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5
태양의 대지의 아래에 숨고 달이 그 자리를 대체한 시각.
고아원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던 카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고용주님의 말이 옳았네.
교회의 쓰레기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는 별개로 성녀님께는 충분히 성녀라 불릴 만한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치만 있잖아.
저 두 사람 지난번 일을 까먹은 거 아냐?
기적을 일으켰다가 교회의 심문관한테 추궁당할 뻔 했으면서 이렇게 크게 일을 저지르다니.
내가 미리 대비를 안 해뒀으면 어쩔 뻔 했어.
“알새틴.”
“저 두 분이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진을 펼쳐 뒀습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은 저희들만의 백일몽이 될 테죠.”
어깨를 으쓱이는 제자의 모습에 카리아가 눈을 좁혔다.
“…넌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어?”
“스승님도 마찬가지시지 않습니까. 이걸 준비하라 그런 게 누구신데요.”
“쯧. 예전에는 좀 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말야.”
카리아는 혀를 차면서도 알새틴의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비꼬고 힐난하기는 해도 없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 루시가 페이비를 진짜 성녀라 여기고 있지 않던가.
루시의 확고한 믿음을 본 카리아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하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아가 이 일을 밀어 붙인 것은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루시가 교회와 대적하게 되었을 때에도 페이비가 루시의 곁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말이다.
현재의 교회가 과거의 경건함을 잃어버린 게 확실시 된 이상 주신의 사랑을 받는 루시는 머잖아 교회의 반대편에 서게 되겠지.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페이비가 루시의 곁을 떠난다면 루시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카리아가 아는 루시는 강하면서도 여린 아이니까.
이를 걱정했던 카리아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루시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일을 강행했다.
“스승님. 후회하십니까?”
“내가?”
“예. 영애께서 투덜거리실 게 분명하잖습니까.”
“그게 뭐 어때서.”
과거 왕국의 그림자로 일하던 시절부터 카리아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움직였다.
그녀를 신임하던 국왕이 제발 적당히 하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카리아에게 루시의 투덜거림 정도야 애교에 불과했다.
“영애께서 스승님이 많이 걱정하신다는 걸 알아주셔야 할 텐데요.”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러가.”
“하하. 예. 알겠습니다. 스승님.”
알새틴이 현장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떠나간 후. 카리아는 기도 중인 요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교님.”
“예.”
“…울어?”
“크흡. 죄송합니다. 저 광경을 봄으로써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알게 되었는지라.”
찔러도 피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노인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는 모습에 카리아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 인간이 노망이 들었나?
…하긴 그래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기는 하지.
“카리아.”
“…응. 응?”
협력자가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생각하던 카리아는 요한의 말을 듣고 애써 대답을 했다.
“당신은 아실 겁니다. 주신의 신성이 선악을 가리지 않고 깃든다는 것을.”
“알지. 예전에 그거 조사하고 나서 많이 놀랐으니까.”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신성이라는 것은 선인에게만 깃들지 않는다.
대지에 퍼져 있는 신성은 개인의 선과 악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그 사람이 얼마나 간절히 신성을 바라는 지에만 관심을 가진다.
부패한 교회의 사람들이 멀쩡히 신성마법을 펼칠 수 있는 까닭도 이것이다.
신성은 한 인간의 배경을 신경 쓰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히 베풀어지니까.
본래라면 성직자가 될 수 없어야 할 쓰레기들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고위층을 조사하던 카리아는 먼 옛날 이 정보를 입수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다.
신성이라는 것은 하늘에 계신 위대한 주신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시는 것일 지언데 어찌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예전의 카리아는 이것이 함정이라 판단하고 다른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 정보들을 카리아가 입수한 정보에 설득력을 덧붙일 뿐 그 정보를 부정하지 않았으니.
결국 카리아는 자신이 최초에 입수한 정보가 옳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 후 교회 고위층 사이에선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졌습니다.”
주신께서는 어찌하여 악인에게까지 자신의 신성을 부여하시는가.
교회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이 현상 앞에서 많은 성직자들은 저 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주류가 되는 의견은 성경의 교리처럼 주신께서 인간을 평등히 대할 뿐이란 의견이었지만 이외에도 여러 의견들이 존재했다.
악인을 신성으로 품어 회개시키려 함이라는 의견부터 시작해 주신께서 이 대지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다는 극단론까지.
성직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교회 내 주류 의견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의 무관심처럼 비쳤으니까요.”
주신께서 선과 악을 신경 쓰지 않고 평등히 대하신다면 굳이 선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훗날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지금 당장 저질러지는 악행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데 훗날의 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평등이 아닌 무관심이다.
주신께서 진정으로 선하신 분이라면 그래선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과거 주신의 말씀을 들었던 저는 나름대로 이 현상을 해석하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더군요.”
신의 말씀을 믿고 항시 경건하려 노력했던 요한이지만 그의 마음속엔 언제나 자그마한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들었던 모든 것은 환청이고 사실 주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그마한 빈틈 사이로 자신의 의심이 드러나는 것을 요한은 두려워했으니까.
“허나 여태까지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생겨났죠.”
루시 알른.
알른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목이 날아갔으리란 소리를 듣던 불경한 아이.
지금은 주신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시고 여전히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증명하는 위대한 존재.
요한은 그녀가 펼치는 기적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희망을 품었다.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지금 제 눈 앞에서 또 하나의 예외가 생겨났군요.”
인간의 악행 속에서 만들어진 자.
존재 자체로 주신을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그 믿음만큼은 주신 교회의 그 누구보다도 굳건할 경건할 터이나 주신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 여겼던 불쌍한 아이.
주신께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카리아.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네. 주교님.”
“그 세상에 이 늙은이가 있을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바뀌어가는 세상 속에서 이 늙은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죠.”
요한은 서서히 사그러들어가는 신성을 보면서 얼굴을 가다듬었다.
“최소한 이 목숨이 다해 주신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워서는 안 될 일이니.”
*
따스함으로 물든 지하실의 한 가운데에서 페이비는 점차 자신의 안에 열기가 깃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평소에 품은 신성과는 다른, 그 자체로 온기를 지닌 기운을 말이다.
페이비는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루시가 지닌 신성이 이와 비슷했으니까.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이 불경할 수밖에 없는 아이가 당신께 전하는 기도를 듣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전 당신께 꼭 전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모욕이 되는 이 아이가 오래 전부터 품어온 말이 있습니다.
과거를 떠올린 후 언제나 당신께 전하려던 말이 있습니다.
이 불경한 아이는 당신의 전지를 믿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더라면 저희들의 비명을 못 들었을 리 없으니까요.
이 불경한 아이는 당신의 전능 또한 믿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바라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면 무수히 많은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지만은 않으셨을 테니까.
허나 전 당신의 선함만큼은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을 물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큼은 믿습니다.
무수한 절망을 눈에 담은 순간 분명 슬퍼하시리라는 것만큼은 믿습니다.
당신의 사도가 당신의 뜻을 펼쳐 보였기에.
하나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보였기에.
이 부족하고도 불경한 이를 언제나 위로해 주었기에.
당신의 뜻이 당신의 사도와 다르지 않을 것임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내려주소서.
당신의 뜻을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부족함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주소서.
그럼으로써 선함이 이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게 하소서.
이 곳에서 스러져 간 슬픔이 다른 곳에서 더 만들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존재가 망설임이 되어 회개의 마음을 품게 만드소서.
이 불경할 수밖에 없는 아이의 부탁에 침묵하셔도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믿음에 보답해주시지 않으셔도 전 제가 믿는 선을 따를 테니까요.
당신의 보살핌이 없어도 이 세상에 선을 전하려 노력할 테니까요.
지금 당신의 사도가 그러하듯. 과거 당신의 용사가 그러했듯. 저도 저의 신념을 지킬 테니까요.
만일 끝까지 침묵하려 하신다면.
그저 지켜봐 주소서.
선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외면하지 마소서.
– 미안해.
페이비가 마음에 담았던 모든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의 귓가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목소리가 스몄다.
그것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여자의 것임과 동시에 남자의 것이었으며. 엄격함과 부드러움을 한 번에 품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주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페이비지만 그 정체 모를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는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신했다.
이는 분명 주신의 목소리였다.
– 정말 미안해.
그녀와 믿어왔으며 믿으려 노력하는 그 목소리가 사죄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페이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머릿속에 쏟아지는 수많은 말을 가만 바라보다가.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찾아냈다.
…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당신께서 이 불경할 수밖에 없는 아이를 용서하셨으니. 저도 당신의 죄를 용서하겠습니다.
허나 이 용서가 저만의 것이라는 사실은 기억하소서.
당신을 용서치 못할 영혼이 이 세상에 가득 하리라는 사실 또한.
– …응. 모두 기억할게.
그 대답이 끝이었다.
귓가에 스미던 봄날의 바람 같던 목소리는 자신의 뜻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모든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뜬 페이비는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보고 웃으려했지만 눈가에서 새어나오는 울음 탓에 그러지 못했다.
“영…영애님.”
“왜? 울보 페이비?”
“저를 안아주시겠어요?”
페이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시의 두 팔이 그녀의 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저. 그리고. 위로해주세요.”
“다른 건?”
“여태까지 잘했다고 칭찬해주세요.”
“푸하핳. 응. 이제야 가식쟁이 페이비가 좀 솔직해졌네.”
페이비는 자신의 등을 쓸어내리는 루시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의 품 안에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결코 울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