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내리쬐는 신촌역 광장.
의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곳에 한 소녀가 자리를 잡았다.
짧게 자른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소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단발 소녀는 꿈속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의 말을 따라 이곳 서대문구에 왔다.
곧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던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찾는 ‘오브젝트’와 관련된 어떤 징후도 없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문득 꿈속의 남자가 알려줬던 ‘축제’의 규칙이 떠올랐다.
‘구슬을 먹거나 가지고 있으면, 축제에 참가할 수 있다.’
‘타인의 구슬을 전부 빼앗으면 축제의 승자다.’
‘축제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면 안 된다.’
정말 간단해서 손쉽게 기억할 수 있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겨우 저 정도 규칙만으로는 뭘 하라는 건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단발 소녀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전화를 확인해 보자, 최근에 자주 봐서 익숙한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번 ‘인지 능력 상실 사건’ 담당 형사였다.
“여보세요? 형사님?”
소녀가 그렇게 전화를 받자, 조금 어수선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지금 전화 괜찮았구나. 이번에 밝혀낸 조사 결과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시간 좀 괜찮니?]
“네, 괜찮아요.”
[네 언니가 약 3개월 전에 성북구에 들렀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들은 적 있니?]
형사의 전화에 소녀가 대답하려는 순간, 모든 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다.
[몇몇 피해자들이 시기는 달라도 성북구에 들른 기록이 있어서 그래.]
[모르겠다고? 혹시라도 기억나는 게 생기면 연락해 줘.]
게다가 소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형사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자, 이질적인 풍경이 소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바둑판처럼 격자무늬가 가득한 하늘.
태양 빛을 모두 먹어 치우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안개.
안개가 빛처럼 소리도 집어삼키는지, 점점 먹먹해지는 귀.
단발 소녀는 그 순간 직감했다.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황금 사신 대회의장.
언제나 황금 사신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이제 검은 사신의 비중이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상태였다.
거의 5:5 정도!
물론 전체 숫자 자체는 황금 사신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지만, 황금 사신은 워낙 바깥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비율이 되어버렸다.
물론 마냥 해맑은 황금 사신들은 검은 사신이 늘어나도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새로운 동생!’
‘동생 잔뜩!’
특히 기존의 검은 사신들보다는 이번에 엄마가 잔뜩 데리고 온 검은 사신들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옴뇸뇸.
‘이거 맛있어!’
‘누가 자꾸 깨물어!’
뀨힝힝.
맛있는 간식을 조금씩 뜯어 먹거나 서로서로 장난치는 등, 황금 사신 대회의는 소란스러운 와중에 시작되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치열했던 주제는 <쉬는 시간에 먹을 간식은 무엇인가?>였다.
그 주제는 정말 치열한 투표전이 벌어졌다.
황금 사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회색 사신 푸딩’과 검은 사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세희 연구소 초코 쿠키’의 승부였다.
황금 사신의 숫자가 조금 많아서 황금 사신의 승리로 끝날 줄 알았지만, 다른 색의 미니 사신들의 지지로 인해 검은 사신의 승리로 끝났다.
겨우 단 몇 표의 승리!
‘앗!’
‘푸딩이 졌어!’
황금 사신들은 투표에서 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중간에 유령 사신이 튀어나와 ‘블랙 푸딩!’이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미니 사신 대부분이 그게 뭔지 몰라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령 사신은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혈도….’를 중얼거리면서 블랙 푸딩을 썰어 먹었다.
그 옆에서는 초록 사신이 민트 초코 푸딩을 쓸쓸히 옴뇸뇸 먹고 있었다.
그렇게 진행되던 회의 중, 기습적으로 상정된 주제는 <하얀 아귀에게도 투표권을 달라!>였다.
과격한 사상을 가진 하얀 아귀들이 매번 저지르는 짓이었는데, 자주 있는 일이라서 그런지 미니 사신들의 반응은 약했다.
뀨힝힝.
붉은 사신들에게 끌려가는 하얀 아귀들의 원통한 울음소리는 미니 사신들에게 닿지 못했다.
하얀 아귀로 대회의장이 어수선해지자, 대회의 진행자는 대회의를 잠시 멈추고 휴식 시간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휴식 시간.
황금 사신들은 간식 시간을 기다리며 들뜬 마음으로 히히 웃었다.
‘세희 연구소 초코 쿠키’가 선택되었다는 소식에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꽤 맛있는 간식이라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촉촉하고 달콤한 ‘세희 연구소 초코 쿠키’는 회색 사신 푸딩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인기 있는 간식이었으니까.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조그마한 하얀 아귀들이 등 위에 쿠키를 얹고 우르르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쿠키!’
황금 사신은 자신의 몫으로 자기 몸통만 한 쿠키를 받고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한입 물어뜯는 순간, 황금 사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딱… 딱딱해….’
이번에 받은 쿠키는 씹는 맛이 강조된 딱딱한 버전이었다.
‘세희 연구소 초코 쿠키’ 중에서도 황금 사신들이 즐겨 먹지 않는 종류였다.
물론 이런 쿠키도 인간이 주면 황금 사신은 맛있게 먹곤 했지만, 인간이 주는 것과 미니 사신들끼리 먹는 것은 천지 차이!
이번 간식은 검은 사신의 취향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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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보들하고 엄청나게 단 과자를 좋아하는 황금 사신과 달리 검은 사신들은 식감이 강한 과자를 좋아하곤 했으니까.
‘앙대….’
‘투표에 져서 그런 거야?’
‘그래서 이런 쿠키?’
회의장 곳곳에서 슬픈 표정의 황금 사신들이 속출했다.
황금 사신들은 이제야 투표 결과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다.
표결에 부치면 언제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던 시대는 끝나버렸다.
힝힝.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나는 마시멜로 밑으로 핫초코가 흘러서 따끈따끈한 마시멜로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으음.’
그러던 중,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려보니 내 주변에 검은 사신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옴뇸뇸.
검은 사신들은 세희 연구소에 있는 모든 과자를 먹으려는 것처럼 산더미처럼 과자를 쌓아두고 야금야금 파먹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아이들은 식탐이 조금 강해 보였다.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내 주변에는 그렇게 과자를 먹는 검은 사신 말고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검은 사신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흐물흐물 녹아 뭉친 뒤, ‘끝의 탑’에서처럼 검은 아귀로 변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 녀석들.
하얀 마시멜로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내 주변에 차곡차곡 쌓는 녀석들.
전부 새로 온 검은 사신들인 것 같네.
나는 검은 사신들을 일일이 구분하지는 못했지만, 검은 사신들이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자세히 살펴보니, 거대한 검은 아귀가 하얀 마시멜로 벽돌을 나르면 검은 사신들이 그걸 받아서 내 주변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갑자기 그런 궁금증이 들어서 눈을 떴다.
‘앗!’
‘엄마, 깨어났어!’
그러자 검은 사신들이 깜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통 위로 도도도 달려와서, 의지를 뿜어내었다.
‘엄마 일어나면 안 돼!’
‘?’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자, 엄마를 위한 건물을 짓고 있어서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건물인데?’
‘신전!’
그러자 신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흠흠, 내가 좀 신성하긴 하지.
히히.
그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신전처럼 종교적 건물 느낌이 나긴 했다.
하지만 건물 입구가 미니 사신 사이즈라서 완성되고 나면 빠져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불편하게 유령화로 나가야 하는 건물인 건가?
‘이러면 나갈 수가 없는데?’
내가 그렇게 묻자, 검은 사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지를 뿜어내었다.
‘무덤이니까?’
‘!’
으악, 검은 사신이 또 패륜을 한다.
나는 그대로 벽돌을 발로 차 건물을 무너트리고, 벽돌을 나르던 검은 사신들을 깨물어버렸다.
‘으앙!’
‘엄마가 괴롭혀!’
‘엄마 집은 언제나 무덤이었는데!’
***
안개로 하얗게 물든 거리.
툭. 툭.
단발 소녀는 소리가 먹혀 먹먹하게 들리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안개 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하늘의 격자무늬와 안개를 제외하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길거리였지만,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흐르지 않는 물.
공중에 박제된 새들.
움직이지 않는 시곗바늘.
현실의 시간을 잘라서 전시해 놓은 것처럼, 안개 속의 길거리는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쿵.
그런 길거리를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도중, 안개가 전부 삼키지 못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단발 소녀는 이를 단단히 물고 천천히 소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언니,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되돌려 놓을 테니까.’
그녀에게는 이뤄야 할 소원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안개를 헤치고 나아간 끝.
끔찍하게 생긴 괴물 둘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피투성이의 괴물이었다.
양 팔꿈치에서 팔을 잘라내고 톱을 붙인 쌍 톱날 괴물.
다른 한쪽은 녹색 비늘이 잔뜩 돋아난 이족 보행 파충류 괴물이었다.
팔이 없는 대신 꼬리를 창처럼 쓰는 악어 괴물.
그 끔찍한 괴물들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소녀는 깜짝 놀라 그대로 뒤로 돌아 도망쳤다.
빛과 소리를 먹어 치우는 안개 속으로.
정신없이 도망치던 소녀는 좁은 건물 틈에 몸을 숨기고, 양 무릎을 끌어안았다.
‘꿈속의 남자에게 속았어.’
‘구슬이 저런 끔찍한 거라는 이야기는 안 해줬잖아.’
소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괴물들이 ‘구슬을 먹은 자’였다.
그리고 남자가 말하던 ‘축제’는 괴물이 되어 서로의 구슬을 빼앗는 것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흐느꼈다.
‘언니, 어떡하지? 어떡해야 해?’
왠지 저 구슬을 먹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끔찍한 구슬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언니를 살릴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먹어야 할까?’
‘먹기 싫어.’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소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싸우는 소리가 안 들려.
‘….’
그 순간, 쇠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으윽. 그으윽.
소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양손의 톱날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괴물의 실루엣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