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3
페이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놀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이른 아침에 나와 여러 성직자분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그 후에는 성경과 신성마법의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여기저기 지역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돌아다니고.
저녁이 되어서는 고해성사를 받거나 또 다시 공부를 하고.
모든 일정이 끝나면 잠들기 전까지 다음 날에 드릴 기도를 위한 준비를 하는 일상.
휴식이라는 단어가 빠진 쳇바퀴는 어린 아이에게 가혹한 것이었지만 페이비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무게라 생각하고 버텼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자신을 선택했으니 그 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허나.
허나.
과거의 페이비를 지탱하던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너무도 힘들어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던 밤에 떠올렸던 고아원의 추억은 존재치 아니했다.
페이비가 그리워했던 고아원은 피와 비명이 난무하던 곳이었으니.
그녀가 따스하다 믿었던 정경은 사실 차디찬 냉소와 싸늘해진 시체, 메말라버린 눈물만이 존재하는 지옥이었다.
페이비가 짊어졌던 성녀의 직함 또한 거짓이었다.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그 누구도 성녀로 간택한 적이 없었다.
성녀라는 직함은 부패한 교회의 사람들이 써먹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존재였으니.
그녀가 견디던 그 모든 무게는 주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고서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페이비는 여전히 진실을 떠올릴 때마다 헛웃음을 흘렸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쉽게 만들어질 수 있고,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쉽게 부정될 수 있다니.
올곧은 마음을 지닌 페이비라 할지언정 자신의 삶이 누군가 만들어낸 촌극에 불과했단 사실을 간단히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그 때 저를 지탱해 줄 분이 존재치 아니했더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애님이 아니었더라면.
위대하신 주신의 사랑을 받는 그 분이 없었었더라면.
겉으로는 날을 세우고 있지만 그 속에는 태양과 같은 따스함을 품은, 자그마한 육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의지를 지닌 주신의 사도께서 옆에 있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처럼 웃을 수 있었을까요?
“푸하하하! 얼빵 영애 진짜 바보네! 이걸 틀린다고?”
“억울해요! 글자 하나만 바꿔서 함정을 파다니!”
“그래~ 억울하긴 하겠다~ 얼빵영애도 얼빵하고 싶어서 얼빵한 건 아닐 텐데 말야~”
“으으! 으으으으!”
웃음을 참을 생각이 없는 루시와 두 손을 꼭 쥔 채 분노를 표하는 조이를 바라보던 페이비는 이내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서 무얼 하겠어요. 그보단 지금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죠.
“조이. 그게 정말 맞다고 생각하세요?”
“맞…지 않나요? 페이비?”
“페이비. 얼빵이한테 힌트를 주면 곤란해. 얼빵이는 얼빵할 때 제일 귀엽단 말야.”
“귀엽… 아니! 영애! 최소한 뒤에 영애라는 단어는 좀 붙여주세요! 그게 아니면 페이비처럼 이름으로 불러주시던가요!”
“내 점수를 넘으면 고민해볼게. 물론 얼빵한 얼빵이가 날 이길 수 있을린 없지만.”
“흐아앙! 진짜아아!”
평소 강조하던 공작영애다움도 잊은 채 억울함을 토하는 조이의 모습에 페이비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친구와 함께 논다는 거. 정말 즐거운 일이네요.
영애님께서 절 끌고 나와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그 뿐일까요. 방에 틀어박혀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도를 하다 점점 커져만 가는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을 거에요.
오늘 새벽.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난 페이비는 자꾸만 차오르는 불안에 입술을 곱씹었다.
오늘 듣게 될 잔혹한 진실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부족한 자신을 지켜 달라 몇 번이나 기도를 올렸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에 페이비는 루시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닌 따스한 신성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 불안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고 무작정 발을 움직였다.
허나 페이비는 루시의 방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방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떠올리지 못 했던 여러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으니까.
해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시간에 방문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잠을 깨우면 불쾌해하시지 않을까?
혹여 씻고 계시거나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방해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걱정의 꼬리를 물고 이어짐에 따라 페이비는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런 페이비의 고민을 어떻게 눈치 챈 건지는 몰라도 루시는 자신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와 페이비를 환영해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고귀한 모습과 함께.
영애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당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제 마음에 깃들어있던 불안이 날아가버렸다는 것을.
또한 영애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당신께서 먼저 제 소망을 물어보셨을 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이 부족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마 이것도 모르실 겁니다.
바라는 게 이것 뿐이라면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저를 데리고 세상에 나왔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신의 평판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며 잠이 덜 깬 조이를 무작정 찾아갔을 때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당신과 조이와 함께 놀면서, 생애 처음으로 친구들과 놀이다운 놀이를 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제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신 것이냐 묻는다면 영애님께서는 분명 부정을 하시겠지요.
당신께선 남에게 베푸는 데는 익숙해도 베품을 받는 데엔 서투르시니까.
그러니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의 일을 마음에 품고.
당신의 옆에 서는 데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어.
당신께 보답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영애! 두고 봐요! 다음번에는 제가 이길 테니까!”
“오늘 하~루 종일 지기만 했는데 다음이라고 해서 다를까? 얼빵이가 얼빵이인한 불가능할 것 같은데?”
“지. 지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페이비는 몇 번 이겼거든요?!”
“그치만 조이. 그런다고 영애께 패배하기만 했단 사실이 바뀌진 않는답니다.”
“그건 페이비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헤에~ 얼빵이는 오늘 처음 보드 게임을 해 본 사람한테 이기고 기뻐하는 치졸한 사람이었구나? 정말 귀족답네~”
“이익! 이이익! 왜 아무도 제 편을 들어 주시지 않는 건가요옷!”
노을처럼 얼굴이 시뻘개진 조이가 두고보자면서 도망치듯 떠나가 버린 후. 조이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루시가 페이비 쪽으로 고갤 돌렸다.
“페이비.”
“네. 영애님.”
“마음의 준비는 됐어? 나는 지방은 잔뜩 있는 주제에 소심한 페이비가 방에 틀어박힐까봐 걱정이 돼.”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제 옆에 영애님께서 있어주신다면 전 웃을 수 있을 테니까요.
“허접주제에 허세부리긴.”
루시가 페이비를 데리고 향한 것은 아카데미 거리에 있는 어느 식당이었다.
가게의 종업원은 루시를 보자마자 기계적인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고 마침 빈 곳이 있다며 두 사람을 2층의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오셨습니까. 두 분.”
“아. 드디어 왔네. 빨리 와서 앉아. 할 이야기가 산더미야.”
그 곳에는 주신 교회의 주교인 요한과 루시의 정보원인 카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종업원이 문을 닫고 나간 후 몇 가지 마법을 펼친 카리아는 턱을 괸 채 페이비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 성녀님께선 어디까지 알고 있어?”
“…전.”
“아. 괜찮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듣고만 있어. 교회의 부패? 대충 아는구나? 자기가 거짓된 성녀라는 건? 오. 이것도 알아? 스스로의 참혹한 과거는? 이야. 이것도 아는구나? 대단하네.”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쏘아 붙이듯 이어나가는 말 속에서 페이비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능글맞은 눈빛. 가시 같은 목소리. 미묘한 어투. 장난스러운 손짓.
따로 떼어내고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니 정치적 수사에 익숙한 페이비마저도 부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적당히 해. 아줌마. 자기보다 젊고 예쁘다고 질투하는 거 엄청 추해.”
“딱히 질투한 건 아닌데. 뭐. 어쨌든 미안해. 성녀님. 험하게 살다보니 사람을 재는 게 버릇이 돼서.”
“아뇨. 괜찮습니다. 별 일도 아니었는걸요.”
“흐응. 그래?”
카리아는 무언갈 가늠하듯 페이비의 얼굴을 위 아래로 살피고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늘 내가 성녀님께 말해줄 것들은 성녀님께서 알고 계시는 걸 재확인시켜 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 거야. 그 이상은 아직 조사가 부족하기도 하고, 좀 민감한 사안들이 많거든.”
페이비는 민감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어렵잖게 이해했다.
부패한 교회의 사람들에 대한 걸 말씀하시는 거겠죠.
누가 부패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리 태연한 체를 해도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 그 부분을 경계하시는 거에요.
“이해해주십시오. 성녀님. 때가 되면 반드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요한의 딱딱한 목소리를 들은 페이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직 저는 가진 것보다 부족한 부분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니까.
“성녀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어?”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려. 당신이 시작된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제가 시작된 곳이라면.
설마.
예상치 못했던 말에 놀란 페이비는 다급히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루시는 페이비의 눈짓을 보곤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정말.
정말 그 고아원을 찾아냈단 말인가요?
그 지옥 같은 장소를?
눈을 끔뻑이며 가만 수정구를 바라보던 페이비는 자신의 옆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을 느끼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요.
영애님께서 옆에 계시는 데 무엇이 문제겠어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걸 지금 볼 뿐이에요.
괜찮아요. 페이비.
분명 괜찮을거에요.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페이비가 수정구 위에 손을 올린 순간 그녀의 시야가 뒤집혔다.
순간이동의 여파 속에서 페이비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한 들판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페이비는 달빛조차 받지 못할 만큼 외진 곳에 세워진 건물을 눈에 담았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말끔하게 관리되어 있지만 정작 그 안은 텅 비어 있는.
페이비의 기억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고아원의 건물을.
털썩. 다리의 힘이 풀린 페이비는 풀바닥에 주저 앉아 멍하니 건물을 살폈다.
친구들과 함께 놀았다고 생각했던, 실제로는 시체를 묻을 때 말고는 사용한 적이 없던 공터.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은 없다 생각했으나 사실은 빵 한 조각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식당.
친구들과 숨죽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하지만 본래는 작은 소리라도 내면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기에 숨소리마저 내기 두려웠던 침실.
성가가 울려퍼졌다 여겼지만 아이들의 비명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기도실.
거짓된 추억과 진실된 악몽을 동시에 떠올리던 페이비는 자신의 양쪽 귀에 번갈아가며 들리는 웃음소리와 비명소리를 듣다가 바닥에 속을 게워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 할테니까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발! 제… 꺄아아악!’
‘죽기 싫어. 난 죽고 싶지 않아.’
‘아냐. 기도실은 안 돼. 나 기도하기 싫어. 나는 신 같은 거’
‘왜 너만 안 아픈 거야!? 왜 너만…’
“페이비.”
귓가로 스며드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페이비는 자신을 감싸는 따스함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
보석처럼 선명한 눈동자.
여느 때처럼 믿음직스러운 웃음과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래 보이는 어깨.
달을 등진 루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페이비는 자신의 악몽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두 다리로 일어서는 법도 잊은 거야? 아님 살이 너무 쪄서 일어설 수도 없게 됐다던가?”
“…후후. 아뇨. 설마 그럴리가요.”
바닥을 짚고서 다시금 몸을 일으킨 페이비는 자신의 목에 걸린 십자가에 기도를 올렸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부디 이 부족한 사람에게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주소서.
가혹한 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