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공원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둑한 구석에, 한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얼굴을 가리며 부드럽게 흔들렸다.
소녀는 구슬을 품에 꼭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품 안의 구슬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밤공기가 소녀에게 닿자, 소녀는 무의식중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러자 소녀 바로 옆에 떠 있는 황금 갑옷 사신의 빛이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다.
황금 갑옷 사신은 단발 소녀에게 장작의 온기와 포근함을 전해주며, 따뜻한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신은 세심하게 빛과 온기의 강도를 조절했다.
소녀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하면서도, 깨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나쁜 오브젝트….’
황금 갑옷 사신은 소녀의 구슬을 내려다보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구슬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애착 인간이 슬퍼할 테니 참고 있었다.
게다가 구슬을 파괴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쁜 오브젝트를 만든 오브젝트를 찾아야 해.’
황금 사신 입장에서 이 구슬은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먹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독약.
겉으로 보기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
“으음….”
단발 소녀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더니 추운 듯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황금 갑옷 사신은 소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장작을 조금 더 태워 자기 몸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마치 따뜻한 이불처럼 장작의 온기가 소녀를 감싸기 시작하자, 점차 그녀의 얼굴에 평온함이 깃들었다.
황금 갑옷 사신은 그런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눈을 감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형형색색의 달빛이 단발 소녀와 황금 갑옷 사신을 부드럽게 비추는 가운데, 새로운 ‘축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여명이 서대문구의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아침의 첫 빛이 도시의 윤곽을 그려내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단발 소녀와 황금 갑옷 사신은 나란히 앉아, 그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손에는 소박한 아침 식사가 들려 있었다.
소녀는 조용히 쿠키를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황금 갑옷 사신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혀로 살짝 핥고는 쓴맛에 미간의 주름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작게 키득거렸다.
만난 지 겨우 하루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 같았다.
그때였다.
“!”
소녀의 작은 탄성과 함께 주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마치 허공에 녹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익숙한 격자무늬가 새겨졌고, 그 사이로 하얀 안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공기의 밀도가 순식간에 변화하더니 마치 물속에 잠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놀란 소녀가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지만, 곧 이 이상한 액체 같은 공기 속에서도 호흡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금 갑옷 사신은 순식간에 적응을 마치고,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팔다리를 흔들며 헤엄쳤다.
멀리서 붉은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섬광을 일으켰고, 뒤이어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축제’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렇게 축제의 2일 차가 시작되었다.
***
미니 사신 정원에 펼쳐진 마시멜로 평원.
그곳에는 보기 드물게도 짙은 안개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푸른 아이돌 사신이 안개를 만들고, 내가 지형을 뒤틀어 안개를 가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안개에 뒤덮인 마시멜로 평원은 마치 미로처럼 벽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생각보다 잘 노네.’
깨무는 황금 사신들에게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주려고 만든 지형이었지만, 예상외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높게 솟아오른 마시멜로 벽 위에 앉아 푸딩을 먹으면서, 황금 사신들의 술래잡기를 구경했다.
히히.
그러던 중, 안개 속에서 한 황금 사신이 미로 속을 뚜방뚜방 돌아다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연신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눈이 붉게 빛나는 황금 사신이 ‘으앙!’ 하고 입을 벌리고 습격해 왔다.
‘앙대!!!’
그러자 황금 사신은 필사적으로 미로를 뛰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필사적인 정도는 거의 ‘애착 인간이 위험해!’ 급.
황금 사신이 필사적인 이유는 이 놀이에는 벌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놀이에 패배한 황금 사신들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앙대.’
‘댖지가 돼버렸어.’
나는 댖지 황금 사신들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통통 두들기며, 황금 사신 술래잡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야말로 1석 2조의 놀이였다.
나를 깨무는 황금 사신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데다가, 통통한 댖지 황금 사신들을 볼 수 있었다.
히히.
그렇게 술래잡기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도망치는 황금 사신의 몸놀림이 심상치 않았다.
술래만 유령화를 쓸 수 있는 규칙이라서 술래가 이길 확률이 높았는데, 화려한 몸놀림으로 몇 번이고 깨무는 황금 사신의 깨물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앙대!’
‘이겼어!’
붉은 렌즈를 낀 황금 사신은 절망한 표정을 바닥에 널브러졌고, 도망치던 황금 사신은 폴짝폴짝 뛰며 만세를 시작했다.
내가 흐흐 웃으며 패배한 황금 사신을 손아귀에 쥐자, 깨무는 황금 사신은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앙대!!!’
나는 최초로 패배한 술래 황금 사신을 위해서, 이번에 새로 만든 신기술을 보여주기로 했다.
우선 언령의 헤일로를 머리 위에 쓰고, 천천히 언령을 만들어 냈다.
[댖지가 돼라.]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녹색 달의 댖지로 만드는 능력을 동시에 사용했다.
그러자 훨씬 동글동글해진 댖지 황금 사신이 완성되었다.
히히.
‘이… 일어날 수가 없어….’
황금 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지 부들부들거릴 뿐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슈퍼 댖지 황금 사신을 바닥에 두고 뱃살을 마구 찔러주었다.
만족스러운 감촉이었다.
***
격자무늬 하늘 아래, 안개로 가득 찬 서대문구의 도심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액체처럼 변한 공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고,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벽은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냈다.
첫째 날과는 달리 무대는 미로로 변해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조용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 이 안개 낀 미로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아군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특별한 능력, 안개 속에 완벽히 동화되는 재주는 이런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기 능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거대한 늑대로 변한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주변의 안개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안개 그 자체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마치 날카로운 강철로 된 발톱이 돌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아마 아침에 붉은 번개를 불러들인 녀석이겠지.’
그는 아침에 번개를 만들어 낸 참가자를 찾기 위해서 계속 이동 중이었다.
그는 안개 속을 미끄러지듯 조용히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저 안개의 흐름을 따라 전진할 뿐이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자, 목표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 팔에 붉은 번개가 흐르는 거대한 활을 달고 있는 괴물.
그 모습은 정말 위협적이었다.
3m가 넘는 크기에 번개를 쏘아내는 활이라니.
이곳이 미로가 아니었다면, 안개가 이토록 짙지 않았다면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다.
남자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붉은 번개의 괴물은 누구라도 찾아오라는 듯이 하늘을 향해 번개를 쏘아 보내며, 한 장소를 계속 맴돌 뿐이었다.
남자는 붉은 번개의 괴물이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번개를 쏘아 보내는 순간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안개 속을 미끄러지듯 천천히 붉은 번개의 괴물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콰르릉!
그리고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번개를 쏘아내는 순간,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붉은 번개의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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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공격은 정확했고, 치명적이었다.
순식간에 승부는 결정 났다.
붉은 번개의 괴물 몸속에서 구슬을 뽑아내는 것으로 그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작은 미소가 피로 물든 입가에 맴돌았다.
‘이번 축제 장소는 나에게 너무 유리하군.’
‘오늘 당장 축제를 끝내버릴 수도 있겠어.’
그는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오늘의 전장에서 그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승리의 짜릿함이 전신을 감쌌다.
그의 소원이 당장이라도 이뤄질 것만 같았다.
[하하, 하하하.]
구슬을 먹고 안개 색 털을 가진 늑대로 변한 남자는 늑대의 입으로 웃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이 밝아졌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황금빛 혜성이 하늘을 갈랐다.
하늘에서 그의 심장까지 이어지는 한 줄기 빛.
[!!!]
남자의 입에서는 한마디조차 새어 나오지 못했다.
남자가 그 찬란한 빛줄기를 발견한 순간, 이미 꿰뚫린 상태였다.
그 어떠한 소리도 없었고, 고통조차 없었다.
오직 찬란한 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마지막 숨을 내쉬며, 품었던 소원을 천천히 토해내며 세상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할 소원의 끝이었다.
***
서대문구의 구석진 골목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단발머리 소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이제 끝난 거야?”
단발 소녀가 순식간에 돌아온 황금 갑옷 사신을 바라보며 묻자, 황금 갑옷 사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소녀의 손에 들린 구슬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무언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구슬 안의 에너지는 마치 시계 초침처럼 정확하게 차올랐다.
50%… 60%… 70%…
소녀의 심장은 구슬의 충전과 함께 빠르게 뛰었다.
80%… 90%… 그리고 마침내 100%.
충전이 완료되는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격자무늬의 균열이 생겼다.
그 틈새로 한 남자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로는 하얗게 타오르는 헤일로가 떠 있었다.
소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꿈에서 본 바로 그 남자였다.
[예상외의 전개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짝짝.
남자는 박수를 치며 허공을 밟았다.
그의 발걸음마다 공기 중에 투명한 계단이 생겨났고, 그는 그 위를 자연스럽게 걸어 내려왔다.
소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드디어 언니를 되돌릴 수 있어! 정말 고마워!”
그녀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황금 갑옷 사신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사신의 반응은 소녀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황금 갑옷 사신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이빨을 드러내며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소녀의 마음속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소녀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남자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은 소녀의 직감을 자극했다.
[고생 많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역광 속에서 울려 퍼졌다.
[너의 소망은 대업의 성취와 함께 이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