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2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베네딕은 너무 호들갑이 심해.
거의 주에 세 번씩은 수정구로 대화를 나눴잖아.
도저히 오랜만이라 그럴 상황이 아닌데 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먹울먹 거리면서 달려드는 거냐고.
그리고 또 힘은 얼마나 강한지.
저 쪽에서 끌어안으니까 진짜 물리적으로 숨이 막히더라.
여태까지 성장한 힘으로 밀어내려고 노력은 해봤는데 어떻게 팔이 미동도 안 할 수가 있지?
이게 진짜 인간인가?
애초에 그냥 종자 자체가 다른 것 같은데?
…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종자가 다른 사람이 되는 구나.
<방금 전 네 소문에 대해서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라면 너도 종자가 다르다 생각할 듯 하다만.>
이전 같았으면 부정을 했겠지만 방금 전 베네딕을 기다리면서 온갖 이야기를 귀에 담은 난 고갤 젓지 못했다.
알른 가문의 영광을 이어나갈 존재니.
왕국의 명성을 드높일 사람이니.
어쩌면 베네딕 알른을 뛰어넘을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됐거든.
돌이켜 보면 내가 좀 정신 나간 짓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
나 스스로야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생각하고 말지만 이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겐 전혀 다르게 받아 들여질 테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흐뭇하더구나. 온갖 경멸을 받던 아이가 지금은 다른 이들의 경탄을 사게 될 줄이야.>
할배는 그것이 자기 일인 것마냥 흐뭇해했지만 되래 당사자인 나는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인성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주신께서 내린 사람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
그 빌어먹을 개허접페도변태주신새끼가 나한테 준 게 그 인성이라고!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내가 죽어라 발악하면서 손에 넣은 거란 말이야!
진짜 다른 이야기들은 대충 흘려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더라.
베네딕이 저 멀리서 튀어 나오지 않았다면 멱살을 붙잡지 않았을까.
“루시. 루시. 이 파파의 말을 듣고 있니?”
…아. 젠장. 딴 생각하면서 이야기 흘려듣고 있는 거 들켰다. 대충 듣는 시늉을 하고 있으면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의없다고? 나도 알아! 그치만 어떡해! 베네딕이 호들갑 떠는 걸 듣고 있으면 닭살이 올라온단 말야!
‘네에. 듣고 있답니다.’
“걱정 마세요. 바보 아버님의 투박한 목소리는 쓰잘데기 없이 선명해서 기분 나쁠 지경이니까요.”
“하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베네딕의 호들갑은 내가 한껏 짜증을 낸 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식당이라 불리는 티어 라 마스의 음식을 앞에 두고서도 내 자랑을 하느라 바빠 식기조차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저 맛있는 음식이 식는 게 너무 아까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우리 얼빵이랑 같이 올 걸.
그랬으면 얼빵이의 행복한 미소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요즘 들어서 이 파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들리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을 하고 있단다. 다른 곳에 가기만 하면 우리 딸에 대한 칭찬이 들려오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거 당신 눈치 보느라 칭찬만 하는 거거든요?
루시가 여태까지 벌여놓은 일들이 얼마인데 칭찬만할까.
…사실 지금은 그 악명 안에 내가 저지른 게 뒤섞여서 마냥 루시를 뭐라하기도 그렇긴 한데.
“음유시인이 올 때도 그렇다!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노래가 어찌나 감미로운지. 음유시인이 올 때마다 바깥에 나가다가 집사장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니까.”
으엑. 그 변태가 만든 노래가 그렇게 좋다고!?
음유시인들이 어느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부를 정도로?!
어지간하면 베네딕의 과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 변태사도의 예술 관련 능력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알려고 하진 말자.
무슨 노래가 퍼지고 있는 건지 알게 되면 자괴감에 몸부림치게 될 게 분명해.
“요즈음에는 던전학회의 학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단다. 네가 만든 던전에 대한 호평이 가득해서 그걸 볼 때마다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거든!”
그거 봤구나.
하긴 남성귀족들 사이에서는 던전학회의 학지를 살피는 게 일과 비스무리한 거니까 확인 못 할 리가 없지.
내가 만든 던전이 얼마나 많은 극찬을 듣고 있는 지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베네딕은 그 던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했을까?
겉으로 보기엔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이 덩치가 던전의 기믹을 스스로 돌파했을까?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 우리 딸아이가 만든 던전을 이 파파가 공략하지 않을 리 있나!”
베네딕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길 했지만 난 그 이야기를 쉬이 믿지 못했다.
이 인간처럼 사기적인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기믹을 공략하는 데 서투를 수밖에 없거든.
뛰어난 육신이 있는데 왜 머리를 쓰겠냐고. 그냥 다 때려 부수면 알아서 던전이 굴복할 텐데.
“제일 좋았던 것은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믿게 만든 부분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읽었어.”
근데 베네딕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자니 진짜 이 사람이 던전을 공략했단 사실을 믿게 되더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단순히 해설집을 읽어봤다 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신체능력이 압도적인데 머리를 쓰는 것까지 잘하다니 뭐 이런 사기캐가 다 있어. 완전 밸런스 붕괴잖아!
<앞서 이야기한 것이다만 그 말은 너한테까지 해당되는 내용이다.>
‘전 머리 안 좋거든요!’
내가 머리가 좋았으면 시험을 치를 때마다 다이스 갓한테 기도를 했겠냐고!
<…참. 이렇게까지 기사다울 필요는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비꼬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 할배에게 짜증을 내려던 순간 베네딕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아. 참. 루시. 안 그래도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부탁이요?’
“부탁? 바보바보 아버님이 나한테?”
“그래. 아카데미로 향하면 네가 만든 던전을 체험할 수 있다던데. 이 파파도 한 번 들어가볼 수 있을까?”
*
던전학의 기말고사 시험장은 시험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북적거림을 만드는 인원들이 달라졌다는 거겠지.
한창 시험이 진행 중일 때는 이 곳에 학생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내 던전을 체험하러 온 사람들이 잔뜩이니까.
덕분에 조교들이 해야 할 일거리도 여전히 잔뜩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고 해야하려나.
응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카데미의 학생에서 권력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잖아.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서 어디에 가고 싶다고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평범한 사람이겠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비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목이 날아가게 될 걸.
그래서일까. 손님을 응대하는 조교들의 얼굴은 몰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꼴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이 끝났다면서 눈물 흘리던 사람들인데 불쌍해라.
근데 뭐 어떡하겠냐.
네가 선택한 대학원이다!
노예가 되기로 했으면 수명까지 걸어라!
“알른 백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오. 몰드 자작. 오랜만입니다. 제 딸아이가 만든 던전을 공략하러 오셨습니까?”
“예! 학지에서 그 던전을 보고 나니 가슴이 뛰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요!”
“허허. 그리 좋아해주시니 저도 기쁩니다. 호? 러비 백작! 전쟁이 끝난 후 영지에서 휴양하신다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이렇게 휴양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조교들을 보면서 동정을 하는 동안 베네딕은 시험장의 귀족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었다.
파트란 축제 때의 진중한 모습이 아니라 옛 친우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보면 저 사람들은 따로 연이 있는 사람들인 걸까?
베네딕을 중심으로 반가움을 표하던 사람들은 그 옆에 있던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예쁘다느니 재능이 뛰어나다느니 소문을 자주 들었다니 뭐니하며 웃음을 짓던 이들이었지만 정작 내게서 여러 매도가 담긴 답가를 받은 순간에는 표정관리가 안 되더라.
물론 옆에 있는 베네딕의 눈치를 본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알른 백께서도 던전을 체험해보러 오신 겁니까?”
“예. 딸아이가 만든 곳이니만큼 직접 공략을 해보려 합니다.”
“이야. 알른 백이라면 분명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실 수 있겠지요.”
“알른의 기록을 알른이 갱신한다라. 낭만이 넘치는 군요.”
“기록이요?”
“예. 저길 보시죠.”
귀족 중 하나가 가리킨 것은 던전의 스피드런 기록이었다.
“던전이 외부인에게 개방된 후 많은 이들이 알른 영애의 기록에 도전했지만 그 누구도 저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한 것처럼 아카데미 던전에 도전하는 귀족들은 하나 같이 내 기록을 뛰어 넘으려 들었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세운 기록을 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면서 말이다.
허나 그 도전자들은 머잖아 기록의 벽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수한 인원이 도전을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2등의 기록이 나와 1분 차이가 날 지경이니. 개방 초기의 기록이 어땠을지는 설명할 필요 없으리라.
그 과정에서 저 기록이 말이 되느냐 소리를 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만 내가 스피드런을 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남아 있어서 순식간에 진압됐다.
“이야. 따라잡을 엄두도 안 나더군요.”
“저것은 알른 영애만이 세울 수 있는 기록입니다.”
“계속 도전을 해보곤 있지만 그 때마다 대단함만이 느껴지더군요.”
베네딕의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은 저마다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나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신체적으로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도 말이지.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스피드런의 답지를 그대로 보여줬는데 왜 그걸 따라하질 못하지?
이 사람들이 그거 흉내만 내면 나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 내에 공략할 수 있을 텐데?
<여아야. 보통의 사람은 말이다. 던전 내의 변수는 0.1초 단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잘못됐다는 거에요! 기록 갱신을 하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죠!’
스피드 런은 장난이 아냐!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면서 나한테 대단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봐야 전혀 안 기쁘다고!
오히려 자칭 전문가들이 내 속을 긁어서 짜증만 날 뿐이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헛소리에 매도가 튀어나올 듯 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으려니 베네딕이 웃음소리를 냈다.
“으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해봐야겠군요.”
그리 이야기를 한 베네딕이 던전의 안으로 들어간 후.
나는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귀족들에게서 벗어나 조교에게로 달려갔다.
베네딕이 던전을 공략하는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지켜보기 위해서.
궁금하잖아.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난 강자인 베네딕이 내 던전을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가.
조교에게 빼앗듯 수정구를 가로 챈 나는 훈련장에 서 있는 베네딕의 모습을 보곤 눈을 끔뻑였다.
…엑?
왜 벌써 첫 번째 방이야?
방금 전에 들어갔는데 어느새 복도를 넘어선 거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속도에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베네딕이 자신의 팔을 뒤로 끌어 당겼다.
‘조금 치사한 짓을 해볼까!’
그리고 나서 그가 앞으로 주먹을 내지른 순간.
훈련장에 서 있던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나자빠졌고.
자연스레 다음 방으로 넘어가는 문이 열렸다.
‘저기요. 할아버지.’
<응?>
‘저걸 보고도 저나 아버님이나라는 말이 나와요?’
저게 어떻게 나랑 같은 인간이냐고! 말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