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8
대륙의 남성 귀족들에게 있어서 던전 공략 실력이라는 건 일종의 자존심이다.
누가 더 많은 던전을 공략했는가. 누가 더 어려운 던전을 공략했는가. 누가 던전에서 더 대단한 물품을 습득했는가.
과거 귀족의 의무에서 시작된 경쟁은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서로의 대단함을 피력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여기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서로가 공략한 던전이 같기 어렵다는 것.
대륙에 생성되는 던전들은 일정 수준의 공통점을 공유하긴 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른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귀족들의 자존심 싸움은 쉽게 결론나기 어려웠다.
내가 공략한 던전이 더 넓었다던가. 그 안에 나오는 마물들이 더 위협적이었다던가. 계층이 더 많았다거나. 보스가 말도 안 되는 녀석이었다던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던 진흙탕 싸움은 대개 높은 권력을 지닌 자가 승리하기 마련이었으니.
권력자는 일부러 져 준 것 아닐까 하는 찝찝함을 느껴야했고 아래에 있는 이들은 억울한 패배를 겪어야한단 사실에 불만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한 귀족이 재미난 발상을 떠올렸다.
인공적으로 던전을 만들어서 대결을 펼치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으냐면서.
그렇게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인공던전의 술식이 개발되었고 여러 귀족들은 서로가 만든 던전을 공략하며 스스로의 뛰어남을 뽐내게 되었다.
이 경쟁 방식은 오늘 날까지 모양새를 달리해 가면서 이어져왔는데 최근 들어 던전 공략에 열성인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은 던전학 학술회의 학지였다.
던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만드는 이 잡지에는 매 주마다 공략을 시도해 볼만한 여러 던전들을 소개했는데, 그 던전의 질들이 하도 좋다 보니 여러 귀족들은 번갈아 가며 던전을 만드는 대신 학지의 던전을 공략하고 서로 이 성과를 자랑하는 쪽을 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남성 귀족들끼리 모이게 되면 이번주 학지의 던전을 공략해보았냐는 화제가 반드시 나오게 되었으니.
다른 귀족들과 만날 일이 잦은 사람이라면 매 주 학지의 던전을 반드시 공략해야만 했다.
“흠.”
솔라딘 왕국의 1왕자.
르네 솔라딘이 던전학회의 학지를 붙잡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서 기반 했다.
수많은 인공 던전에서 혁혁한 기록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실전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어 보이면서 스스로가 지닌 공략 실력을 증명한 르네지만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해선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왕국의 1왕자이자 유력한 왕위계승자라는 지위는 항시 수많은 의심을 마주해야 하는 자리이기에 르네는 매번 학지의 던전을 공략하며 스스로의 능력이 이전보다 나아졌음을 보여야 했다.
다만 르네는 학지의 던전을 공략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던전이라는 것은 아무리 다르려 노력해도 결국 비슷비슷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자신의 눈에 비슷해 보이는 던전을 수십 수백개 공략하다 보면 누구라도 질리지 않겠는가.
“이것 참. 재밌군.”
허나 오늘은 달랐다.
학지에 실린 던전을 살피는 르네의 눈동자에는 짙은 흥미가 스며있었다.
던전의 기믹을 사용하는 솜씨가 좋아.
어설프게 머리를 굴렸다가는 오히려 자기 수에 된통 당하겠지.
그렇다고 심술궂기만 한가?
전혀. 이 던전을 만든 자는 너무도 친절하다.
눈앞에서 시선을 떼어 주변을 둘러보면 수없이 많은 단서들을 살필 수 있어.
공략법을 눈치 챈 자에겐 너무도 친절한 던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자에게는 시련을 가져다주는 곳.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던전이구나.
항시 이런 던전만 학지에 제출된다면 본인도 언제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학지를 펼칠 수 있을 터인데.
던전의 공략을 끝마친 르네는 설계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다음에 같은 설계자가 던전을 만든다면 그 곳 또한 공략을 하기 위해서.
“…루시 알른?”
그 곳에서 의외의 이름을 발견한 르네는 눈을 살짝 치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녀라면 이런 던전을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지.”
얼마 전 파트란 축제에서 보여주었던 기행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던전을 공략할 때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기 위해선 반드시 던전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할 지어니. 그녀가 재미난 던전을 만들어 낸 것은 별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린 르네는 문제 뒤 쪽에 있는 해답지를 살폈다.
루시 알른이라는 기인이 이 던전을 어떤 식으로 해설할지가 궁금했기에.
참으로 놀랍게도 학지에 기재된 해설지는 멀쩡했다.
그 시건방진 녀석이 이런 멀쩡한 글을 쓸 리가 없는데?
아아. 소울 아카데미 측에서 검토와 수정을 거친 것이군.
이해했다. 그 쪽 대학원생이 고생을 많이 했겠어.
그리고.
흠.
소울 아카데미 종강 전에 방문하면 이 던전을 직접 공략할 수 있다라.
마지막 문구를 확인한 르네는 느긋이 차를 마시면서 고민을 해보았다.
명분 자체는 있다.
아서와 세실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기도 하고, 왕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인 소울 아카데미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도 괜찮을 것이야.
겸사겸사 루시 알른 그 녀석을 만나서.
“르네. 무얼 하고 계신가요?”
뒤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르네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1왕비님.”
솔라딘 왕국의 제 1왕비이자 현재 몸이 편찮은 왕을 대신하여 대부분의 업무를 수행 중인 왕궁의 실세.
르네 솔라딘의 어머니 되는 사람.
카바티 솔라딘은 딱딱하게 예의를 차리는 르네의 모습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르네. 제가 누누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답니다.”
“아뇨. 1왕비님. 이래야 제가 마음이 편합니다.”
“참. 알겠으니 일단 앉으세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던전학 학지를 읽고 계셨군요. 이번에 올라온 던전은 괜찮았나요?”
“예. 올해 제출된 것 중에서 제일이란 생각이 들 정돕니다.”
“어머나. 르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르네에게서 학지를 받아간 카바티는 눈으로 반달을 그리며 던전을 살폈다.
아무리 1왕비님이라 할지언정 저 던전을 공략하는 데엔 시간이 걸리실 터이니 미리 차를 타 두도록 할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르네가 자신의 마법을 활용해 차를 타는 동안에도 카바티의 눈은 학지에서 떨어질 겨를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르네가 탄 차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워갈 무렵이었다.
“르네.”
“예. 1왕비님.”
“소울 아카데미의 종강 파티가 열리는 날이 언제죠?”
갑자기 왜 저를 물으시는 거지?
르네는 속으로 의문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즉시 대답을 냈다.
“12월 1일입니다.”
“며칠 안 남았네요.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겠어요.”
“…참여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피는 안 이어져 있지만 세실도 아서도 제 아들들인 걸요.”
두 사람이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겠어요?
카바티는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했지만 르네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아니했다.
그가 아는 1왕비라는 사람은 저런 인정을 베풀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르네 당신도 그 날 일정 비워두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1왕비님.”
그렇게 카바티가 자리를 뜬 후 홀로 남겨진 르네는 가득 찬 채로 식어가는 차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
“거절하겠다. 루시 알른.”
아서는 한심하단 생각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날 바라봤다.
“자그마한 격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이 본인일 지언데 1학년의 대표를 맡으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는가.”
‘그건…’
“왜요? 이미 허접한 게 널리 알려진 불쌍왕자님인데 좀 더 깔보인다 해서 문제가 돼요?”
“…진짜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쯧. 정말 재수 없군. 내가 설마 자칼 그 녀석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줄이야.”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아서의 모습에 한 마디를 하고 싶단 생각이 치솟았지만 일단은 그에게 부탁하는 입장인지라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을 해봐라. 루시 알른. 태어날 적부터 여러 추문이 따라 붙은 게 본인일지언데 그런 굴욕을 인정하면 얼마나 많은 수군거림이 있겠느냐.”
…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할 말이 마땅찮은데.
“이러한 추문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본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패자의 입장에서 승자의 배려 아닌 배려를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아느냐?”
자신이 괜히 입학식 때 연설을 거부한 게 아니라는 아서의 이야기에 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정론이라서 무슨 말을 하건 억지가 될 뿐이었으니까.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기말고사 때 몇 개 틀릴 걸.
점수 좀 나쁘게 받을 거어어얼!
난 도대체 왜 이 이벤트를 까먹고 있었던 걸까.
조이의 옆에 있다 보니 그녀의 얼빵스러움이 전염되기라도 한 건가?!
얼빵 메스가키가 되어버린 거야!?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하고 있으려니 아서가 턱을 괴며 목소리를 냈다.
“애초에 말이다. 왜 연설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냐. 다른 이들을 깔보는 것이라면 그대의 주특기 아닌가.”
“…”
“던전학 시험의 공략을 시연할 때처럼 지껄이면 된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차피 그대의 평판은 이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터인데.”
무미건조하게 나열되는 팩트의 폭행을 가만 듣고만 있던 나는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뭐. 뭐냐. 루시 알른.”
“따라나와요♡ 불쌍왕자님♡ 당신의 세치 혀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알려주도록 할게요♡”
“그게 네가 할 말… 아니. 아니다. 미안하다. 내가 배려심이 너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메이스는 집어 넣고. 끄아아아악!”
아서에게 거절을 당한 후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싫어요! 전 영애께서 제가 고른 옷을 입고 단상에 서는 걸 보고 싶다고요!”
“…그. 죄송합니다. 고귀하신 분들을 제치고 제가 단상에 서는 건.”
“저어. 그게. 히익!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치만 무수한 시도 끝에 돌아온 건 언제나 거절의 의사뿐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아서와 조이를 제치고 단상에 서야 한단 사실이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으아악!
자칼 그 녀석이 지금 있었다면 그 녀석한테 강제하면 그만인데!
왜 내년에 1학년부터 다시 다닐 거라 그래서!
<포기해라. 여아야. 답이 없는 걸 어찌하겠느냐.>
‘그치마아안!’
<그럴 시간에 그냥 연설을 잘 할 방법을 생각하는 게 이로울 터. 본인이 도와줄 테니 한 번 고민을 해보자꾸나.>
‘…네에에.’
결국 연설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나는 할배와 함께 최대한 연설을 깔끔히 넘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진짜 답이 안 나오더라.
내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메스가키 스킬로 번역될 땐 다른 단어로 나오는 경우가 흔해서 연설문을 쓸 수가 없어.
오죽하면 그냥 되는 대로 이야기한 후에 도망쳐버릴까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
“있잖으냐. 내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 싸매던 중 얼빠여우가 목소리를 냈다.
‘뭔데요.’
“뭔데.”
“바니걸에 장신구까지 착용해서 모두의 혼을 빼놓는 것이다! 그대의 얼굴을 살피느라 목소리를 듣지 못할 지경으로 만드는 게지!”
하악거리며 침을 흘리는 얼빠여우를 본 나는 한심하단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 그냥 내가 바니걸에 장신구를 착용한 걸 보고 싶을 뿐이잖아.
하아. 이 변태한테 그럴 듯한 의견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다른 애들이 얼빠여우나 변태 사도 같은 재활용 불가 쓰레기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니지.
잘만 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나?
최소한 내가 연설을 끝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혼을 빼놓는 것 정도는 충분히.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얼빠여우 쪽으로 휙 고갤 돌렸다.
“…음? 뭐냐? 왜 그런 눈으로.”
그리곤 얼빠 여우가 도망치기 전에 녀석의 허리를 붙잡고 품 안에 끌어안았다.
“히약?! 잠. 잠. 갑자기 왜 이러는. 흐에에?!”
얼빠여우!
너도 가끔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숲의 주인이 지닌 지혜라는 게 이런 건가!
좋아! 한 번 친구들을 상대로 시험을 해보자!
이 방법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