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5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학장의 모습에 르네는 속으로 죄송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1왕자이자 유력 왕위계승자라는 지위를 지닌 르네지만 그도 이전에는 소울 아카데미의 학생 중 하나였으니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학장을 곤란케 했단 사실이 유쾌하긴 어려웠다.
허나 그렇다 하여 르네가 이 곤경을 없애줄 순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그가 아닌 그의 어머니였으니까.
오늘 아침. 아카데미 종강 파티로 향하기 전에 미리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끝마치려 하던 르네는 카바디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다.
종강 파티가 시작되는 것은 저녁 무렵이니 최소한 오후가 되고 나서야 출발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1왕비님. 호위도 동행할 이들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네. 맞아요. 그치만 문제없어요. 저희 둘이 따로 움직일 생각이니까.’
‘…예?’
카바디는 르네의 되물음에 답하는 대신 박수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정보부의 사람들이 변장 도구를 들고서 들어왔다.
‘저희가 대놓고 움직이면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는 분들에게 민폐가 되니까요. 몰래 움직여야죠.’
자신의 판단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말에 르네는 지금 학장이 그러는 것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을 던졌다.
“저. 1왕비님. 왕국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분께서 호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학장. 뭘 걱정하시나요. 저와 르네가 함께 있는데 저희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베네딕 경이 미쳐서 날뛰는 정도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카바디의 말에 학장도 르네도 차마 고개를 젓지 못했다.
왕국의 제 1왕비가 되기 전 수도 기사단의 최고 전력 중 하나였던 그녀를 해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애초에 제가 힘을 쓸 일이나 있겠어요? 저는 소울 아카데미가 지닌 능력을 믿는답니다.”
너희는 미연에 사고를 예방할 자신도 없는 것이냐는 완곡한 표현에 학장은 편히 즐기시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위 귀족 중 하나이자 소울 아카데미의 학장이 될 만큼 뛰어난 학자인 그도 왕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을이었으니까.
“제가 이 곳에 재학하던 것도 수십 년 전인데 이 곳은 여전하네요.”
“그렇습니까?”
“네. 저 건물도. 저 동상도. 그리고 저어기에 있는 학자들의 감옥도.”
좋은 곳이며 좋아야 하는 곳이라는 부연설명을 덧붙이던 카바디는 광장을 지나치는 여자아이 하나를 발견하고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눈으로 쫓았다.
걸을 때마다 흩날리는 붉은 색 머리카락.
장난기가 가득한 눈매.
태양 아래에서도 빛을 발하는 새하얀 피부.
자그마한 몸 곳곳에서 묻어나는 여성스러움.
그 여자아이는 어딜 가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독점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카바디가 관심을 가진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외면이 아닌 내면.
아카데미의 학생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육신과 비교할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며 강대한 신성이었다.
“저 아이 알른 가의 영애 맞죠?”
“…예? 아. 예. 그럴 겁니다.”
물음에 답하는 르네의 말엔 확신이 없었다.
과거 파트란 축제에서 마주했던 루시 알른과 지금의 루시 알른은 한없이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싶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축제가 끝나고 몇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변화했을 줄이야.
단순히 아름다울 뿐이던 인형이 어찌 생기를 지니게 되었단 말인가.
…예술 교단의 사도가 극찬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래를 만든 데엔 이유가 있었군.
“실제로 보니 더 놀랍네요. 예전에 그 이와 저를 모욕하던 그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에요.”
“알른 가문의 피를 지닌 이라는 거겠죠.”
“아카데미의 1학년이 저 정도라.”
눈으로 그믐달을 만들어낸 카바디는 루시 알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 지켜보다가 한층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체험장 쪽으로 향했다.
던전의 체험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곳에 얼굴을 들이밀며 인맥과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부터 어지간해선 자기 영지 바깥으로 나오질 않는 이들까지.
르네가 그들을 구경하며 이번 던전이 대단하긴 했다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카바디는 한층 더 입가에 웃음을 더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인 르네와 카바디는 느긋하게 던전을 나아갔다.
이 곳에서는 무엇이 재밌었는지.
그리고 또 여기에서는 어떤 것이 좋았는지.
왕위를 계승하기에 부족함이 없단 평가를 듣는 르네와 왕비가 되기 전부터 여태까지 수도 없이 많은 던전을 돌아다녔던 카바디의 대화는 루시가 들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자그마한 막힘도 없이 나아가던 두 사람이 발을 멈춘 것은 0층으로 향하는 복도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네 번째 방에 도착하자마자 카바디에 의해 목이 날아간 르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잘렸던 부분을 매만지면서 몸을 일으켰다.
마법이 발현되어 있군. 소리를 차단하는 종류야.
본래 던전에 설치된 것은 아니고 왕비님의 솜씨인가.
“르네.”
“예. 왕비님.”
“알른 영애와의 약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르네는 차마 그 말을 농담이라 단언하지 못했다.
성격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루시 알른은 결격 사유랄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성격적인 부분의 문제가 너무 커서 그렇지.
르네가 1왕비께서 고집을 부리면 어찌해야 하나 고민 할 때에 카바디가 웃음을 흘렸다.
“표정을 보아 진짜 싫은가보네요. 농담이에요. 알른 영애는 왕비가 되기엔 너무 문제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그치만 수중에 담아두어야 할 인재는 맞아요.”
“…”
“동시에 주의를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
르네를 일으켜 세워 준 그녀는 느긋이 자신의 마법을 매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할 일이 늘었네요.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따로 준비해야 할 것도 생겼고 생각할 것도 많아졌고.”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돼요. 이건 제가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라서.”
그걸로 이야기를 끝마친 카바디는 자신의 마법을 거두며 홀로 복도를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던전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살짝 느릿해져 있었다.
*
– 띠링.
“알른 영애. 혹시 제가 무언가 실수를 했습니까?”
갑작스레 날아든 알림음에 놀라 움찔거렸더니 내 머리를 매만지던 변태사도가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네 역겨운 손놀림이 소름끼쳐서 그랬어. 신경 쓰지 마. 네가 토나올 것 같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하하. 이것 참. 조심하겠습니다.”
변태사도가 계속 손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후 메시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패널티가 끝났을 때도 잠잠하더니 왜 이제와서 창을 띄우는 거야?
아무 반응도 없길래 방학이 되고 나서 뭔가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잠깐. 생각해보면 허접주신이 이렇게 뜬금없이 퀘스트를 내어줄 때는 뭔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닌가?
아드리 때도 그렇고. 페이비 때도 그렇고.
또 뭔가 일이 생긴 거야?!
[새로운 퀘스트가 지급됩니다.]
[어쩌라고. 난 예쁘잖아.]
[당신이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선보이십시오!]
[보상 : 용사의 혼에 대한 단서]
퀘스트의 내용을 읽은 나는 푸른 창 너머로 보이는 거울 속 눈이 짜게 식은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했더니 그냥 주책 부리고 싶은 거였냐.
우리 사도가 이렇게 귀엽고 예뻐요!
라고 자랑하고 싶은 거였냐고. 제에발 주신다운 위엄 좀 가져주라.
섬기는 신이 그럴 듯 해야 사도로 살 보람이 있잖아.
지금 내 뒤에 있는 변태사도를 봐. 이 녀석은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고.
왠 줄 알아?
변태 까마귀가 인간 기준으로도 글러먹은 녀석인 것과는 별개로 자기를 믿는 사람한테는 그럴 듯한 모습을 보여 주니까!
주신이라는 녀석이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보다 못하면 어쩌자는 거냐!
그리고 말야. 퀘스트 조건 너무 애매하지 않아?
고귀한 사람이란 걸 선보이라니 대체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막말로 이거 그냥 네가 실패했다고 판단 내리면 바로 벌칙을 내릴 수 있는…
어라? 왜 실패 시에 받을 벌칙이 없지?
뭔가 오류가 생긴 건가?
아닌데. 퀘스트 창이나 로그 기능으로 확인해봐도 패널티가 안 보여.
이게 뭐지? 허접 주신이 이런 적이 없는데?
진짜 위험해 보이는 것이건 장난스러워 보이는 것이건 뭐든 패널티를 집어넣었던 녀석이 왜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넣은 거야?
허접 주신의 호의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난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새겨진 허접주신이라는 녀석은 결코 대가 없는 호의를 내밀 존재가 아니니까.
허접한 상상을 해보자면 ‘우리 사도를 보고 고귀하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어!’라는 주책이려나.
아님 퀘스트를 실패한 후에 뒤통수를 치려고 무언갈 남겨놨다거나.
이번에 패널티 줬던 걸 보면 허접 주신이 마냥 날 괴롭히려고 하는 건 아닐 텐데.
아아. 모르겠다.
됐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해봐도 답 안 나오는 건 넘기고 보상이나 보자.
용사의 혼이라면 새 기능이지?
분명 보상으로 받았지만 뭔지 몰라서 확인조차 못 해 본 그거 말야.
온갖 방식으로 검증을 해봤는데도 답이 안 나와서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하고 넘겨버렸는데 그거에 대한 단서를 준다고?
참 빨리도 준다고 해야 할까. 이제라도 줘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까.
내가 독실한 신자였다면 후자를 택했을 텐데 난 페이비가 아니라서.
“영애.”
다소 들떠 있는 변태 사도의 목소리에 공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눈짓으로 말을 듣고 있음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여신의 축복을 전하고자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까마귀 여신의 축복이라면 대부분 매력 수치와 관계된 거였지? 그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지금 난 매력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상황이니까.
‘좋아요. 부탁드릴게요.’
“맘대로 해. 그 까마귀가 안 그래도 예쁜 나를 더 예쁘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엑. 허접 주신을 부를 땐 그대로 꼬박꼬박 주신이라고 부르더니 까마귀 여신은 여신 취급도 안 해주는 거야?!
본의 아니게 변태 사도 앞에서 그가 모시는 신을 모욕해버린 난 거울을 통해 변태사도의 표정을 살폈다.
완전 굳었네. 너도 이건 수습하기 어려웠나봐.
“…그.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너무 불경스러운 발언이라 아예 못 들은 척 하려는 거야?
그래도 돼?
너네 여신이 불경하다면서 화 안 내니?
그 변태 까마귀 엄청난 기분파일 텐데?
혹시 축복인 척 하면서 이상한 천벌 내리는 거 아니지?
속 좁은 까마귀의 축복을 받아야 한단 사실이 불안해졌지만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변태사도가 기도를 시작해 버렸다.
하아아. 괜찮을 거야. 아마도.
걔가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설마 주신의 사도한테 이상한 짓을 하겠어?
“여신이시여.”
변태사도를 기점으로 주변에 퍼져나가는 신성을 살핀다.
나나 페이비의 신성이 지닌 태양의 따스함이 아니라 봄의 상쾌함을 품은 그 신성은 내 주변으로 다가와 피부를 간지럽혔다.
신성을 다루는 데에 익숙해진 덕분일까. 난 그 신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방 눈치 챘다.
들어오게 길을 열어달란 거지?
이상한 짓 하지 마라.
헛짓거리하면 불태워 버릴 거야.
몸 안에 흐르는 신성 사이에 길을 열어주자 그 곳을 기점으로 까마귀 여신의 신성이 흘러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고서 신성의 상쾌함이 몸 안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까마귀라니! 애칭 고마워! 마음속에 기억해둘게! 너무너무너무 예쁜 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새겨진 신성이 자신의 뜻을 발현하는 그 순간 뇌리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설마.
톡톡 튀면서도 선명하고 해맑아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그 목소리의 정체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까마귀라고 부른 녀석은 하나 뿐인 걸.
…아르마디님.
본 받으라고 한 거 취소하겠습니다.
그냥 지금 그대로 있어 주세요.
저 변태 까마귀보다는 당신이 나은.
낫나? 낫겠지?
나을 거야.
응.
나아야 해.
철퍼덕하는 소리에 눈을 뜬 나는 또 행복사를 해버린 변태사도를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가 어디 한 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이쯤 되면 내성이 생길 법도 하지 않냐? 뭐 딱히 달라진 것도 없구만.
거울 속에 비치는 건 그냥 나잖아.
‘할아버지. 뭐 달라진 거 있어요?’
변화를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할배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인간은 또 왜 내 말을 씹는 거야.
이래서야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잖아.
똑똑.
“루시 알른. 들어가도 괜찮나? 파티 시작 전에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오. 아서. 마침 잘 왔어.
지금 내 모습을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말야.
‘들어오세요.’
“들어와도 괜찮긴 한데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허접쑥맥인 불쌍왕자님은 버티기 어려울 테니까.”
“그건 또 무슨 헛소…”
문을 열다 말고 동상이 되어 버린 아서를 본 순간 난 대놓고 한숨을 내뱉었다.
얘한테도 평가를 듣긴 글렀네.
이 동네 남자들은 왜 하나 같이 이렇게 허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