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탑에서 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거미와 맞닥뜨린 푸른 사신은 순식간에 깊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다.
시각, 청각, 촉각 모두 마비된 채 오직 양 눈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만이 푸른 사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푸른 사신의 마음속에서 후회와 자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애착 인간도 죽어버려….’
푸른 사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애착 인간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던 장작의 불길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이렇게 끝나면, 어쩌면 애착 인간과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장작이 사라져가자, 푸른 사신은 무의식중에 희미한 위안을 찾으려 했다.
이 머나먼 이계에는 푸른 사신을 죽지 않게 만들어 주던 ‘엄마’가 없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미니 사신이라도 ‘미니 사신 발할라’에 들어설 수 없겠지.
‘춥네….’
장작의 온기가 사라지고 점점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자, 푸른 사신은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어둠이 물러나고, 온 세상을 덮는 듯한 따뜻한 기운이 푸른 사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푸른 사신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엄마…?’
믿기지 않는 현실에 푸른 사신은 굉장히 놀라, 미약한 의지를 흘렸다.
그리고 그 따스한 온기가 푸른 사신의 눈까지 닿자,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고통이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티라노가 부서졌을 때만큼 사나운 표정의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 강해.’
엄마의 존재 자체가 이 공간을 지배하는 듯했다.
엄마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현실이 뒤틀리고 재구성되었다.
주먹을 쥐면 공간이 뒤틀리고, 손을 휘두르면 대지가 갈라졌다.
그것은 별다른 기교 없이, 그저 막대한 장작의 폭력이었다.
‘정말 엄마야. 엄마가 왔어.’
안도감과 감격,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안전함을 느끼며 푸른 사신은 엄마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공포와 불안이 사라진 채, 푸른 사신은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푸른 사신의 얼굴에는 작지만, 뚜렷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 것 같은, 편안한 미소였다.
***
끝의 탑,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계층.
그곳에는 눈을 붙잡고 쓰러진 푸른 사신과 분홍색 머리카락이 특이한 인간, 그리고 헤일로를 쓴 거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푸른 사신의 애착 인간인 건가.
나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검은 아귀의 입속에 보관하고, 다친 푸른 사신을 품에 안았다.
‘엄청 아프겠네….’
푸른 사신의 눈동자에는 공간이 잘린 것처럼 이질적인 균열이 흐르고 있었다.
그 상처를 보자, 이상하게 조금 화가 났다.
어차피 장작을 집어넣으면 말끔하게 나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엄마다….]
어느새 상처가 나은 푸른 사신은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헤실헤실 웃더니 내 품 안을 파고들며 다시 잠들어버렸다.
나는 잠이든 푸른 사신의 머리통을 톡톡 두들겨 준 뒤, 공간 절단 속에서도 멀쩡한 거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헤일로를 뒤집어쓴 거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빤히 내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를 살펴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강해 보여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헤일로 거미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거미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해 보였다.
내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다음 순간, 온몸이 바스러져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꽤 강해 보이네.’
아마 몸만 멀쩡했다면 아귀 사신만큼 강하지 않았을까?
나는 푸른 사신에게 장작을 계속 밀어 넣으며, 그 거미를 향해 한 손을 쭉 뻗었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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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뀩.’
그러자 공간이 우그러들며 만들어진 검은색 구체가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적에게 유효한 수단인, 그 내부에 끝없는 공허를 내포한 구체.
하지만 거미의 머리 위에 씌워진 헤일로가 빛을 흩뿌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공간 왜곡은 이 땅에 닿지 않는다.>
헤일로 거미는 푸른 사신의 마법과 닮은 언령을 자아냈다.
그러자 공간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검은 구체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푸른 사신처럼 언어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헤일로인 건가?
성가시네.
나는 한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러서, 공간을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촤아악.
내 손가락이 흐르는 데로,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섯 손가락의 궤적은 하늘을 찢으려 했고, 튼튼해 보이는 구조물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공간 왜곡은 이 땅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공간 절단이 현상으로 변하는 순간, 황금색 장작으로 돌아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폐허 속에서 황금색 꽃잎이 휘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
그렇다면.
나는 콩콩, 발을 두 번 굴러서 미니 사신 정원을 불러냈다.
<이 땅에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
그러자 미니 사신 정원의 입구가 열렸지만, 미니 사신들이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엄마가 부르고 있어!’
미니 사신 정원 건너편에는 황금 사신들이 마구마구 달려와서, 투명한 벽에 머리를 찧고 넘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공간 절단이 통하지 않아.
미니 사신 정원도 불러낼 수 없네.
그럼, 헤일로나 불변구는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내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자, 드디어 거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이익.
거미는 오래된 기계 같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언령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너를 내포한 공간이 절단된다.>
<이 땅에서 너는 피할 수 없다.>
정확히 나만을 대상으로 하는 언령.
사방의 공간이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하지만 거미가 그렇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점점 부스러지고 있었다.
검게 타버린 껍질이 거미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면을 마구 울렸다.
그리고 나도 공간 절단에 의해서, 계속 싹둑싹둑 잘렸다.
***
스아악!
정말 천천히 날아오는 공간의 칼날에 내 오른손이 잘려 나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황금색 불꽃으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거미와 나는 서로에게 공간 절단을 마구마구 날리는 중이었다.
다만 내 공격은 모두 사그라들고, 거미의 공격만 내 몸을 토막 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치사한 거미는 공간 절단에 회피 불가 속성까지 부여해 둔 상태였다.
다행히도 예린이가 나를 ‘댖지’로 만들어둬서 그런지, 장작이 많아서 재생 정도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거미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언령을 만들 때마다 부스러져서, 그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문제는 거미가 너무 커서, 다 깎아내려면 연 단위로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재생하는 와중에 슬픈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
‘티라노가 죽었어.’
‘골든-메카-티라노 아머도 부서졌어.’
‘모든 티라노에게 깃털이 돋아나기 시작했어.’
이런 생각을 계속 반복했다.
목적은 단 하나.
심장에 숨어 있는 ‘죽음을 보는 헤일로’를 꺼내는 것이었다.
공간 절단.
미니 사신 정원.
헤일로 소환.
불변구 소환.
전부 통하지 않는 나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은 심장의 헤일로뿐이었다.
슬퍼져라.
나는 슬프다.
나는 화가 난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을 상상해도, 헤일로는 나타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중, 이변이 일어났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앙!
그리고 바닥이 터져나가며 검은색 격류가 계층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엄마가 있어!’
‘진짜 엄마야!’
그것은 흐물흐물한 검은 사신의 격류였다.
검은 사신의 눈동자가 점점이 박혀 있어, 마치 밤하늘처럼 보이는 격류.
그 격류는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작아진 엄마.’
‘엄마 아직도 아픈 거야?’
‘왜 이렇게 작아?’
‘엄마를 도와줘야 해!’
그리고 검은 사신들은 나를 기묘한 인형 옷으로 둘러 싸버렸다.
불편해.
검은 사신들이 몸을 가리자, 시야의 99%를 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늘구멍 하나만 뚫린 안경을 쓴 기분이었다.
공간 이동으로 검은 사신들 사이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순간, 이상한 순환이 느껴졌다.
마치 검은 사신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느낌.
검은 사신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서 장작이 천천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거인의 육체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검은 거인이 검은 사신을 먹었던 걸까?’
지금이라면 내 작은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거미는 악탈자를 배제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언령을 자아냈다.
<너를 내포한 공간이 절단된다.>
<이 땅에서 너는 피할 수 없다.>
그러던 중, 지하에서 갑자기 나타난 신의 파편이 뭉쳐 거대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신의 형상.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감.
아니, 신일 리가 없다.
신은 죽었으니까.
하지만 검게 뭉친 그 형상은 점점 그 크기를 늘려만 갔다.
굉장히 많은 파편이 모여서 그런지, 이제 거의 거미 자신과 비슷한 크기까지 자라나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융합되지 못한 파편들은 바닥에 검게 깔렸다.
하지만 거미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움직였다.
끼이익. 끼이익.
그리고 하늘을 보고, 언령을 뱉었다.
<공간이 잘려 나간다.>
<너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계층도 양단한 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공간 절단.
하지만 공간 절단은 적에게 닿는 순간, 무력하게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신의 형상은 거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상이 너무 커져 버려 ‘회색의 얼굴’은 이제 얼굴 부분에 있는 회색 점이 되어버렸지만, 그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염파를 쏘아 보냈다.
[회색 사신 빔!!!]
순간, 형상에 박혀 있던 무수한 눈동자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각각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고,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빛줄기들은 서로를 향해 끌려가듯 모여들더니, 거대한 빛의 파도가 되어 거미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무수한 파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은 조각 하나하나에서 황금빛 빛무리가 피어올랐고, 그 빛은 마치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거미를 향해 솟구쳤다.
위에서 쏟아지는 빛의 폭포와 아래에서 치솟는 빛의 분수가 만나 소용돌이쳤다.
주변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찼고,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미는 삐걱대는 몸을 이끌고, 힘을 끌어모아 하나의 언령을 만들어 냈다.
<이 땅에서 빛은 닿지 않는다.>
<빛은 사그라들고, 끝없는 어둠이 도래하리라.>
빛을 지우고, 막아내는 언령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빛무리들은 언령을 무시하고 거미를 사정없이 관통하기 시작했다.
‘아….’
거미는 그 빛무리를 맞으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의 권능을.
신의 증거를.
빛무리에 녹아들어 있는 신의 힘을.
그 힘에 육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점점 헤일로가 벗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때 거미의 존재를 사정없이 갉아 먹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망가진 거미의 존재를 간신히 지탱해 주고 있던 헤일로.
그것이 벗겨지고 있었다.
‘신이 돌아왔어.’
‘주인, 이 탑은 소명을 다한 거겠지?’
거미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 주인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