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희 연구소 안뜰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납 인형이 갑자기 빛을 뿜어내고 입을 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 귀에는 연금술사들이 쓰는 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군.”
“오브젝트들은 언어를 배운 것일까? 아니면 저 ‘연금술사의 언어’가 특별한 것일까?”
제임스는 상당히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납 인형이 말했어!”
예린이는 감격한 표정을 하더니,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예린이의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아무리 예린이라도 말을 해주진 않을 거야.
그리고 폐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그러고 보니 저 납 인형… 어떻게 말한 거지?
“김중뢰 선임 연구원. 우선, CCTV 확보부터 하죠. 보안실에서 제대로 보존을 안 할지도 몰라요.”
서아는 김중뢰에게 안뜰을 촬영하는 CCTV를 당장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하긴 세희 연구소 보안실은 컵라면 먹다가 영상을 모두 지워버려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고.
CCTV를 확보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나를 꼭 껴안고는 내 입술을 잡고 움직이려고 하는 등.
그렇게 안뜰에 모인 사람들은 납 인형의 이상 현상에 각자의 방법으로 반응했다.
그때, 납 인형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 염원은 이루어졌어?]
나보다 10배는 무표정하고 졸려 보이는 납 인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가?
하긴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힘의 흐름은 느끼지 못했으니까.
다른 미니 사신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지만, 시선을 내려보니 검은 사신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은 사신 하나를 손아귀에 쥐고 머리를 통통 두들기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어?’
그러자 검은 사신은 머리를 위아래로 마구 끄덕였다.
‘엄마 아니야!’
‘?’
내가 여전히 이해 못 하는 표정이자, 검은 사신은 조금 답답한 표정으로 의지를 내뿜었다.
‘엄마 아니라서 그래!’
‘….’
음.
확실히 알았다.
미니 사신으로부터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복잡한 종류의 문제인가 보네.
해맑은 검은 사신을 바닥에 내려두고 납 인형 쪽을 바라보자, 예린이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 보였다.
물론 실험보다는 애완동물과 놀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자, 오른손!”
예린이가 손을 내밀며 ‘오른손!’이라고 하자, 납 인형은 조그마한 오른손을 예린이의 손바닥 위에 툭 올려두었다.
납 인형은 그 밖에도 왼손이나, 왼쪽 뺨 혹은 오른쪽 뺨을 올려놓으라는 명령에도 곧잘 따랐다.
“잘했어!”
그 모습에 예린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납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나는 그 모습이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 짜증이 나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서아와 제임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납 인형’ 오브젝트는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주요 행동 원리로 보입니다.”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린이와 납 인형 쪽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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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예린’ 연구원의 지시만 듣는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제임스는 그럼 간단한 실험을 해보자고 말하더니, 납 인형 쪽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오른손을 넘겨줄 수 있겠나?”
그러자 납 인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손을 제임스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앗!”
그 모습을 본 예린이는 조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히히.
***
세희 연구소 연구원 사무실.
오예린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보고서 작성을 준비했다.
‘사신이랑 놀아야 하는 시간인데!’
이번에 발각된 납 인형 관련 보고서와 이제까지 미뤄두었던 수많은 업무가 돌아온 것이었다.
예린은 자리의 컴퓨터를 켜고, 따뜻한 홍차를 한잔 준비했다.
그리고 우유나 설탕 대신에, 조그마한 하얀 아귀 한 마리를 홍차 속에 집어넣었다.
뀨히히.
그러자 찻잔 속을 헤엄쳐 다니는 하얀 아귀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에 작게 울렸다.
예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예린은 홍차를 먹을 때는 매번 이렇게 초미니 사이즈의 아귀를 찻잔 속에 넣곤 했다.
딱히 아귀를 먹지 않아도, 아귀가 뜨거운 찻물 속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적당하게 달콤해졌으니까.
미니 아귀는 헤엄쳐서 좋고, 예린은 달콤한 홍차를 먹을 수 있어서 좋은 윈윈 관계였다.
타닥. 타다닥.
그렇게 사무실에 자리 잡고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더니, 시야 구석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의 검은 사신이 뚜방뚜방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아, 이번에 사신이가 새로 데려온 검은 사신이네?’
예린은 모든 검은 사신의 얼굴과 특징을 기억해 두고 있었으니까, 금세 새로운 아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
검은 사신은 빈자리가 많은 세희 연구소 사무실에서 사람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예린이 보기에 저번 검은 사신과 달리 사람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놀라서 마우스 뒤에 숨거나, 몰래 빼꼼히 사람들을 신기한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린은 조심조심 다가가서, 검은 사신의 머리를 살짝 두들겼다.
통통.
그러자 검은 사신은 예린을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엄마 애착 인간!’
“나도 반가워.”
예린은 해맑게 웃는 검은 사신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검은 사신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로 올렸다.
그리고 검은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 예린은 해야 할 일은 모두 잊고, 검은 사신과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앗!’
‘히힛. 간지러.’
검은 사신의 머리를 툭툭 밀어서 쓰러트리거나 옆구리를 간지럽히다가, 쿠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과자 먹자!”
예린이의 사무실 책상 서랍 두 칸을 가득 채운 ‘미니 사신 접대용 과자’ 중 하나였다.
옴뇸뇸.
검은 사신은 쿠키 같은 것을 별로 먹어본 적이 없는지, 쿠키를 품에 안겨주니 정신없이 쿠키를 파먹기 시작했다.
예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검은 사신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돈해 주었다.
자기보다 훨씬 큰 쿠키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운 검은 사신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앗!’ 하고 놀랐다.
‘혼자 먹어버렸어!’
그리고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예린을 올려다보았다.
“푸딩도 먹을래?”
예린은 그렇게 말하며 후후 웃었다.
하지만 검은 사신은 푸딩이 뭔지 모르는 건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내 책상 위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어. 푸딩 가져올게!”
예린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검은 사신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예린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배웅해 주었다.
‘….’
그리고 예린이 휴게실 냉장고에서 ‘회색 사신 푸딩’을 가지고 돌아오자, 검은 사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과자가 잔뜩 들어있는 서랍 속에도 없었다.
미니 사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슬라임 속에도 없었다.
“어디 갔지?”
그때 조그마한 울음소리가 예린의 귀에 들어왔다.
뀨힝힝.
홍차용 미니 아귀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아, 여기 있었구나.”
사라졌던 검은 사신은 예린이의 찻잔 속에서 하얀 아귀를 물고 있었다.
뀨힝힝.
***
서울 중부경찰서의 형사과.
늦은 밤, 어두운 방 안에 남자의 책상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파일 하나가 들려 있었고, 눈은 그 안의 내용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파일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사람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모두 같았다.
생기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동자.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이라고 했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순간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그가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입에서 나오자, 마치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 모습이 마치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직도 일하고 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선배가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이상하게 자꾸 신경 쓰여서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책상 옆에 앉았다.
“그래도 그냥 놔줘.”
선배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거 분명 ‘오브젝트’ 관련이니까.”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협의회로 넘어가기 전에 최대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혹시 우리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선배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성격에 그러겠지. 그럼 조심해서 해.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고.”
그렇게 말한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한번 남자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내일 보자.”
선배가 떠난 후, 사무실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펜을 들어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인지 능력을 상실하기 몇 주 전부터 이상 행동을 보임.’
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피해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모두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눈에 깃든 공허함은 똑같았다.
‘피해자의 공통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남녀노소와 직업 등을 가리지 않음.’
‘공통점이라고 해봤자, 정력적으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뿐이다.’
남자는 이 문장을 쓰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뚜렷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의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그는 다시 파일을 넘기며 피해자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폈다.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는 밤늦도록 사무실에 남아 수사를 이어갔다.
창밖으로 어둠이 깊어져 갈수록, 그의 마음속 의문도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