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 구석에 새로 생긴 격리실은 예상 밖의 광경으로 가득했다.
방 안은 미니 사신들의 놀이터로 변해있었다.
침대 위에서는 황금빛 사신들이 부드러운 이불을 풍선처럼 부풀려 트램펄린 삼아 뛰어놀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맞은편의 탁자는 온갖 종류의 과자로 가득했다.
그 위로 검은 사신들이 모여들어 해맑은 표정으로 과자를 야금야금 뜯어 먹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납 인형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미니 사신들과 하얀 아귀들이 모여들었다.
납 인형의 무릎 위에서는 작은 황금 사신 하나가 폴짝폴짝 뛰며 납 인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쓰다듬어 줘!’
그러자 납 인형은 황금 사신이 바란 것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격리실 외부에서 구경하며, 서아는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제목은 <납 인형 염원 위험도 측정>이었다.
보고서 안에는 납 인형이 반응하는 종류의 염원과 그 실현에 따른 위험성 테스트의 결과가 실려있었다.
보고서를 끝까지 확인한 서아는 그 보고서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위험해 보이진 않네요.”
“그렇다면!”
예린은 서아의 말을 가로채듯이 기뻐했지만, 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예린 연구원이 말한 것처럼 연구소 외부에 둘 순 없죠.”
“히잉.”
그리고 그 뒤편에는 제임스와 문신투성이 연금술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인형의 말이 ‘그 염원은 이루어졌다.’라는 의미였나? 아무리 봐도 그 ‘왕국어’라는 것은 상당히 난해하군.”
“그야 이 언어는 배우는 게 아니라 깨닫는 쪽에 가까운 언어니까. 오히려 조금이라도 해석한 쪽이 이상해.”
대화하던 제임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 격리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근처에서 내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다.
“외양은 회색 사신과 흡사하나, 그 행태는 판이하군. 모든 부탁을 들어주는 자애로운 오브젝트라니….”
그러자 문신투성이 여자가 제임스 곁으로 다가와서 정말 아쉬운 것처럼 중얼거렸다.
“회색 사신이 만약 저런 오브젝트였다면, 정말 많은 일들이 가능할 텐데…. 정말 아쉬워. 어쩌면 연금술로 세계에서 모든 오브젝트를 치워낼 수 있을지도 몰라.”
연금술사는 저번에 검을 제작해 주면서 회색 사신의 에너지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껴서 그런지, 회색 사신으로 하는 실험이나 연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글쎄….”
제임스는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좋은 미래가 올 것 같진 않아.”
제임스는 하얀 아귀의 부탁을 듣고, 황금 사신에게 ‘때찌’를 하는 납 인형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미니 사신 정원 얕은 곳, 안뜰과 이어진 마시멜로 평원.
나는 그곳에 누워서 안뜰과 선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TV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최근 서울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지 능력 상실’ 사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3개월간 20여 건의 유사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갑자기 인지 능력을 상실하고, 주변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피해자들의 눈빛이 생기를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 목격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직업 등에 특별한 공통점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에서는 아직 오브젝트 관련 사건인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내 직감으로는 오브젝트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확인을 위해서, 내 뺨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황금 사신에게 의지를 뿜어냈다.
‘저거 사악한 오브젝트가 한 짓이래.’
하지만 황금 사신은 TV를 전혀 안 보고 내 얼굴만 보고 있어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예전부터 황금 사신들은 TV에 관심도 없으면서, TV를 보는 내 주변에 모여들곤 했지….
내 과자를 뺏어 먹으려고 그러는 건가?
내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자, 황금 사신은 몹시 화난 표정으로 양 주먹을 꼭 쥐고 들어 올렸다.
‘나쁜 오브젝트!’
그리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이제 기다리면 황금 사신들이 알아서 다 해결하겠지?
히히.
그렇게 히히 웃으며 어디론가 길을 나서는 황금 사신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나지막한 의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절대로 난 포기하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요즘 미니 사신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연극, <푸른 사신과 끝의 탑.>이 공연 중이었다.
원래도 꽤 인기 있는 공연이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을 만들어서 미니 사신들에게 더욱 호평받고 있었다.
‘대단해!’
공연장 주변을 보면 미니 사신들이 빼곡히 모여서, 응원하듯이 관람 중이었다.
특히 푸른 사신들은 미니 사신들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서 눈을 반짝이며 관람 중이었다.
<용감해!>
<멋있어!>
가끔 물로 만든 문자열로 문구를 조그맣게 띄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원래는 다수의 인형 옷을 조종하는 노란 사신 혼자서 하는 1인극이었지만, 개정판은 노란 사신 말고도 다른 사신들도 배우로 등장하곤 했다.
[닿았어. 내 마법이….]
시선을 돌려보면, 심각한 표정으로 열연하는 푸른 아이돌 사신이 보였다.
다른 푸른 사신은 절대로 못 할 것 같은데, 저 아이는 오히려 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리를 모두 불태워 주세요!]
뀨힝힝.
연기를 하는 푸른 아이돌 사신이 언령을 만들자, 상대역인 하얀 아귀의 팔다리가 모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저 하얀 아귀는 실제로 푸른 아이돌 사신과 싸웠던 그 하얀 아귀가 부활한 녀석이었다.
집사 아귀처럼 이족보행에 하얀 넥타이를 맨 하얀 아귀.
매번 공연할 때마다 불타고 찢어지고 얼어붙고 있었지만, 자기 업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온몸에 불이 붙어서 발버둥 치는 하얀 아귀를 보며, 공연장에 잔뜩 놓인 팝콘을 천천히 먹었다.
히히.
***
미니 사신 정원에서 나와 세희 연구소로 들어선 분홍 소녀는 어지러운 것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잔뜩!’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할아버지 말고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소녀에게, 세희 연구소는 너무 사람이 많았다.
그야말로 대혼란!
소녀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굳었고, 눈동자는 쉬지 않고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보안을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이 소녀를 인도했는데도 그랬다.
그런 모습을 보며 푸른 아이돌 사신은 분홍 소녀의 뺨을 토닥이며 의지를 전달했다.
[괜찮을 거야. 안심해.]
푸른 아이돌 사신의 의지에 닿자, 분홍 소녀는 조금 심장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분홍 소녀는 작게 웃으며, 푸른 아이돌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철컥.
그렇게 분홍 소녀가 도착한 방은 세희 연구소 구석에 마련된 작은 회의실이었다.
“안녕.”
그 회의실 안에는 약간 사나운 인상의 문신투성이 여자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익숙한 언어.
분홍 소녀 입장에서 생소한 말소리로 가득한 이 세희 연구소에서, 갑자기 들려온 ‘왕국어’를 듣자 굉장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후아.
분홍 소녀의 입에선 마치 숨을 참았던 것처럼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문신투성이 여자가 분홍 소녀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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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기본적인 것부터 물어볼게.”
그렇게 문신투성이 여자는 분홍 소녀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끝의 탑에서 있었던 일과 그 결말.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까지.
***
연금술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굵직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놓았다.
제임스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특이 사항이라도 있었나?”
“몇 가지 있었지.”
연금술사는 그렇게 대답하며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아. 그 소녀랑 나랑 거의 몇백 년의 간격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제임스는 그 말을 듣고 작게 ‘흠’ 소리만 낼 뿐이었다.
“예상했었나 보네?”
“그럴 줄 알았지. 자네가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본 적이 없다고 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네. 발굴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말이야, 그 푸른 소녀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거든.”
연금술사는 제임스의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소녀의 그림자는 문제없어. 추억과 기억을 잃어서 생긴 소실이니까, 추억을 쌓으면 회복될 거야.”
“그림자를 먹는 마도서는 꽤 유명한 녀석이야. 생전에 미련을 남긴 연금술사는 가끔 그런 마도서가 되기도 해.”
그렇게 연금술사는 제임스와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슬슬 여동생에게 돌아갈 시간이라며 떠나갔다.
연금술사가 떠나가자, 제임스는 연금술사가 놓고 간 보고서를 쓱쓱 넘기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뜬 검은 행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실체가 없는 검은 행성이지만,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오브젝트 협의회에서는….]
[….]
보고서를 넘기는 소리가 간간이 울리는 조용한 방에 TV 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르고 있었다.
***
구름 고기가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대한민국의 하늘.
황금색 혜성이 구름 고기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국 전역을 날아다니며, 해로운 오브젝트를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황금 갑옷 사신이었다.
‘!’
그때 황금 갑옷 사신은 어떤 연락을 받고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 네트워크에 해로운 오브젝트의 정보가 올라온 것이다.
‘해로운 오브젝트!’
‘사람들을 멍하게 만들어!’
그 소식을 들은 황금 갑옷 사신은 서울 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