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헤일로를 쓴 남자가 염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폐허가 된 서대문구 위로 태양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새벽의 여명은 마치 긴 밤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끝났네.’
동쪽 하늘에 나타난 희미한 빛줄기는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었고, 부서진 도시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폐해진 거리는 이제 낯선 풍경화로 변모했다.
뒤틀린 철골 구조물들은 마치 거대한 조각품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고, 깨진 유리창들은 새벽빛에 반사되어 별처럼 반짝였다.
점점 더 밝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번화했던 거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간판과 부서진 도로 표지판.
바람에 날려 춤을 추는 먼지 입자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실종된 황금 사신을 찾아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자, 파괴된 시설들 사이에서 유독 멀쩡하게 남아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다.
실종된 황금 돼지 사신을 쫓아갈 때 발견했던 바로 그 벤치였다.
나는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고 그 벤치에 앉아 이제는 향이 다 날아가 버린 커피잔을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황금 사신들이 보였다.
황금 망토 사신이 기절한 듯 보이는 황금 뿔 사신을 번쩍 들고 뚜방뚜방 다가오는 중이었다.
황금 뿔 사신을 들고서도 가뿐하게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를 넘어오고 있었다.
황금 망토 사신은 장작 돼지인 대신, 다른 황금 사신보다 힘이 강한 게 특징인 건가?
다른 황금 사신들은 돌멩이를 옮길 때도 조그맣게 토막 내서 옮기곤 했으니, 꽤 큰 차이였다.
그렇게 조그마한 녀석이 씩씩하게 부스러진 콘크리트를 넘어오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달라진 점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망토만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신발하고 장갑이 생겼네?’
황금 망토 사신은 튼튼해 보이는 장화와 장갑을 쓰고 있었다.
그 장화와 장갑의 디자인이 꽤 근사해 보여서, 전신 갑옷이었다면 뺏어 입어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조금 아쉽네.’
물론 미니 사신 사이즈의 갑옷을 입을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황금 망토 사신이 내 무릎 위에 도착하자, 나는 기절한 황금 뿔 사신을 손에 들고 그 매력적인 뿔을 장난스럽게 꾹꾹 눌러보았다.
이상하게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뿔이었다.
히히.
그렇게 황금 뿔 사신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더니, 잊힌 기억이 천천히 다가와서 나에게 속삭였다.
[소용돌이 하얀 아귀 구이.]
그 단어가 마치 정신 오염처럼 내 뇌리에 떠오르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무릎 위의 황금 사신 두 마리를 손에 든 채, 미니 사신 정원으로 순간 이동해 버렸다.
그러자 공간 이동으로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나를 찍고 있던 드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태양 밑으로 드러난 폐허의 모습을 찍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회색 사신은 순간 이동으로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황금 뿔 사신과 황금 망토 사신을 바닥에 버려두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 버렸다.
그렇게 황금 뿔 사신과 황금 망토 사신은 바닥으로 무참히 떨어져 내렸다.
황금 망토 사신은 다른 황금 사신들처럼 고양이 같이 공중에서 자세를 잡으려고 했지만,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하고 통통한 뱃살부터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물론 기절한 황금 뿔 사신도 무참히 바닥에 널브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날 수 없어….’
갑옷이 전부 재생되지 않아서 그런지, 황금 망토 사신은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상태였다.
황금 망토 사신은 황금 뿔 사신을 제대로 눕혀주고는 애착 인간을 찾아 뚜방뚜방 떠나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어딘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황금 뿔 사신은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앗! 눈을 떴어!’
‘오랜만이야!’
‘오랜만!’
그러자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눈을 반짝이는 수많은 황금 사신이었다.
황금 사신들은 정말 반갑다는 감정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황금 뿔 사신이 눈을 뜬 것을 깨닫자마자 황금 사신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오더니, 우르르 달려들었다.
거대한 황금 사신 고치!
말랑한 뺨과 뺨을 비비고, 조그마한 팔다리가 사방에서 뻗어왔다.
‘으앙!’
‘움직일 수가 없어!’
‘앗, 또 누가 물었어!’
그렇게 황금 사신식 환영회가 끝나자, 가장 오래된 소수의 황금 사신만이 남아서 같이 뒹굴뒹굴하기 시작했다.
겨우 하루도 버티지 못할 만큼 수명이 짧던 시절의 황금 사신들이었다.
‘틈새 연구소에서 지내고 있어!’
‘???’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의 근황을 알려주기도 했고.
‘빙수 설원이야.’
‘새하얘!’
서로 손을 맞잡고 새롭게 생긴 미니 사신 정원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미니 사신 정원을 잔뜩 돌아다니던 황금 사신들은 설원에 자리를 잡고, 설탕 과일을 야금야금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옴뇸뇸.
황금 뿔 사신은 처음 보는 맛에 눈동자를 크게 뜨고, 과일을 마구마구 뜯어 먹었다.
그렇게 황금 뿔 사신이 간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한 황금 사신이 뚜방뚜방 다가와서는 뿔을 깨물어버렸다.
오물오물.
그러자 황금 뿔 사신은 간지럽다는 것처럼 히히 웃으며, 자신을 깨문 황금 사신을 올려다보았다.
말랑한 이빨과 말랑한 뿔의 만남이었다.
그러자 다른 황금 사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달려들었다.
‘나도!’
‘나도 물어볼래!’
그렇게 황금 사신들이 히히 웃으며 설원을 뒹굴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주황 왕관 사신이 그 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세희 연구소, 연구원 사무실.
헬멧 연구원은 점심시간이 되자,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돌려보자, 점심시간으로 어수선한 세희 연구소 사무실은 어딘가 조금 들뜬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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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희 연구소 사무실은 언제나 그렇기는 했지만, 오늘이 유독 심한 느낌이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서대문구 사건 때문이겠지?’
어제 있었던 대규모 오브젝트 사고는 두 가지 이유로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는 제임스 연구소가 발표한 특급 오브젝트 경보와 대피 권고, 그리고 대피가 전부 이뤄지자마자 발생한 도시 붕괴였다.
제임스 연구소 덕분에 재산 손실은 있었어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는 오브젝트 사건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제임스 연구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만들어 주는 사례였다.
헬멧 연구원은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두 번째는 오랜만에 제대로 촬영된 회색 사신의 전투 장면이라는 점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처절하고, 치열했던 전투 장면.
헬멧 연구원이 생각하기에 이번에 회색 사신의 인기가 상당히 오를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황금 사신의 인기를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헬멧 연구원이 고개를 내려보니, 황금 사신이 보고서 위에 대자로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앗!’
그렇게 누워있던 황금 사신은 연구원의 시선을 느끼자, 팔다리를 휘적휘적 흔들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보고서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하면 안 돼!’
‘쉬는 시간이야!’
점심시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한 뒤로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헬멧 연구원은 작게 웃으며 황금 사신을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회색 사신이 황금 사신의 인기를 이기기는 힘들겠지?’
헬멧 연구원은 히히, 하고 웃는 황금 사신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황금 사신용 푸딩을 챙겨서 휴게실에 도착하자, 커다란 TV 화면에서 회색 사신의 전투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회색 사신이 어딘가 어색한 동작으로 주먹을 뻗는 장면이었다.
헬멧 연구원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황금 사신은 TV 화면을 보자마자, 탁자 위로 점프를 하더니 TV 화면의 회색 사신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황금 엄마 펀치!’
황금 사신은 어딘가 어정쩡한 자세로 흐느적거리는 주먹을 날렸다.
흐느적. 흐느적.
표정은 정말 회색 사신을 좋아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자세는 회색 사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뭐, 회색 사신이 자신을 따라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몇몇 황금 사신이 회색 사신에게 따라 하는 것을 들켰다가, 탁구공처럼 통통해져 버렸으니까 말이다.
헬멧 연구원은 갑자기 장난기가 동해서, 휴게실의 입구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저기 회색 사신이 있다!”
‘앗!’
황금 사신은 깜짝 놀라서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입구 쪽을 바라봤지만,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였어!’
황금 사신은 살짝 화가 난 것처럼 달려들어서, 헬멧 연구원의 볼에 뚜시뚜시를 날렸다.
헬멧 연구원은 말랑한 펀치를 맞으며, 작게 웃었다.
***
헤일로의 남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
꿈속의 남자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쾅!
꿈속의 남자는 여러 가지 연금술 장비가 놓인 탁자 위를 강하게 내리치며, 분노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어째서!]
남자는 그 과거의 모습을 연극 보듯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가, 이것이 시작이었나.’
바로 이 기억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와 계속 부딪치게 된 시작점이었다.
[최후의 연금술사는 나다.]
[마도서 따위가 수석 연금술사라니.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꿈속의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로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꿈속 남자와 달리, 패배한 회색 격류 속의 남자는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곧 사라져 버릴 아카데미에서 붙이는 칭호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이 이후로 계속 엇나가기 시작했었지.’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자, 단단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꿈이 무너져 내리며 격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자의 의식도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내 마지막이로군.”
남자는 의식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의식이 흩어지기 직전, 남자는 염원의 격류 속에서 칠흑처럼 새카만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진화액처럼 까맣고, 완벽하게 둥근 형태를 유지하는 무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