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안개와 격자무늬 하늘의 공간.
그런 이질적인 장소에서 단발 소녀는 하늘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남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소원 들어줘!”
단발 소녀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구슬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구슬 10개를 모으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이상하게도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소녀도 슬슬 머리로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언니를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수상쩍은 오브젝트가 소원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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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리 절박했어도 저런 수상쩍은 남자의 말을 믿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도 명확히 인지해 버렸다.
“지금 당장 들어줘. 제발.”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를.
언니를 구하겠다는 소망을.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치던 단발 소녀는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소녀의 얼굴 아래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헤일로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의심하는 건가? 저항성의 미미한 증가라, 흥미롭군.]
헤일로의 남자는 잠깐 걸음을 멈췄지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납 인형에 그런 기능을? 미미하고 쓸모없어. 무의미한 시도를 반복하던 그녀다워.]
헤일로의 남자는 이제 단발 소녀는 아예 시야에도 넣지 않고 있었다.
이제 소녀의 말이나 행동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황금 갑옷 사신은 울고 있는 단발 소녀를 잠시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를 악물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라. 무의미한 시도의 부산물이여. 대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적당하겠어.]
황금 갑옷 사신은 그 순간 전신에서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헤일로의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길게 이어지며 허공을 수놓는 황금색 빛줄기.
황금 갑옷 사신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남자의 눈앞에 순식간에 도달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충돌해 버렸다.
콰앙!
마치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번쩍이는 황금색 섬광과 함께 남자는 공중의 계단에서 떨어져, 미로가 가득한 도심 한복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하늘 높이 떠오른 황금 갑옷 사신의 몸에서 태양처럼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를 모두 태워버리고,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릴 정도의 강렬한 빛.
그리고 그 빛으로 변한 황금 갑옷 사신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처럼, 남자가 떨어진 도심을 향해 내리꽂혔다.
쾅. 쾅. 쾅. 쾅.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번쩍이는 섬광과 밀어닥치는 충격파.
격자 하늘 아래, 원래 서대문구를 그대로 옮겨 놓았던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쩌저적.
그러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처럼 격자 공간에 천천히 균열이 달리기 시작했다.
***
서울의 밤하늘에 형형색색의 달들이 떠오른 시간, 서대문구 구석의 한 건물이 평소와는 다른 활기를 띠었다.
그 건물은 제임스가 급하게 마련한 임시 상황실이었지만, 그 내부는 놀랍도록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최신식 장비들이 벽면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중앙의 대형 스크린은 끊임없이 데이터를 갱신하며 깜빡였다.
그 설비들 한가운데에 제임스가 앉아서, 모니터에 떠오른 보고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제임스의 눈썹은 미간 쪽으로 모여들어 깊은 주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읽던 제임스는 머리가 아픈 것처럼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제임스가 보고 있는 보고서는 미국 오브젝트 협회에서 받은 것으로, 서울에서 발생한 ‘집단 인지 능력 상실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원래 그의 의도는 단순히 유사 사례를 찾아 유효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제임스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제임스의 눈동자가 보고서의 문장들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예상과는 달리, 보고서는 단순한 유사 사례 목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같은 사건들의 기록이었다.
“이런 오브젝트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니.”
제임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지에서 거의 동일한 패턴의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피해자 수는 최대 11명.
아마 신고 여부나 사고에 의해서 누락된 사람이 있을 뿐, 아마 매번 11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겠지.
그들은 모두 특정 장소를 이유 없이 방문했고, 그로부터 3개월 이내에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보고서에는 수십 년 전, 오브젝트 사태가 막 시작되었을 때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토록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오브젝트라니.
그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정말 하나의 오브젝트가 벌이고 있는 일이라면, 설원의 달이나 이름없음과 비슷한 수준일지도 모르겠군.’
제임스는 책상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서서, 창문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어.”
제임스는 중얼거리며 턱을 문질렀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현상은 한 번만 발생하고 끝났다.
한국에서도 그랬다면 아마도 수많은 기이한 오브젝트 현상들 사이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 지금, 패턴이 달라졌지?
한 지역에서 한 번만 발생하던 오브젝트 현상이 한국에서만 3번째.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국이 특별한 것이거나, 아니면 지금 이 시기가 특별한 것이거나.
제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큰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제임스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너무 허황되고 비약이 심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곧 결심을 굳히고, 비서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이번 ‘인지 상실 사건’에 대해서 대대적인 방송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비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제임스는 비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브젝트와 관련된 일들은 언제나, 아무리 황당해 보여도 현실이 되곤 했지.”
제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번 보고서를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세희 연구소의 깊숙한 곳, 회색 사신 격리실은 언제나처럼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얀 벽지, 부드러운 조명, 그리고 가장 중요한 크고 푹신한 침대!
그 위에 누우면 몸이 물속에 잠기는 것처럼 푹 잠겨 들어가는 부드럽고 안락한 침대였다.
사실 조금 덥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랑말랑한 침대였지만, 내 손에 들린 간식이 그것을 무마해 주고 있었다.
옴뇸뇸.
나는 미니 사신 정원의 설원에서 가져온 우유 빙수를 조금씩 냠냠 먹으며, 보들보들한 이불 속에 푹 잠겨서 벽에 걸린 대형 TV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런 천국을 원했어.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낸 격리실 천국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오브젝트 협회가 사라지자 생긴 문제점이었다.
‘요즘 재밌는 뉴스가 안 나오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뉴스와 화면 속 인물들의 지루한 대화들.
협회가 날마다 기상천외한 사건을 일으키던 때가 그리웠다.
그렇게 살짝살짝 졸면서 지루함을 견디는 중, 미세한 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침대 밖으로 살짝 내민 발가락으로 살펴보니, 미니 사신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천천히 까치발로 걸어오는 푸른 아이돌 사신과 황금 사신들이었다.
‘엄마 자고 있어.’
‘히히.’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황금 사신들은 작게 키득거리고 있었다.
푸른 아이돌 사신은 무슨 일인지, ‘언령의 헤일로’까지 뒤집어쓴 상태로 황금 사신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 아이들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궁금해져서, 눈을 감고 잠이 든 척을 했다.
내 근처까지 다가온 황금 사신들은 조심스럽게 내 기색을 살펴보더니, 꾸물꾸물 내 얼굴 위로 기어 올라와서 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엄마 진짜 자고 있어.’
‘지금이야!’
그러고 보니 저 황금 사신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푸른 아이돌 사신은 황금 사신들의 신호를 받고, 굉장히 긴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대.]
[대….]
푸른 아이돌 사신의 언령에는 아직도 망설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대’로 시작할 만한 언령이 뭐가 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푸른 아이돌 사신은 마침내 언령을 완성해서 나를 향해 쏘아 보냈다.
[댖지가 되어주세요!]
‘!!!!’
으악, 패륜 언령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언령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칭.
하지만 푸른 아이돌 사신의 언령은 내 몸에 닿자마자,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앗!’
‘엄마 일어났어!’
황금 사신들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도망가려고 했지만, 분노한 나의 댖지 빔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앙대!’
‘으앙!’
푸른 아이돌 사신은 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깜짝 놀랐는지, 도망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푸른 아이돌 사신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살포시 웃었다.
히히.
나는 따라서 웃어준 뒤, 바로 댖지 빔을 쏴버렸다.
[댖지….]
푸른 아이돌 사신은 충격받는 표정으로 통통한 볼살을 만지며, 우울하게 염파를 중얼거렸다.
뀨히히.
그리고 그 뒤편에서 하얀 아귀는 댖지가 된 미니 사신들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괘씸한 하얀 아귀를 어떻게 괴롭힐지 생각하는 순간, TV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임스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발생한 ‘집단 인지 능력 상실 사건’은….]
[이에 따라 오브젝트 협의회는 서대문구를 위험 지역으로 선포….]
[서대문구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 황금 사신마저 사라져….]
원래라면 드디어 재미있는 뉴스가 나왔다고 생각할 법한 뉴스였지만, 마지막 한 줄이 더해지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황금 사신이 실종????’
***
점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격자무늬 하늘의 세계.
그 세계에 마치 태양이 강림한 것처럼 보이던 찬란한 황금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빛 속에서 조금 지쳐 보이는 황금 갑옷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건물이 무너져 내려서 생긴 먼지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단해. 겨우 부산물이 이 정도일 줄이야.]
딱.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쳐서 먼지구름을 모두 날려버렸다.
‘!’
폐허 속에서 상처 하나 없는 헤일로의 남자가 걸어 나오자, 황금 갑옷 사신은 더욱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너무 강해.’
하지만 황금 갑옷 사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다시 한번!
황금 갑옷 사신이 그렇게 마음을 먹자, 몸속에서 장작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며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콰앙!
그렇게 다시 한번 황금 혜성으로 변했지만,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 닿지 않았다.
도저히 뚫을 수 없는 투명한 장벽이 남자와 황금 갑옷 사신 사이에 있었다.
‘어째서?’
황금 갑옷 사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의 ‘뀩’처럼 물리 면역도 뚫어버릴 공격이 이렇게 막혀버리다니.
제1 검이었다면, 저 방어벽의 구조를 눈치챌 수 있었을까?
아니, 자신보다 감각이 뛰어난 다른 황금 사신이었다면 눈치챌 수 있었을까?
가장 재능이 없는 황금 사신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급’으로 감각이 부족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황금 갑옷 사신은 다시 황금 혜성으로 변해 헤일로의 남자를 끊임없이 내려쳤다.
통하지 않는다면, 통할 때까지.
하지만 그 시도는 헤일로의 남자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끝나버렸다.
[흠, 지능은 좀 부족한 건가? 포기해야 할 때를 모르는군.]
남자가 지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공간이 격자무늬로 쪼개지더니 황금 갑옷 사신을 순식간에 토막 내버렸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갑옷은 뿔뿔이 흩어졌고, 팔다리는 싹둑싹둑 잘려 나가 황금색 장작을 흩뿌렸다.
그것은 마치 황금색 핏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