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탑, 최상층.
검은 갑각을 가진 거대한 거미가 끊임없이 파이프를 토해내고 있었다.
‘탑을 짓는다.’
‘계속, 영원히.’
‘탑이 소명을 이룰 때까지.’
이미 설계상의 작동 시한을 훨씬 넘긴 거미는 무너지는 중이었다.
한참 전에 부스러진 거미의 눈들은 더 이상 현실을 비추지 못하고, 아주 오래된 과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거미의 주인과 관련된, 그리운 꿈이었다.
[잘했어. 오늘도 많이 만들었구나.]
[큰일이야. 더 이상 재료가 없어. 어떻게든 재료를 구해야 해.]
[오늘은 어때? ‘눈’을 짊어지는 게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줘. 금방 해결책을 찾을 테니까.]
[방법을 찾았어. 옥을 다루던 고대 연금술사의 기록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파편화되어서, 더 이상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꿈이었다.
끼기긱. 끼이익.
그렇게 끊임없이 파이프를 자아내던 거미는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갑자기 작동을 정지해 버렸다.
거미의 머리 위에 얹어진 헤일로가 마치 망가진 형광등처럼 깜박깜박 점멸했다.
그리고 점점 그 빛을 잃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약탈자….’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로스처럼, 하늘을 향한 탑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던 거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검은 사신이 가득한 정체불명의 휴양지.
나는 골든-메카-티라노 아머를 냠냠 먹어 치운 것으로 보이는 검은 사신을 손아귀에 쥐고 통통한 뺨을 마구 문지르고 있었다.
‘으앙!’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문질러서 그런지, 공룡 갑옷을 먹은 검은 사신들의 볼이 통통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물리 면역에 가까운 아이들인데, 이렇게 되기도 하네.
히히.
충분히 분풀이하고 나서 검은 사신들을 풀어주자, 다른 검은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볼 빵빵해!’
‘말랑말랑!’
그렇게 모여든 검은 사신들은 볼이 부어오른 검은 사신들을 콕콕 찌르거나, 기습적으로 깨물기도 했다.
이렇게 내려다보면 확실히 검은 사신은 황금 사신이랑 닮았단 말이지.
조금 소극적이고 활기가 살짝 부족한 점만 달라 보였다.
검은 사신들은 자기들끼리 뒹굴뒹굴 신나게 놀더니,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내 발목 근처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엄마!’
‘우리들이 신전을 지켰어!’
‘청소했어!’
‘신앙을 모았어!’
‘아무도 없어도, 계속 계속 기다렸어!’
그러더니 내 발가락을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우리 잘했어?’
내 발치에 달라붙은 검은 사신들은 천진난만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래, 잘했어.’
검은 사신들이 한 행동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검은 사신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며 칭찬해 줬다.
그러자 검은 사신들은 보답받은 것처럼 흐물흐물해지며, 눈물을 한두 방울씩 흘리곤 했다.
‘히히.’
‘엄마다.’
‘상냥한 엄마.’
뭐, 공룡 갑옷은 부숴 먹었지만, 이 아이들 잘못은 아니겠지.
검은 사신들을 모아두고 뒹굴뒹굴하고 있으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임스에게 또 시키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초조하게 굴었던 걸까.
그렇게 찰랑찰랑한 물 표면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더니,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청량한 검은 사신의 울음소리를 100배는 키운 것처럼 거대한 소리.
그와 동시에 특이하게 생긴 아귀가 다급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쭉한 다리를 가진, 어딘가 슬퍼 보이는 검은색의 아귀.
척 보기에도 검은 사신들이 잔뜩 뭉쳐져서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
끝의 탑, 무너진 건물 잔해.
푸른 사신은 점점 가루가 되어 부스러져 가는 이빨 아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언령을 써서 그런지, 푸른 사신의 가슴은 마치 숨이 찬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이겼어!’
하얀 아귀만큼 강력한 오브젝트인 이빨 아귀를 물리치다니!
평소의 푸른 사신이면 제대로 버티지도 못할만한 상대에게 이룩한 엄청난 성과였다.
히히.
푸른 사신은 그 사실이 정말 기뻐서,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애착 인간을 지켰어!’
그 순간, 푸른 사신의 귀로 끔찍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끼이익. 끼이익.
기름칠이 덜 된 기계가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
그와 동시에 천천히 지면을 뒤덮기 시작하는 거대한 그림자.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데, 하늘을 대부분 가려버릴 만큼 커다랗게 보이는 거미의 그림자였다.
‘해를 먹는 거미!’
각 계층을 이루는 거대한 원판만큼 거대한 거미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빨 아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오브젝트.
그 거미는 푸른 사신을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적대하고 있어….’
푸른 사신은 마이크 지팡이를 꼭 움켜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원판 위에 나타난 거미는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여기저기 너덜너덜하게 갈라진 검은 갑각.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마그마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속살.
무기질적이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
움직일 때마다 끔찍한 소음이 나는 관절.
그 모습은 마치, 엄마가 헤일로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과 닮아 있었다.
끼이익. 끼이익.
움직일 때마다 망가져 간다.
천천히 푸른 사신을 향해 다가올 때마다, 파편이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었다.
쿵. 쿵.
그리고 그 파편들은 원판 위로 묵직한 소음을 울리며 떨어졌다.
푸른 사신은 애착 인간 근처에서 거미를 올려다보며, 언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청 강해. 그리고 뭔가 위험해 보여.’
거미는 그렇게 한참 동안 푸른 사신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 거대한 다리를 푸른 사신을 향해 내리찍었다.
‘!’
[우리 모두를 지켜주세요!]
[절대로 지지 않을 물방울 보호막!]
푸른 사신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마이크에 입을 대고 언령을 만들어 냈다.
쿠웅.
그 언령과 함께 나타난 물방울은 그렇게나 거대한 거미의 공격도 손쉽게 막아냈다.
‘강해졌어.’
‘이 정도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애착 인간을 지킬 수 있어!
그렇게 푸른 사신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순간, 거미의 머리 위에 있는 헤일로가 강렬한 하얀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약탈자는 그 힘으로 찢어질 것이다.>
<태양처럼 어둠 속에 잠긴다.>
<적막의 칼날이 적을 꿰뚫는다.>
찌이익.
그 순간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그와 동시에 푸른 사신의 두 눈은 빛을 잃어버렸고,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어두워. 안 보여. 안 들려.’
그리고 한 박자 느리게,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두 눈이 찢어지는 고통.
[아파. 아파. 아파. 아파.]
푸른 사신은 양 눈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엄마…. 너무 아파.]
아무것도 보이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푸른 사신은 작은 의지로 엄마를 찾았다.
***
정말로 거대한 강철 파이프 탑.
아니 이걸 탑이라고 해야 하나?
거인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계단? 구조물?
아무튼 나는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검은 아귀의 등 뒤에 타서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아귀는 ‘검은 사신’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낙지처럼 흐느적거렸지만 엄청나게 빠르고 힘이 강했다.
아마 검은 아귀의 한 걸음이 내 하루치 걸음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푸른 아이가 위험해.’
검은 아귀는 내 장작을 먹을 생각조차 안 하고, 그저 다급하게 나를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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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푸른 사신이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감각을 사방에 뻗어봐도 푸른 사신의 위치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느껴졌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느껴지지 않은 거지?
나는 살짝 초조한 감정을 느끼며, 검은 아귀의 정수리 위에 서 있었다.
그렇게 아귀 머리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이 탑은 마치 나선형 계단처럼 빙글빙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구조로 보였다.
‘장작 따뜻해.’
‘빨리 먹어봐.’
검은 아귀 위에 올라탄 검은 사신들은 검은 아귀를 구성하는 검은 사신에게 장작을 먹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렇게 검은 아귀를 타고 몇 계층이나 뛰어넘었을까.
그 계층만큼이나 거대한 거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계층에서 헤일로를 쓴 거대한 거미 오브젝트와 두 눈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푸른 사신이 보였다.
‘!’
나는 그 모습을 ‘눈’을 사용해서 바라보며, 사나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내 눈에는 거미의 파괴 조건, <헤일로를 분리한다.> 가 비치고 있었다.
아귀 사신이랑 파괴 조건이 똑같네.
***
끝의 탑, 폐허가 된 계층.
그 계층에는 빛 하나 없이 끝없는 어둠 속에 잠긴 지하 공간이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그리움에 깊이 잠든 어둠이 가득한 지하에 커다란 진동음이 수차례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격렬한 충격파로도 지하의 고요를 깨지 못했다.
그 순간, 마치 어둠을 담은 바다처럼 고요한 그곳에 황금색 빛 한 점이 떨어져 내렸다.
회색 사신이 뿜어낸 장작 중, 극히 일부분의 파편이었다.
‘따뜻해.’
하지만 그 하나의 빛, 그 하나의 온기는 끝없는 적막을 깨트려 버렸다.
‘엄마가 왔어!’
짧은 의지 한 조각.
그 의지 한 조각이 퍼져나간 다음 순간, 어둠으로 가득한 지하 공간에 수백 수천 개의 황금색 눈동자가 동시에 눈을 떴다.
‘엄마!’
그리고 지하 공간에서 검은색 격류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석유처럼 계층 지하에 잔뜩 파묻혀 있었던 검은 사신의 격류였다.
‘엄마가 있어!’
‘진짜 엄마야!’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검은 사신들은 거미도, 헤일로도, 인간도, 주변 상황도 모두 무시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엄마!
검은 사신들은 엄마라고 느껴지는 회색 사신을 익숙한 형태로 둘러싸 버렸다.
‘작아진 엄마.’
‘엄마 아직도 아픈 거야?’
‘왜 이렇게 작아?’
‘엄마를 도와줘야 해!’
그렇게 회색 사신은 검은 거인 인형 옷을 입게 되어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