면 오케이 아니겠어?
그리 결정을 내린 나는 티켓에서 눈을 떼고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조이의 굳은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런 무서운 눈으로 절 바라보는 건가요?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좀 따끔따끔하거든요?
“알른 영애님.”
‘네?’
“왜 그러시나요?”
“…같이 식사를 하러 가시겠어요?”
네?
*
자신의 맞은편에서 뚱한 얼굴로 앉아있는 루시 알른의 얼굴을 바라보던 조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미쳤지.
왜 루시님한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 걸까.
티어라 마스의 음식을 먹는 걸 그토록 고대했으면서 왜 그 즐거운 경험 안에 루시님을 끼워 넣은 거냐고 멍청한 나야!
그치만 그 때는 불가항력이었단 말이야.
루시님이 레스토랑에 들어가지 못해서 짜증난다 그러시더니 내 손에 들린 표를 가만히 쳐다봤다고.
가시를 쏘아대는 고슴도치의 레이더에 내 표가 감지되었는데 어떡하라고!
그 상황에서 루시님을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갔어 봐!
자기 앞에서 자랑하고 가버렸다고 생각했을 걸?!
모르는 척 하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한 원한을 샀을 거라고!
조이는 루시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어쨌건 조이는 파르탄 가문의 공작 영애니까 루시가 해를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도 하고.
그럼 왜 루시를 꺼려하는 가하면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조이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녀는 파르탄 가문의 영애이자 위압적인 외모의 소유자니까.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나 가족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인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루시처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조이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루시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자그마하고 아름다워서 꼭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외모에 이끌려 말을 걸었던 날을.
그리곤 ‘넌 무슨 허접인데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었던 그 오만한 눈빛을.
‘멀대 같이 크기만 한 허접 주제에 내려다보면 내가 무서워 할 것 같아?’
이후 사정을 파악한 베네딕이 루시를 이끌고 사과를 하러 왔지만 조이는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직설적인 적의와 모욕을 받아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차라리 직설적인 게 낫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예전 일을 떠올리던 조이는 오늘 따라 루시가 조용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실례겠지만 평소의 루시는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기분 나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항상 소란의 중심지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루시는 조용하게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 다른 이들을 구경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침묵을 고수하는 그 모습이 어색하고도 신기하긴 했지만 조이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시한폭탄이 얌전히 있겠다는 데 굳이 도화선에 불을 붙일 필요는 없으니까.
“전채인 스프입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사용인이 첫 음식을 가져왔다.
사용인은 스프를 앞에 두고서 무어라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조이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떤 음식이건 간에 맛만 있으면 그만이잖아.
평소에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굳이 음식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지.
사용인이 떠나가고서 수저를 들어 한 입을 떠먹은 조이는 눈이 번뜩이는 맛에 놀랐다.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퍼지는 연한 훈제 향과 그 아래에서 요동치는 버터의 풍미.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감자와 양파.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연어.
사용인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이 음식은 음식 그 자체로 스스로의 맛을 알려주는 설명서나 다름없었으니까.
루시님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슬쩍 고갤 들어 루시의 얼굴을 살핀 조이는 쉴 새 없이 수저를 움직이고 있는 루시를 보고서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동그랗고 커다란 분홍색의 눈동자가 스프에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꾹 다물려 있었던 입은 스프의 맛을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조막만한 그 손은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조이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루시가 저리 다급하게 먹으면서도 최소한의 예법을 지키고 있다는 거였다.
자신의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은 채 루시의 모습을 살피던 조이는 루시가 비어가는 그릇을 아쉬운 듯 바라보는 걸 보고 나서야 다시금 스프에 손을 댔다.
그 후에 나온 티어라 마스의 음식들은 하나 같이 맛있는 것들 뿐이었다.
공작 가문에서 온갖 미식을 즐겨 보았던 조이가 감탄을 하게 될 정도로.
허나 그녀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루시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데 집중했다.
정말 입만 안 열면 귀여운 인형 같은 분이신데.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나랑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엔 외모가 험악하고 속은 여리지만 이 분은 겉이 여린데 속이 험악하니까.
어라? 정 반대인가?
식사를 모두 끝마쳤을 즈음에 루시는 조이가 평생 볼 수 없었던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에 홀린 걸까. 조이는 순간 루시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고서 먼저 물음을 던졌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루시는 물음을 듣고는 눈웃음을 흘리면서 이렇게 답했다.
“나쁘진 않았어요. 얼빵영애님.”
네? 얼빵영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