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어둠 속에서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매, 낡은 교복과 단정한 단발머리의 소녀.
그 어둠 속에서 단발 소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소녀는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또, 이 꿈속이네.”
그녀는 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꿈, 마치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몇 번이고 이 세계에 발을 딛었다.
태양이 사라진 세계.
대신 거대한 빛의 고리가 빛을 뿌리는 세계.
그 헤일로 밑으로 신전 혹은 성당처럼 종교적인 느낌을 풍기는 거대한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라 있었다.
“하아.”
단발 소녀가 한숨을 내쉬자,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끈적이는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채웠다.
이 기이한 공간에서 소녀는 언제나 한 남자를 만났다.
[소녀여, 오늘도 또 왔구나.]
중후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단발 소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비해 현격히 젊은 얼굴, 하지만 그의 눈빛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염원을 이루기 위한, 소원을 쟁취하기 위한 축제가 곧 시작된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에야말로 결정을 내려야 할 터.]
단발 소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임을.
남자는 소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구슬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탕보다도 작은 그것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네 소원의 열쇠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선택은 네 몫이다.]
단발 소녀의 시선이 그 작은 구슬에 고정되었다.
은하수를 담은 듯 형형색색으로 소용돌이치는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가슴 한편에서는 이상한 불안감이 솟구쳤다.
이 수상쩍은 남자와 처음 만난 날, 남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이 축제의 보상은 죽은 사람조차 되살릴 수 있다.]’
‘꺼림칙해.’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이 대가 없이 주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간절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그 절실한 소망.
남자는 이곳은 진정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었다.
즉, 이 꿈속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 소망의 증거였다.
[아직도 고민이 되는 건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의 눈빛에는 이해와 동정,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더 이 구슬을 받아라. 그리고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단발 소녀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선택일까?
하지만 이미 그녀의 손은 구슬을 향해 뻗어 있었다.
손끝이 구슬에 닿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괴리된 기이한 공간.
그것은 이상하게도 거대한 깔때기처럼 무언가를 끌어모으는 개미지옥처럼 보였다.
병실의 무거운 적막을 깨고 소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 익숙한 하얀 벽과 의료기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몇 달 전부터 머무는 언니의 병실이었다.
단발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누워있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인지능력 상실로 이곳에 입원한 지 벌써 몇 달.
의사들도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자신이 침대 옆에 엎드려 잠들었던 것을 깨달은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놀라 손을 펴 보았다.
그곳에는 작고 둥근 구슬이 있었다.
꿈속에서 본 그 구슬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마치 그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증거처럼.
단발 소녀는 구슬을 꽉 쥐며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올게.’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빛이었지만, 소녀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빛 같았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나는 이번에 얻은 언령의 헤일로를 머리 위에 쓰고 그 능력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푸딩!]
말하는 것처럼 의지를 내뱉자, 허공에서 갑자기 푸딩이 튀어나왔다.
‘흠, 이 정돈가?’
사실 언령의 헤일로는 그 능력이 명확해서 조금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 능력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이나 글자, 염파로 만든 언령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언령으로 뭐든지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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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연한 일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으면 그 거미가 나에게 질 일도 없었겠지.
문제는 언령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생각을 명확하고 깔끔하게 언령으로 다듬어야 했는데, 평소에도 잡념이 많은 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웠다.
성공한 것은 짧은 단어로 된 쿠키와 푸딩 소환, 그리고 내 머릿속의 명확한 장난들 몇 가지뿐이었다.
[댖지가 돼라!]
‘으앙! 엄마가 괴롭혀!’
나는 헤일로를 쓴 채, 내 앞을 지나가는 황금 사신 하나를 향해 언령을 쏘아 보냈다.
히히.
문제는 원격 댖지는 녹색달의 능력으로도 가능했고, 과자 만들기는 환상 구현화 헤일로로도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활용할 방법이 애매하네.
옴뇸뇸.
나는 언령의 헤일로로 만들어 낸 푸딩을 뜯어서 냠냠 먹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
[마시멜로로 만들어진 거대한 엄마 골렘!]
푸른 아이돌 사신이 머리 위에 헤일로를 뒤집어쓴 채 언령을 내뱉자, 마시멜로 평원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골렘이 완성되어 버렸다.
‘잘했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헤일로를 쓴 푸른 아이돌 사신은 상당히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사용하는 것처럼 아파 보이진 않았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원래부터 언령을 쓰던 푸른 사신에게 언령의 헤일로를 씌우면 잘 써먹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실험 결과는 대성공.
푸른 아이돌 사신은 언령의 헤일로를 훌륭히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무슨 헤일로를 써도 똑같이 몸이 아팠는데, 푸른 아이돌 사신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나랑 다르게 푸른 아이돌 사신은 ‘언령의 헤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설마 헤일로마다 상성이 있는 건가.
나는 다른 헤일로도 실험해 볼 생각에 내 기억 속에 있는 격이 높아 보이던 미니 사신들을 불러내었다.
황금 사신 제1 검과 주황 왕관 사신.
‘?’
황금 사신 제1 검은 부르자마자,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제1 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면서 주황 왕관 사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나와 미니 사신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서 희미한 의지가 흘러들어왔다.
‘바쁨.’
약간 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느긋한 의지.
흠, 이상하게 바빠 보이지 않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제1 검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주황 왕관 사신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러자 도착한 곳은 거대한 크루즈 선의 갑판 위.
그리고 주황 왕관 사신은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난간 위에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주황 왕관 사신의 머리를 물어버렸다.
‘으앙!’
***
서울 도심의 한 대형병원.
최근 발생한 집단 인지능력 상실 사건으로 인해 이곳은 그 환자들의 임시 수용소가 되어 있었다.
경찰의 손을 떠나 한국 오브젝트 협의회가 사건을 맡게 되면서, 병원 로비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넓은 로비는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그리고 이제는 협의회 직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안고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로비 한편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그 앞에 설치된 대형 TV는 객관적으로 보면 꽤 큰 크기의 TV였지만, 웅장한 로비의 규모와 빼곡히 늘어선 의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감은 묘하게 축소되어 보였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분명 작지 않았지만, 로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대화 소리, 그리고 병원 특유의 기계음들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소음에 묻혀 겨우 들릴 듯 말 듯 했다.
[방금 들어온 서울숲과 관련된 놀라운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최근 서울숲 주변을 봉쇄하고 있던 황금 사신들이 물러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오브젝트 협의회에서 조사원을 현장에 파견한 결과, 예상치 못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서울숲 일대에 존재하던 이른바 ‘문명 파괴 효과’가 사라진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공간 왜곡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던 강철탑의 완전한 파괴도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정부는 대규모 조사 계획을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서울숲은 여전히 위험할 수 있으며,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출입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순간, TV 소리를 완전히 잡아먹어 버릴 만큼 커다란 소음이 로비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이 나타났어!”
“어디?”
웅성거리는 소리.
그 소란의 중심에는 하얀 아귀를 타고, 기사처럼 늠름한 표정을 지은 황금 사신들이 있었다.
회색 사신의 명령을 듣고 서울 전역을 뒤지고, 보라 사신과 푸른 사신에게 TV 내용을 물어보기까지 한 황금 사신들이었다.
‘여기 아픈 인간들 있대!’
‘하얀 아귀가 추적할 수 있을 거야!’
‘흩어져!’
황금 사신들은 말의 고삐를 잡듯이 하얀 아귀의 더듬이를 잡고 아귀를 조종하고 있었다.
뀨!
황금 사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 중인 아귀들도 당당한 표정으로 울며 달려 나갔다.
그런 소란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병원 상공에, 찬란한 금빛을 발하는 갑옷을 입은 미니 사신이 떠 있었다.
허공에 뜬 황금 갑옷 사신의 눈길은 병원을 빠져나와 거리로 녹아드는 한 소녀에게 고정되어 떠나지 않았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 소녀는, 굉장히 급해 보이는 걸음으로 병원 부지를 나서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