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위대한 영웅 루엘님의 활약은 역사 시험을 볼 때로 끝나지 않았다.
귀족이자 성기사로써 오랜 교육을 받은 그는 수학이나 국어 같은 과목에서도 뛰어난 지혜를 선보였다.
덕분에 나는 그 두 가지 시험을 볼 때까지 위대하신 루엘님의 은혜를 받아 시험이란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은혜는 미처 마법학이라는 학문에는 닿지 못했다.
성기사이신 루엘님은 신의 기적엔 익숙해도 인간의 기적에는 서툴렀던 것이다.
그래서 난 마법학에 한해선 루엘님을 대신 다이스 갓의 은혜를 믿기로 결정했다.
<이런 아이가 시험을 잘 치게 도와도 괜찮은 것인가.>
내가 펜을 굴리는 모습을 보고서 할배가 회의감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마법학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로막은 것은 던전학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칠 때는 할배의 도움도, 다이스 갓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난 그 누구보다도 소울 아카데미 속 던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을 온갖 기괴한 방법으로 클리어 해 본 나보다 던전을 잘 아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입학시험에 나오는 문제는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제들이었다.
<여아야. 그게 맞느냐? 내가 아는 지식과는 좀 많이 다르다만.>
‘이 백 년 전의 낡은 생각으로 평가하지 마세요! 이게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요!’
<요즘엔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가. 시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인지 내가 뒤처지는 것인지.>
머리에 든 지식을 바탕으로 가뿐히 문제를 푼 나는 시험지를 제출한 후에 시험장에서 빠져 나왔다.
바로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소울 아카데미의 식당은 귀족 자제들을 위해 준비된 곳답게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다만 그 음식들이 무료로 제공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식당은 귀족 자제들을 상대로 운영이 되는 곳이고 그들은 대개 금전적인 여유가 넘치는 이들. 이 식당의 가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평민 출신의 학생들은 다르다.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담보삼아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닌다 한들 그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돈 한 푼을 아껴 써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기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
만약 오늘 도시락을 싸들고 오지 않은 평민이 있다면 그 아이는 하루 종일 굶어야 하겠지.
식당 구석에 앉아서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풍경을 두 눈으로 살피던 난 다시금 메뉴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뭘 먹어볼까.
마음 같아선 맨 위에서 아래까지 다 주세요!를 외치고 싶지만 내 위장은 그리 크지 않다.
당장 어제 티어라 마스에서 식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마지막엔 배가 불러서 숨이 잘 안 쉬어질 지경이었는걸.
많이 먹어봐야 메뉴 하나가 한계일 것을 아는 나는 메뉴를 고르는 것에 신중했다.
<언제까지 고민하고 있을 생각이더냐.>
‘좀 기다려 봐요.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아무거나 집어 먹어라. 어차피 입안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않으냐.>
‘똑같긴 뭘 똑같아요! 안 똑같다고요!’
어린 송아지의 고기로 만든 부드러운 스테이크와 공간이동마법을 통해 산지에서 직송으로 배달된 연어로 만든 스테이크가 어떻게 같습니까!
둘의 이름은 똑같은 스테이크일지언정 육지와 바다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다고요!
<알았다. 알았어. 고민을 하건 말건 마음대로 하거라.>
‘안 그래도 그럴 거에요.’
<그런데 말이다. 저기 네 손님이 오는 듯 하다만?>
손님이요?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절 피하는데 누가 저한테 말을 걸러 와요?
할배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드니 내 쪽으로 걸어오는 조이가 보였다.
고고하면서도 우아한 그녀의 걸음걸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당겼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섣부르게 다가가 저 걸음을 방해했다간 저 날카로운 눈동자에 베일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알른 영애님.”
조이는 내 앞에 도착을 하자마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뭐지? 왜 여기에 온 거야?
어제 일에 관해서 이야길 하러 온 건가?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누르며 조이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시험은 잘 보셨나요?”
‘네. 그럭저럭요.’
“그걸 물어 볼 필요가 있나요? 얼빵영애님? 당연히 잘 쳤죠.”
아. 또 메스가키 스킬이 얼빵영애라고 해버렸다.
빌어먹을.
입을 바늘로 꿰메든가 해야지.
내 도발을 들은 조이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팔짱을 끼고는 한층 더 얼어붙은 목소리를 냈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그럼 당연히 저와의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으시겠네요?”
내기라면 얼빵영애라는 호칭에 대한 내기를 말하는 거겠지?
거기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냐는 물음이라면 난 고개를 저을 것이다.
조이는 분명 중요한 부분에서 넘어지고 마는 얼빵영애지만 기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험을 볼 때면 항상 전교 10위권 내에 드는 수재인데다 전투 능력도 소울 아카데미 캐릭터 중에 A~S급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나다.
지금 내 스펙이 스펙인지라 실기 성적은 약간 앞설 수 있겠지만 필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날 게 분명하니 그녀를 이기기란 지난한 일이겠지.
그런데 있잖아.
내기에서 졌다 한들 메스가키 스킬이 조이를 얼빵영애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줄까?
얘가 부탁을 한다고 얌전히 들어주는 애가 아닌데.
내가 무슨 호칭을 언급하건 간에 제멋대로 얼빵영애라고 부를 게 분명해.
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닌데 뭐.
될 대로 되라지.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가며 내기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이 내기는 저만 손해를 보는 구조더군요.”
어. 그렇죠? 난 잃을 게 없는 게 조이는 잃을 게 있으니까.
하지만 내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구조긴 하지만 그런 내기를 제시한 건 당신이잖습니까. 얼빵영애님.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그러니 당신도 내기에서 졌을 때 패널티를 받아줘야 겠어요.”
‘뭔가요?’
“뭐죠?”
“제가 내기에서 이기면 당신을 망나니 영애라고 부르겠어요!”
망나니 영애라.
루시한테 잘 어울리는 호칭이긴 하네.
근데 그 호칭은 이미 다들 암암리에 사용하고 있는 호칭 아닌가?
굳이 내기니 뭐니 하지 않아도 조이라면 면전에서 그렇게 불러도 될 텐데.
‘마음대로 하세요.’
“맘대로 하시죠. 얼빵영애님.”
내 입장에선 손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 이야기여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조이가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넘치시네요! 망나니 영애!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일 거에요!”
자기 할 말을 끝마치고서 고고하게 떠나가는 조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 할배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꺼냈다.
<축복이 저 아이를 얼빵영애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구나.>
‘그쵸?’
외모와 목소리라는 편견을 뛰어넘고 나면 이만큼 잘 어울리는 호칭도 없다니까.
*
삭사를 마치고 나니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실기시험을 칠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실기시험은 대련이었다.
이 시험은 아카데미에서 지정한 두 명의 지원자가 면접관들이 보는 앞에서 전투를 벌이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승리와 패배의 여부가 아니었다.
성장 환경이 천차만별인 이들을 승리와 패배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으니까.
대련에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강함이 아닌 시험자의 안에 깃들어 있는 재능이다.
소울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개화할 수 있을까.
아카데미의 면접관들은 그것만을 눈에 새긴다고 칼은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서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포셀을 비롯한 알른 가문의 기사단 전원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내가 아카데미의 면접관들에게 낮은 평가를 받을 리가 없잖아!
이제는 혼자서도 입을 수 있게 된 갑옷을 걸치고 난 후 루엘의 메이스를 본래의 크기로 되돌렸다.
마지막으로 방패를 집어든 나는 방에서 빠져 나와 대련장으로 향했다.
대련장에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내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면접관들이야 소울 아카데미 게임을 하면서 지겹도록 본 얼굴들인지라 아는 게 당연했고 대련의 상대 같은 경우에는 어제 주먹다툼을 하셨던 분인지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를 만나자마자 시비를 걸었던 이름 모를 영애.
그녀의 흰 피부에 멍자국이 남아있는 걸 보니 웃음이 샜다.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르게 하기 위해 서로 간에 악감정을 지닌 이들을 대련의 상대로 정한다더니 이런 식인 거야?
이름 모를 영애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입술을 굳히더니 무기를 쥔 손에다 힘을 넣었다.
사용하는 건 장검인가.
<검을 잡는 걸 보니 일 이년 정도 수련한 게 아닌 듯 하구나.>
‘그게 보여요?’
<보이지. 너도 나중에 경험을 쌓게 되면 자연스레 알게될 것이다.>
이런 부분에 한해서 할배의 말이 틀릴 리는 없으니 저 영애는 검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사람일 것이다.
그런 것치고 어제 주먹 다툼을 할 때 몸을 움직이는 게 허접했던 것 같은데.
검을 들면 뭔가가 좀 다르려나.
이글거리는 영애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나는 태연했다.
살아남기 위해 나를 죽이고자 했던 오크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눈빛인데 어떻게 겁을 먹겠나.
어제 호되게 당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으니 조금 도발을 해주면 바로 넘어오겠지.
이성을 잃어버린 상대만큼 가지고 놀기 좋은 상대도 없는데.
“두 분. 대련장 한 가운데로 와주십시오.”
대련장의 한 가운데에 선 면접관이 우리를 불렀다.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니 영애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것이 퍽이나 유쾌했던 나는 눈웃음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영애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본 면접관이 두 분을 제지하기 전까지 서로를 적이라 생각하고 싸우십시오. 이 대련 과정에서 겪는 상처는 모두 아카데미의 치유사가 치료를 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규칙을 알려주고 난 후 면접관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영애가 울분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알른 가의 쌍년님. 여기서 다시 뵐 줄은 몰랐네요.”
‘저도 다시 뵐 줄은 몰랐어요. 당신처럼 쉬운 상대를 만나게 되다니.’
“나도 마찬가지야. 대련의 상대로 이런 허접을 데려다 주다니. 면접관들은 보는 눈이 없는 걸까?”
“내가 쉽다고?”
‘어제 그렇게 당하고도 주제파악을 못하셨나요?’
“어제 그렇게 얻어맞았으면서 아직까지 주제 파악을 못한 거야? 지능마저도 개를 닮았네. 불쌍해라♡”
내 웃음소리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걸까.
영애가 무작정 장검을 휘둘렀다.
감정적이고 직선적인 그 공격은 알른 가문의 기사들이 휘두르던 것에 비해 너무도 뻔했다.
철벽 스킬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저 정도 공격은 내가 지닌 숙련도만으로 받아칠 수 있으니까.
영애가 무작정 휘두른 검이 내 방패와 부딪혀 튕겨났다.
자신의 힘에 휘둘러 주춤거리는 영애를 보고서 난 보란 듯 웃음을 지어 주었다.
‘허접.’
“허접♡ 그게 다야? 좀 더 잘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