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8
난 처음 무대에 올라설 때까지만 해도 내 계획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을 했다.
혼이 나가버린 사람들의 눈동자는 내가 바라던 그 자체였으니 빠르게 할 말을 끝마치고 무대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무대 중앙에 서서 첫 입을 뗀 순간 나는 내 계획이 허술했음을 깨달았다.
혼란과 당혹과 짜증이 서린 그 눈동자들은 분명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에 걸려든 자들의 눈이었으니까.
모두에게 경이를 선사할 만큼의 외모도 메스가키 스킬의 압도적인 성능 앞에서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내가 세웠던 계획의 대전제가 박살나버린 순간 다른 모든 발악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슨 말을 내뱉더라도 제멋대로 번역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만드는 상황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악신조차도 감히 저항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도발 능력을 무시한 잘못.
그리고 상황이 잘못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은 잘못.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조이가 날 저런 눈으로 바라볼 일도 없었을 텐데.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체념을 해버린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은 파트란 공작의 웃음소리였다.
불만 어린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터트린 그는 대귀족다운 존재감으로 회장을 지배했다.
그 솜씨는 도저히 답이 없다던 할배마저도 놀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으니 내게로 집중되어있던 모든 시선이 파트란 공작의 얼굴로 향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진짜 그걸 지켜보면서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차오르던지!
여태까지 허술 공작이라고 불러서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안허술 공작이라고 부를게요!
공작께서 대귀족의 위엄을 지닌 분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릴게요!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어떤 식으로 번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알른 영애.’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상황이 마무리되기 직전 파트란 공작은 겉으로 엄격한 말을 하며 텔레파시로는 다른 말을 전했다.
‘이번에 내가 자네를 도와준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딸의 의향을 들어준 것 뿐일세. 그러니 감사를 전하려면 우리 딸에게 하게나.’
딸을 잘 부탁하겠다는 그 말에 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저는 조이를 소중히 여길 거랍니다.
최애캐니 뭐니 하는 것 이전에 조이는 제 가장 가까운 친구인걸요.
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목숨을 내걸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회장에서 빠져나온 나는 파티 때문에 한산해진 건물을 빠져 나와 나무 아래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다신 무대 같은 데 안 설 거에요.’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냥 무대를 부수고 말지.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안 할 거야. 이런 경험은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해.
<그래. 나도 이번에는 살짝 아찔했다. 너의 능력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까요.’
파트란 공작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대체 상황이 어디까지 악화되었을는지.
진짜 상상하기도 싫다.
<이제 어찌할 테냐.>
‘아버님을 기다려야죠.’
내가 저질러 놓은 게 있어서 베네딕이 쉽게 빠져나오진 못 할 거야.
수습을 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겠지.
그러니까 그 때까진 쉬고 있자.
베네딕이라면 어련히 내 기척을 찾아오겠지.
<기숙사로는 안 갈 게냐?>
‘할아버지. 지금 제 모습을 얼빠여우가 본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끔찍하군.>
‘그쵸?’
<그럼 어디로 갈 거냐.>
‘소울 아카데미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요.’
기숙사 대신 내가 택한 곳은 아카데미 한 가운데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통상적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이긴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진 않아.
수리도 해야 하고 보수도 해야 할 텐데 통로가 없을 리 있나.
게임 속에선 저 먼 지역에서 퀘스트를 클리어 하고 나서 열리는 곳이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니까.
어디 보자.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여기랑 여기를 누르면.
쿵!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탓에 먼지로 가득한 그 곳은 지금 같은 모습을 한 채 들어가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허나 난 망설이지 않았다.
까마귀 여신의 축복이 지속되는 한 먼지가 달라붙을 일도 꾸며 놓은 게 흐트러질 일도 없으니까.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단 생각에 계단을 세 칸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간 나는 금세 시계탑의 위쪽에 도착했다.
이 세계의 밤은 빠르다.
과학의 위치를 대신하는 마법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류층의 전유물.
평범한 삶을 구가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 때문에 해가 저물고 나면 이 세상에는 길고도 긴 꿈의 시간이 자리한다.
고요로 물든 하늘 아래에서 별님과 달님이 서로의 춤을 뽐내고.
품위 없는 관객인 구름이 그 풍경을 가리며 지나가고.
잠을 모르는 새가 울음소리를 내며 별님과 달님에게 극찬을 표하는 것을 가만 바라보던 나는 난간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방금 전의 풍경을 떠올렸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하던 곳에서 다른 눈을 지녔던 이들에 대해서.
다른 영애의 손을 떨치며 내게 다가오던 조이를.
식기를 가만 내린 채 주변을 노려보던 프레이를.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전하던 페이비를.
손에 힘을 주면서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던 베네딕을.
검을 차지도 않았으면서 검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손을 올려두던 칼을.
또 저런다는 듯 한심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비시를.
어찌 할 줄을 몰라하며 눈동자를 떨던 애버리를.
뒤편에서 저들끼리 투닥거리던 여러 교수들을.
이외에도 분노가 아닌 걱정으로 날 바라보던 여러 사람들을.
나의 잘못에도 날 먼저 생각해주던 이들을.
그들의 얼굴은 이 세상에 오고 나서 내가 보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능력 좋은 썅년이라는 내 평판이 굳건해 질 것임을 알면서도 맘편히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잘 모르는 놈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 알 바야? 그냥 내 주변 사람들만 날 좋게 생각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 띠링.
거 참 빠르시네요. 허접 주신님.
연설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알림을 보내시는 거에요?
[퀘스트 클리어!]
…퀘스트 클리어? 왜?
그 참상을 만들어냈는데 어떻게 퀘스트가 클리어 되는 거지?
아. 어쨌든 자기 사도가 예쁘다는 걸 보여줬으니 만족한다는 건가?
하아. 이걸 좋아해야 하나. 이딴 게 주신이냐면서 극혐이라고 해야 하나.
몰라.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보상이나 확인해보자.
[용사의 혼]
[1. 용사의 혼을 지닌 자는 다른 이들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2. ???]
…
아니이이이. 저기요. 허접 잡신님.
이런 애매모한 설명 말고 게임 툴팁처럼 상세한 걸 내놓으라고 몇 번을 말하냐!
사도가 이야기를 하면 좀 들어주라! 응?!
그 쪽에서 제멋대로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내가 여태까지 한 게 있는데 좀 양보해 줄만도 하잖아!
<여아야.>
‘뭔데요! 저 지금…’
<누군가가 여기로 오고 있다.>
네?
할배의 말을 듣고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자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나 여기로 올 때 문 안 닫고 왔나?
…맞네. 계단 오르느라 신나서 그걸 까먹었어.
어떡하지. 얼빵이의 친구가 돼서 그런가 나 진짜 점점 얼빵이를 닮아가나봐.
으으음.
뭐 괜찮겠지.
아직 파티가 끝나기에는 이른 시간이니까.
누가 오더라도 별 위기는 아닐 거야.
“…알른 영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올라 온 여성과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아래로 뛰어내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놀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여성은 솔라딘 왕국의 2왕비.
세나르 솔라딘이었으니까.
*
파트란 그 빌어먹을 자식. 굳이 아카데미의 일을 언급하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다니.
술기운을 핑계 삼아 파티회장에서 빠져나온 세나르는 텅 빈 광장을 걸으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나르는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을 부끄러운 추억이라 여겼다.
아직 그녀가 어리던 때.
지금처럼 감정을 감추고 귀족 다운 처신을 하던 것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공작 영애답게 살라는 가문의 압박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생각하던 치기 어린 날은 도저히 좋아할 래야 좋아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세나르. 또 패배한 게냐. 하아. 어쩌다 이런 아이가.’
“젠장.”
‘어머나. 베드퍼 영애. 참~ 아쉽네요. 조금만 더 잘하셨다면 이기셨을 텐데.’
“젠장.”
‘이런 식으로 해봐야 당신의 몸을 해칠 뿐입니다. 당신은 이것보다…’
“젠장.”
‘세나르. 사고를 치는 건 괜찮지만 나한테 폐가 되진 말아줄래? 너 때문에…’
“제엔장.”
‘아. 그렇군요. 세나르. 아니. 베드퍼 영애. 죄송합니다. 더 이상 당신께 폐가…’
“젠자아앙!”
콰앙! 건물의 벽을 강하게 후려친 세나르는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달랬다.
나도 알아. 이게 모두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이라는 것쯤은.
파트란 공작 그 개자식도 그렇게 생각해서 장난스레 말을 꺼냈을 걸 안다고!
그치만 어떡해! 모든 걸 알아도 악몽은 끝나지 않는단 말야!
지금의 나를 예전처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베드퍼의 노친네도 무슨 말을 할 때면 내 눈치를 봐.
예전에 그 재수없던 놈년들도 지금 내 앞에 서면 식은땀을 흘려.
빌어먹을 언니도 앞에선 날 꼬박꼬박 왕비님이라고 불러줘.
그러니까 아카데미의 악몽은 끝났어야 해.
더 이상 악몽이 내 그림자를 붙잡아선 안 된다고.
그런데 왜 난 아직도 거기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 거야!
분노 속에서 정처 없이 걸음을 움직이던 세나르가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 한 가운데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개새끼도 아니고 또 다시 여기에 오다니.
세나르는 자기 자신의 멍청함에 질린다는 생각을 하다가 훤히 드러난 시계탑의 입구를 보고서 눈을 끔뻑였다.
…왜 문이 열려 있는 거지?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모두 파티장에 있을 텐데?
설마.
세나르는 무의식중에 문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로 가득한 계단 탓에 더러워 질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려버린 그녀는 그저 이 계단의 끝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느릿하게 울려퍼지던 또각거리는 소리가.
이내 빠른 박자의 또각또각으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질적인 또각또각또각으로 변한 후에.
계단의 끝에 도착한 세나르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난간에 앉아있는 아이를 살폈다.
“하.”
그것은 그녀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
세나르가 찾던 사람은 저렇게 아름답지 않다.
손을 대는 게 두려울 정도로 가녀리지도 않다.
저런 장난스러운 미소도 짓지 않는다.
대체 왜 루시 알른이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다고 생각하자.
저 건방진 꼬맹이와 단 둘이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니까.
“안녕하신가요. 알른 영애.”
여느 때처럼 순식간에 왕비의 가면을 만들어 뒤집어 쓴 세나르는 자신을 가만 쳐다볼 뿐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루시를 보고 입술을 곱씹었다.
참자.
참자.
이 썅년은 지금 우리 세력에 중요한 패야.
바보 아들이 르네 솔라딘과 경쟁할 수 있게 하려면 반드시 이 꼬맹이를.
“…안녕하세요. 추잡한 노괴왕비님.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이 씨발년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