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4
미쳤다라는 단어는 용법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한다.
칭찬. 감탄. 허탈함. 분노. 모욕 등.
어떤 경우에 쓰더라도 크게 위화감이 없는 것이 바로 미쳤다는 단어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래의 미쳤다는 단어에 가장 적절한 것이 바로 1왕비 카바디 솔라딘이라는 인간이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올곧음.
스스로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신념.
거기에 더해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그녀는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던 진짜 중의 진짜였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한 후회가 자신이 벌인 악행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그걸 찾아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후회이며.
그와 동시에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 주게 되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죽는 인간이라니.
차라리 얼빠여우나 변태사도는 미쳤어도 인간적으로 미쳐서 이해라도 되지.
이 중세 트럼프는 사고방식 자체가 아예 달라서 도저히 공감을 할 수가 없더라.
커뮤니티의 누군가는 이것을 가지고 신념 있는 악당이라 좋다 그랬지만 난 아니었다.
몸에 피가 흐르기는 할까 싶은 인간을 어떻게 좋아하냐고.
이러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카바디 솔라딘이란 여자가 솔라딘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사람이란 것에는 모두가 공감했고,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 중세 트럼프. 메이크 솔라딘 그레이트 어게인 왕비다.
아서가 내 친구인 이상, 그리고 내가 솔라딘의 귀족인 이상 언젠가 이 미친년을 만나야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일러!
그 미친년을 상대하기엔 아직 내가 지닌 힘이 모자란다고!
으아악.
그 중세 트럼프랑 만나면 메스가키 스킬이 어떤 소리를 지껄일까.
여태까지의 전력으로 보아서는 미쳤다는 표현은 무조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런 매도를 1왕비에게 퍼부었다가는.
…아니 잠시만.
오히려 아예 돌아버린 그 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자기 자신의 명예니 권력이니 하는 것은 상관없이 솔라딘만을 생각하는 그 미치광이라면 모욕을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 같은데?
물론 그 모욕의 대상이 되도 않은 사람이라면 조져버리겠지만 훗날 솔라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이라면?
그래. 도저히 상종하고 싶지 않은 미친년이긴 하지만 어설프게 돌아버린 것보단 아예 홱 돌아버린 게 나아.
2왕비처럼 은혜는 갚을 수도 있고 안 갚을 수도 있지만 원수는 반드시 조져버리는 인간한테 노괴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ㅂ…
‘시네르 솔라딘.’
어라?
이 노괴의 이름이 왜 1왕비의 이름 아래에 바로 적혀 있는 걸까?
방금 전에 노괴의 이름을 떠올리는 바람에 환상을 보고 있는 거려나?
그렇다면 마른 세수를 하고 나서 다시 보면.
‘시네르 솔라딘.’
갸아아악?!
뭔데!
이 인간은 또 왜 있는 건데!
“…카리아.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맨 위에 두 왕비님의 이름이 보이는 듯 하다만.”
“맞아. 둘 다 참여의사를 표명했거든.”
“왜?”
그래! 베네딕 말 잘했다!
자기 아들한테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인간이 왜 종강 파티에 와?!
나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을 하는 내내 이 인간이 아카데미에 발을 디디는 꼴을 본 적이 없다고!
“1왕비가 참여했잖아.”
카리아는 나와 베네딕의 눈빛을 앞에 두고서도 태연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분명 그거 때문일 거야. 2왕비 그 사람 만날 1왕비 따위 별 거 아니라 그러지만 사실 엄청 신경 쓰거든.”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카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이 사람이 예전에 왕국의 그림자로 활동했단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카리아는 두 사람이 막 왕비가 되었을 무렵에 정보부를 이끌던 사람이니까. 1왕비나 2왕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지.
어쩌면 왕궁의 인물 대부분에 한해선 나보다 카리아가 더 잘 알지도 몰라.
난 게임에서 비중이 적었던 사람들에 관해선 아는 게 없다시피하니까.
“하여튼 이 두 사람이 참여를 표명하는 바람에 이번 종강파티는 본래의 취지에서 한참은 탈선해 버렸어. 두 세력의 귀족들이 각자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줄이어서 참가를 표명해버렸거든.”
카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여자 목록을 읽던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파트란 공작하고 쿠르텐 공작이 참여할 건 알고 있었어. 자기 자식들이 여기에 있으니까.
근데 왜 다른 공작 가문들의 가주들도 여기에 오는 건데?!
요양 중인 버로우 공작을 제외하면 전원이 참석하게 됐잖아!
그리고 그 아래에도 왜 이렇게 거물이 많아!
소울 아카데미 스토리에 한 번쯤은 비중 있게 등장한 귀족들이 차고 넘치다니!
나는 게임을 하며 자주 보았던 여러 이름들의 등장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의 앞에서 연설을 하고 이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즐겨야 한단 사실에 절망했다.
…파트란 축제 때 정도라면 그럭저럭 버틸 만 해.
그 땐 몇몇 유별난 사람이나 내 친구들 말고는 나한테 관심을 안 가졌으니까.
근데 지금은 아냐! 나를 끌어들이고자 하던 2왕비가 나한테 말을 안 걸 리가 없잖아!
그럼 2왕비 측 귀족들도 자연스레 다가올 거고.
그럼 1왕비 쪽 사람들도 따라 붙을 거고.
그렇게 내 주변은 핫플레이스이자 온갖 매도가 터져 나오는 평판의 무덤이 되겠지.
그리고 그 옆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베네딕의 위장을 묻어야 할 테고.
이런 감상도 베네딕은 마찬가지인지 방금 전까지 싱글벙글하던 베네딕의 얼굴은 종이를 넘기면 넘길수록 심각하게 바뀌어갔다.
“…카리아. 혹시 나를 기절시켜줄 수 있겠나? 그를 핑계로 나와 루시가 자연스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뭔 헛소리냐. 너한테 통하는 독이 어디 있어. 그런 거라면 차라리 고용주님한테.”
“그건 안 된다! 우리 루시에게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그럼 어쩌라고.”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파티가 벌어질 건물을 부숴야겠어!”
“야. 일단 좀 진정하고.”
“적당히 반 정도만 부숴버리면!…”
“고용주님. 이 멍청이 좀 닥치게 만들어 봐. 내 말은 들리지도 않나 봐.”
“파파?♡ 입 좀 닫아 줄래요?♡ 말을 하실 때마다 퀘퀘한 냄새가 나서♡ 솔직히 좀 극혐♡”
“냄…냄새나니? 그랬니? 미안하구나…”
어깨를 축 늘어트렸음에도 여전히 거대한 베네딕을 무시한 채 카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용주님에겐 그 파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야. 그러니까 시작 연설할 때까지 어디 방에 숨어 있다가 시작 연설 끝마치면 베네딕이랑 같이 사라져. 어차피 이 덩치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왕국에 없으니까 문제 안 될 거야. 대충 딸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다 이해하겠지.”
왕비 두 사람과 그들의 세력들이 참가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막 나가도 괜찮은 건가 싶긴 했지만 카리아가 제안하는 거니까 별 문제 없을 거다.
그럼 난 연설을 어떻게 수월하게 넘길지만 고민하면 되겠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 고갤 돌리자 알새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영애.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오셨습니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그 변태라면 아침 일찍부터 와서는 온갖 개소리로 내 표정을 일그러트릴 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가봐도 돼. 고용주님. 이 덩치랑 따로 할 이야기도 있으니 나중에 그쪽으로 보낼게.”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리아가 내가 하려 했던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으음. 이 생각이 읽히는 느낌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가끔 훅하고 들어올 때면 은근히 섬뜩한 느낌이 들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옆에 시무룩해 있는 베네딕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파파♡”
원래는 어깨를 건드리려고 했는데 팔을 쭉 뻗어도 거기까질 닿지 않아서 등을 찔렀다.
그러자 베네딕이 고개를 돌린다.
하이고. 이 인간. 입 꾹 닫고 있는 것 봐.
방금 전에 냄새 난다는 말 신경 쓰고 있는 거야?
“푸흫♡ 삐졌어요?♡ 뭐라 그래서 시무룩해진 거에요?♡”
“그. 그게.”
“흐응♡ 농담 한 번 한 걸로 이렇게 꿍해계시다니♡ 저 이런 소심한 파파는 별론데~♡”
“…농담이었니? 정말로?!”
말 한 마디에 화색을 되찾은 베네딕을 미묘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나는 말없이 문 바깥으로 나가서는 얼굴만을 빼꼼 내밀고.
“비~밀♡”
마지막 말을 전한 후 문을 닫아버렸다.
부디 그 변태 사도가 자신의 변태성을 아낌없이 발휘해야 할 텐데.
그래야 무난히 연설을 넘길 수 있을 거 아냐.
*
“…우리 딸 너무 귀여워. 최고.”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부들부들 떠는 베네딕을 보던 카리아는 한심하다는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예전에 전장을 돌아다닐 때에는 공포로 군림했던 인간이 어쩌다 이 꼴이 됐을까.
지금의 베네딕이라면 미라 옆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겠다.
예전에 무뚝뚝했던 이 녀석은 직선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던 미라랑 극과 극이었는데 말야.
내가 없는 동안 미라가 많이 노력을 했던 거겠지.
…근데 미라. 너 너무 많이 노력을 한 게 아닐까?
왕국의 송곳니라고 불리던 사람을 이 꼴로 만들다니.
네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 방법을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야.
그녀가 악신에게 홀린 사이 죽어버린 베네딕의 아내를 떠올리던 카리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베네딕.”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평소 루시나 제자를 상대할 때 내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과거 왕국의 그림자로써 수많은 이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던 이의 목소리.
그것을 마주한 베네딕은 긴 숨과 함께 방금 전의 호들갑을 떨치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말해라.”
“1왕비 그 미친년하고 네 딸을 절대로 만나게 하지 마.”
과거 왕국의 그림자로써 정보부를 이끌었던 카리아는 1왕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기 전 선별을 위한 정보를 수집한 것이 그녀였고, 왕궁에서 자체적으로 증발하기 전까지 1왕비 아래에서 일했던 것이 그녀이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그 미친년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미래가 유망한 루시를 꽤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럼 괜찮은 것 아닌가?”
“물론 당장은 괜찮지. 그렇지만 훗날 그 능력이 방해가 된다 여겨졌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져. 그 미친년은 기꺼이 방해물을 치우려 들 테니까.”
“근거는?”
“내가 치워질 뻔 했거든.”
“…뭐?”
“내가 이야기 안 해줬던가? 내가 정보부에서 증발하듯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래.”
“그럼 지금 설명해줄게. 그 때 내겐 방법이 없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소리 소문 없이 파묻힐 게 뻔했으니까.”
카리아가 무덤덤하게 내뱉은 이야기에 베네딕의 눈빛이 한층 더 험악하게 바뀐다.
“그 년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위험한 인간이야.”
*
소울 아카데미의 학장실.
최근 아카데미 던전이 극찬을 받아 웃음을 입에 달고 다니던 학장이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 새겨진 것은 식은땀과 억지로 끌어올린 어색한 미소였다.
“…저어. 그러니까 던전의 체험을 하고 싶으시단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학장. 소란은 걱정 마세요. 보시다시피 만약의 일을 대비해 아들과 함께 변장을 하고 왔거든요.”
소울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학장도 싱글거리며 웃는 왕국의 1왕비 앞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