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1
다음 날 아침.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숙면을 취한 나는 나답지 않게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파르나가 찾아와 날 깨워주지 않았더라면 오후 무렵까지 숙면을 취하지 않았으려나.
백작 부인이 열정적으로 일을 지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침 식탁에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프레이가 어디 있는 지에 대해 물었다.
패널티가 아직도 적용되는 지 아니면 어제 밤을 끝으로 마무리 지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서.
“언니라면 먼저 아카데미로 갔는데요?”
‘네? 프레이가요?’
“뭐? 그 바보검사가?”
친구를 내버려 두고 가는 게 맞느냐는 백작 부인의 만류마저 무시한 채 도망치듯 떠나버렸다는 설명을 들은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젯밤에 자기가 했던 행동이 부끄러웠던 거겠지.
프레이 걔 은근히 소녀소녀한 부분이 있으니까.
아카데미에 돌아가도 만나기 어렵겠단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일부러 프레이를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프레이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태양이 하늘 한 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아서가 나를 찾아왔다.
오늘은 못 만나겠다는 프레이의 전언과 함께.
“그 녀석이 가만있지를 못하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다만 오늘은 한층 더 유난스럽더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묻기도 전에 도망을 치고 말았단 이야기를 들으니 그 때 프레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돼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용무는…’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요? 그렇다면 제가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사라져 주세요. 불쌍왕자님의 얼굴을 보면 식욕이 달아나서.”
“그대에겐 안타까운 일이다만 아직 용무가 남아있다. 내일 그대가 수행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
내일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진짜로 식욕이 싹 달아나 버렸다.
나한테 뭘 시킬 생각이기에 미리 논의를 하자 그러는 거지?
여태까지 내가 아서한테 저지른 업보가 너무 많아서 짐작이 안 가!
얼마 전에 던전에 있을 때도 당당하게 참교육을 하겠다고 선언한 게 이 녀석인데 거기에 불까지 지펴놨으니!
“식사를 먼저 하겠다면 내 기꺼이 기다려 주겠다만.”
‘왕자님 같으면 이 상황에 밥이 들어가겠어요?!’
“불쌍왕자님은 공감능력이 없으신가요? 큰 일이 있을거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입맛이 있을 것 같아요? 아아. 제가 울상을 지은 채 밥을 먹는 걸 보고 싶으신 거군요? 푸훗. 정말 변~태시네요.”
“…먼저 이야기를 나누겠단 걸로 이해하겠다.”
입술을 꾹 깨무는 것으로 분노를 참아낸 아서는 나를 데리고 아카데미의 개인실로 향했다.
남들에게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건가. 점점 더 불안해지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대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몸을 뒤로 젖힌 채 어깨를 으쓱이는 아서를 본 순간 불안감이 한층 더 가중됐다.
보통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럴 때는 무조건 나쁜 이야기가 튀어 나오던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줄 테니 그 중 하나를 골라라. 그것이 그대가 수행할 벌칙이 될 것이야.”
이럴 줄 알았어!
나쁜 이야기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서 이 새끼 진짜 악질이네!
벌칙을 고르는 걸 보면서 즐기고, 벌칙을 수행하는 걸 보면서 또 즐기고, 투덜거리면 네가 선택한 벌칙이지 않으냐는 말을 할 생각인 거잖아!
내 분노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것일까. 아서가 손을 내저으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진정해라. 화를 내는 것은 내가 내미는 선택지를 보고 나서도 늦지 않을 터.”
그건… 그렇지.
아서가 내미는 선택지가 둘 다 양심적인 거라면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으니까.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의미에서 팔짱을 꼈더니 아서가 쓴웃음을 흘렸다.
“3왕자라도 왕자는 왕자이거늘.”
‘시끄럽고. 빨리 말이나 해줘요.’
“언제까지 말을 질질 끌 생각이신가요? 불쌍왕자님의 변태적인 취향에 맞춰주는 것도 슬슬 지칩니다만.”
“하하. 알겠다. 내가 제안하려는 것 중 하나는 내일 하루 동안 그대가 내 시녀가 되는 것이다.”
‘…네?’
“…뭐요?”
“시녀의 복장을 입고 나를 공손히 모시면 된다. 나도 시녀가 해야 할 업무 이상의 무언가는 시키지 않을 테니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야.”
첫 번째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메이스를 본래 크기로 되돌리고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서가 반짝이는 메이스의 끝을 잘 볼 수 있도록.
“불쌍왕자님이 성욕에 휘둘리느라 한 가지를 잊고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벌칙은 하루뿐이랍니다?♡”
내일이 지나면 이 메이스 끝이 네 두개골을 부수고 뇌가 산소를 직접 마시게 해줄 수 있단 사실을 잊어버리면 곤란해.
협박을 할 의도를 잔뜩 담아 싱긋 웃으며 이야길 해주었더니 아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너.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 아니냐?! 생각해 보거라! 시녀 일을 시킨다 한들 내 그대가 하고 싶지 않아하는 걸 어찌 강제하겠는가!”
아서는 적당히 모양만 낼 생각이라고 변명했지만 난 그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제 프레이와 함께하며 패널티가 지닌 힘을 깨달은 나다.
메스가키 스킬조차 무시하고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내가 지닌 패널티인데 이 상황에서 시녀의 일을 하라고?! 네가 뭘 시킬지 모르는데!?
“알겠다! 바로 다음 것을 이야기해주마! 앞의 것이 마음에 안 들면 이걸 택하면 될 것 아니냐!”
말없이 웃으며 메이스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더니 얼굴이 창백해진 아서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두 번째는 이렇다! 몇 분이면 끝날 벌칙을 수행하는 대신 나에게 던전을 공략하는 법을 알려달라 할 생각이다!”
응?
‘뭐라고요?’
“불쌍왕자님.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목소리가 너무 역겨워서 무심코 무시해 버렸거든요.”
“그대가 던전을 공략하는 방식을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했다!”
…
아서 이 자식!
그런 거였으면 진작에 이야기를 했어야지!
뭐부터 알려줄까!
어디부터 알려줄까!
가르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과열될 지경이야!
그래. 일단은 던전에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기믹에 대해서부터.
“물론 그대가 지닌 지식을 빼앗기기 싫을 수도…”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요?!’
“불쌍왕자님? 헛소리 참 재밌게 하시네요.”
뉴비가 자진해서 들박을 해달라 그러는 데 어떤 썩은물이 그걸 거부하냐!
그런 건 썩은물이 아냐!
스스로를 썩은물이라 부를 자격조차 없어!
썩은물이라는 인종은 누가 가르쳐달라 그러면 논문을 싸들고 가서 상대방을 질리게 만드는 놈들이라고!
‘됐으니까! 그 짧은 벌칙이 뭔지나 이야기 해봐요!’
“더 이상 시간낭비 하기 싫으니까. 그냥 그 짧은 벌칙이 뭔지나 이야기하세요.”
야한 뉴비를 가르치는 데 대가가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시킬 건데!
말해봐!
꿀밤 때릴 거야?
무릎 꿇고 사과하라 그럴 거야?
아님 시녀복 입고 모에모에뀽이라도 해줄까?
“진심을 담은 사과를 받고 꿀밤을 때려 준 후에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만.”
‘별 거 아니네요!’
“푸하핳. 일부러 시키려는 게 그런 거에요? 불쌍왕자님은 정말 마음이 작은 분이시군요?”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말과 행동이 강제당할 때라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지만 지금은 다르지!
패널티에 의해 메스가키 스킬을 무시할 수 있는 나는 다른 사람한테 백번도 천 번도 고개를 숙여줄 수 있어! 그게 사회인이란 거니까!
“그럼 후자로 하겠나?”
‘네! 그렇게…’
“이렇게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 그러시니 안 해 줄 수가 없네요. 정말이지. 스스로가 불쌍하게 보인다는 걸 잘 활용하시는 게 대단하셔요.”
“…사죄를 해야 하는 사람치곤 너무 콧대가 높군.”
이 이상 질질 끌어봐야 짜증만 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쉰 아서는 지금 대충 하고 끝내자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서의 제안은 내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괜히 아서가 생각을 바꿀까봐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는 것보단 빨리 끝마치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서의 앞에 섰다.
으음.
그러니까.
패배를 인정하고. 평소의 무례를 사과한 후에. 꿀밤을 맞으면 되는 거지?
쉽다 쉬워!
빨리 벌칙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볼까?
그리 결심을 하고 의례적으로 사죄의 말을 내뱉으려던 그 순간 내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과를 하는 동안 당신은 ‘진심’을 담게 됩니다.]
진심을 담게 된다니?
허접 주신님?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서가 진심을 담은 사과를 바란다고 이야기한 건 알겠지만 그건 그냥 의례적인 수식어잖아요?
“무얼 고민하는가. 루시 알른. 별 거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빨리 해라. 그래야 꿀밤을 때릴 수 있지.”
아서가 자신의 주먹을 치켜든 채 날 재촉하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벌칙을 수행하지 않을 시에 주어질 패널티에 대한 것이 말이다.
알겠어! 알겠다고! 잘은 모르겟지만 일단 사과를 하면 되잖아!
가만 생각을 해보니까 사과할 게 한 둘이 아니네. 여태까지 쌓아둔 잘못이 너무 많아.
“평소에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해요.”
왕위와 거리가 멀다 해도 아서는 분명 왕가의 피를 이은 존재다.
그가 여러 무례를 넘겨주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라면 감히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지금의 난 전적으로 그의 배려에 기대고 있는 셈이니 이건 분명 사과를 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자주 도와주시는데 고맙다는 말을 못해서 죄송해요.”
비록 첫 만남은 좋지 못했지만 그 후로 아서는 내가 곤란해질 때면 항상 나를 도와주러 왔다.
파트란 축제 때도. 2왕자와 다투게 되었을 때도. 얼마 전에 스피드런을 했을 때도.
그 도움에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난 고맙단 말을 하지 못했다.
설령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할지언정 이게 사과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자꾸 허접이라 그래서 죄송해요.”
내가 시킨 고된 훈련을 따라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아서는 허접이 아니다.
검과 마법 양 쪽을 수련하면서도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 그는 분명 천재라 불러 마땅한 존재다.
그런 그의 노력을 인정해주긴커녕 허접하다느니 뭐니하는 소리밖에 하질 않았으니.
이것도 분명한 나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흑. 불쌍하다는 말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걸 가지고 놀려서 죄송해요.”
아서가 불쌍하다는 말에 대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지 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모니터 바깥에서 그의 심정을 눈에 담았던 내가 어찌 그를 모를 수 있겠는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방치되다시피한 아서의 상처를 파고드는 것이 불쌍하다는 말일 지어니.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버리지만 분명 내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아서의 마음속엔 안 좋은 것이 쌓였으리라.
“흑. 그리고. 훌쩍. 또.”
미안한 것들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여태까지 했던 것들만 생각해보면 이만한 썅년이 없다 싶어서.
메스가키 스킬의 핑계를 대며 죄를 반복하다 보니 상대가 받을 상처에 무덤덤해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돼서.
그리고 그게 또 미안해서.
“흐윽. 흑.”
젠장. 진심을 담게 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한 번 감정에 매몰되니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던 중 문이 벌컥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3왕자님! 영애를 데려가셨단 이야기를…”
“아서 왕자님. 아무리 내기를 걸었다 하더라도…”
조이랑 페이비인가.
하필이면 오해하기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네.
빨리 해명을 해야 하는데 자꾸 울음이 새어 나와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어.
젠장. 이거 패널티 언제 끝나는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3왕… 아니. 아서?”
“아니다! 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오해다!”
“뭐가 오해라는 건지 찬찬히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왕자 저하? 신의 뜻에 따라 제가 판결을 내려드리겠습니다.”
“성녀님?! 아니! 잠시 진정을 하시고 제 이야기를!”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억울함을 담은 아서의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모든 과정을 가만 지켜보던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평소에 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진짜 무섭구나.
…앞으로 좀 적당히 깐족거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