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0
세나르의 도끼가 날아들고서 채 1분이 지나기 전에 난 파트란 공작이 왜 베드퍼 가문의 깃발을 언급했는지 이해했다.
세나르 이 인간은 귀중의 영애가 아냐.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많고도 많은 피를 자신의 무기에 묻혀본 사람이라고!
콰앙! 도끼의 날이 방패를 내리치는 충격을 이를 악물고서 받아낸다.
본래라면 여기에서 숨돌릴 틈이 주어져야 하지만 세나르를 상대로는 아니다.
그녀는 한 손에 들린 도끼로 압박을 주고 다른 손에 들린 도끼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내 팔을 노리고 도끼가 날아들고 있지 않나. 방패 너머로 그를 확인한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한 후 내 머리를 찍으려드는 공격을 옆으로 굴러 회피했다.
“도망 하나는 잘 치네. 명예를 모르는 꼬맹이다워.”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아이한테 무기를 휘두르는 건 명예로운 일인가요?♡ 추한 걸로 따지면 노괴왕비님께서 한 수 위인 것 같은데♡”
콰앙! 방패를 두드리는 충격에 밀려난 나는 낭떠러지 아래로 흘러내리는 돌조각들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떨어지더라도 다치진 않겠지만 내 자존심은 박살나버릴 거야.
그래선 곤란하지. 이기기 어려운 상대라도 한 방 정도는 먹여야 속이 풀릴 것 같거든.
방패를 다잡으면서 앞 쪽으로 시선을 되돌리자 광대마냥 자유자재로 도끼를 다루는 세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왕비보다는 도살자쪽이 어울리실 것 같은데♡ 여태까지 잘도 본성을 숨기셨네요?♡”
“그게 귀족들의 세상이란다. 꼬맹아. 너처럼 안 할 말만 하고 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목이 날아가거든.”
말의 틈새 사이에 던져진 도끼를 튕겨낸 순간 세나르가 발을 움직인다.
시선을 끌고 공격을 하겠단 생각인가?
내리쳐지는 도끼의 궤적을 보고 방패를 움직인 순간 경쾌한 울림이 전신을 타고 퍼졌다.
패링을 성공했기에 생겨난 여유 동안 반격을 시도해보려던 나였지만 분명히 비어 있어야 할 세나르의 손에 들린 도끼를 본 순간 다급히 방패를 움직여야만 했다.
콰앙! 방패 너머로 전해지는 충격에 이를 꽉 깨물었다.
그새 마력으로 다시 도끼를 짜낸 거야?!
도끼를 던진 게 시선을 끌려는 의도가 아니라 방심을 시키려는 생각이었던 거구나!
“필사적으로 방패를 움직이는 꼴이 참 귀엽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를 괴롭히는 노괴왕비님은 참 추하고요!♡”
낭떠러지를 뒤에 둔 채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세나르의 연격을 받아낸다.
세나르의 공격은 아예 버틸 수 없는 수준은 아니다.
켄트 백작의 검을 상대했을 때나 버로우 공작의 검을 맞댔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만한 영역이지.
그럼에도 내가 수세에 몰려 있는 이유는 실전의 경험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세나르는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굳건한 방패를 우회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올 수 있는지를.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무수히 많은 인간의 목을 직접 쳐 날리며.
승리의 깃발을 피로 물들이면서 몸에 배인 경험은 아직 아카데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어머나. 괜찮니?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대로 떨어질 텐데?”
허나 나를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조이가 골라 준 드레스 이곳저곳이 찢겨 나가고.
여러 상처가 새겨진 하얀 피부가 붉은 빛으로 물들고.
몸 이곳저곳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난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격전 속에서도 살아남아 진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떨어트릴 순 있고요?♡”
몸 안에 신성을 퍼트림과 동시에 상처를 회복한다.
오랜 시간에 걸려 아물어야 할 것이 단번에 사라짐에 따라 고통이 밀려오지만 입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여태까지 겪었던 것들에 비하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지.
“왕비 생활을 하면서 군살이 잔뜩 붙은 노괴왕비님의 허술한 도끼로는 불가능 할 텐데요?♡”
눈웃음을 지으며 방패 너머의 세나르를 살핀다.
방어를 거듭하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세나르라는 인간이 지닌 것들을 눈에 새기고 분석해 승리로 향하기 위한 길을 그렸다.
거짓된 영웅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영웅다웠던 해골을 만난 후로 정립된 나의 싸움법.
그 후로 몇 번의 실전을 거치며 완숙해진 나의 전투논리.
그것이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입을 열게 만들지 못한 이상 세나르는 이미 패배했다고.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여도 뼈밖에 없는 꼬맹이를 박살내는 건 쉬워.”
“그런가요?♡ 그런 것치고는 제가 너무 멀쩡한 것 같은데♡ 정말 쉬운 거 맞나요?♡ 제가 아는 쉽다랑 노괴왕비님이 아는 쉽다랑 많이 다른가 봐요?♡”
만약 세나르와 내가 허허벌판에서 만나 무기를 맞부딪혔다면.
서로의 지위와 관계없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면.
나는 세나르에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격차는 거대했으니까.
허나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빌어먹을 년이!”
문제의 근원은 세나르의 공세가 가진 위력이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도끼는 위협적이었지만 내 방어를 박살낼 정도로 강맹하진 못했다.
세나르가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께서 영웅에게 선사한 방패는 그 어떤 강적을 상대로도 빛을 잃지 아니했으니.
악신 아그라와의 전투에서도 제 형체를 유지한 이 방패를 어찌 인간이 부수겠는가.
“젠장!”
방패를 부술 수 없다면 방패 뒤에 숨겨진 이를 노려야 할 터이지만.
이 부분에서 세나르에게 제약이 존재했다.
그녀는 날 죽일 수 없다.
내게 치명적인 상처도 입힐 수 없다.
만일 그런 짓을 벌였다간 베네딕 알른이라는 괴물이 재앙이 되어 그녀를 찾아갈 게 뻔하니 그녀는 내 목을 앞에 두고서 도끼를 물려야 했다.
“젠자앙!”
자잘한 상처를 계속 내며 소모전을 할 수도 없다.
시간은 세나르의 편이 아니라 나의 편이니까.
파티가 끝나 수많은 귀족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에.
베네딕 알른이라는 괴물이 우리에서 풀려나기 전에.
시계탑 위에서 펼쳐지는 우리 둘만의 사교회가 모두에게 공개되기 전에.
세나르는 반드시 내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여러 정치적 이점을 포기하고 도끼를 뽑아든 의미가 없어져버리니까.
바라는 정보를 들을 수 없게 될 테니까.
“젠자아아앙!”
점차 세나르의 공격이 속도를 더하며 내 몸에 새겨지는 상처가 더 많아지지만 난 그 모든 고통을 무시했다.
피부에 새겨지는 자잘한 상처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방패를 놓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날 위협할 수 없다.
<루시! 뒤로 물!…>
라는 나의 판단이 무너져 내린 것은 분명 조급해한다 여겼던 세나르의 입가에 웃음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양 손의 도끼를 내던진 그녀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든다.
그 손에 새겨지는 것은 몇백년을 산 나무마저 잘라낼 수 있을 듯 거대한 양손도끼.
다급히 방패 위에 기적을 짜낸 나였지만 도끼의 위력을 완전히 줄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방어를 위한 자세가 흐트러짐과 동시에 세나르의 두 손이 또 다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다시금 생겨난 한 손 도끼가 내 방패의 옆면을 후려쳐 자세를 완벽히 붕괴시킨다.
둘의 사이를 가로막던 방패가 사라지고 세나르의 무감정한 눈이 날 내려다본다.
방어를 되돌리기엔 늦었다.
일단 메이스를 휘둘러서 틈을.
“크흡!”
만들겠다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도끼의 대가 내 복부를 후려치는 것이 빨랐다.
내장이 진탕이 되는 듯한 느낌에 비틀거리고 있으려니 머리를 향해 도끼의 뒷면이 날아들었다.
세상이 번쩍인다 싶더니 난 어느새 차가운 돌바닥 위에 널부러져 있었고,
방패는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데다가,
메이스를 쥔 손은 세나르의 하이힐에 짓밟혀 내게 고통만을 선사했다.
“진짜 더럽게 까다롭네. 아직 아카데미 2학년도 안 된 꼬맹이가 뭐 이리 노련한 거야?”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성을 끌어 모으려던 그 순간 날아든 도끼가 내 귀를 스치고 바닥에 박힌다.
“어디까지 상처 입혀도 되는 지 파악해뒀거든? 아픈 꼴 보기 싫으면 움직이지 마.”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내 패착을 이해했다.
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듯 세나르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방패를 두드리는 과정에서 내가 방패를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았고.
내게 여러 자잘한 상처를 내는 과정에서 내가 어디까지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즈음 스스로의 불리를 연출해 나를 안심시킨 후 한 번에 상황을 뒤집었다.
“안심해. 몇 가지 질문에만 제대로 대답해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
“내가 물어볼 게 뭔지 알지?”
억지로 만들어진 세나르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녀가 바라는 것을 모두 다 말해주면 그녀는 수긍할 것이다.
내게 미움을 사는 건 그렇다 치고 내가 1왕자 세력에 넘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 지 알 테니 이 이상의 보복을 하진 않겠지.
어쩌면 이 일을 트집 잡아서 세나르에게 갑질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알죠♡ 노괴왕비님의 바보 같은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묻어나는 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럼 대답해.”
“벌써 치매가 오셨나?♡ 저 이미 대답했잖아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난다니까요?♡”
그렇지만 난 그녀가 바라는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할배가 무어라 떠들건. 이성이 무어라 이야기하건 필요 없다. 난 어머니를 욕한 새끼가 웃는 꼴을 보기 싫어.
“하하. 정말 개같은 썅년이네.”
구두굽으로 손목을 걷어차 메이스를 놓게 만든 세나르는 내 명치 위에 힐을 슬쩍 올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끄아아아악!”
마력으로 강화된 힐이 간단히 신성을 박살내고 내 살갗을 파고 든다.
조금씩 조금씩.
땅을 파고 드는 공구처럼.
내 살에 구멍을 내서.
나의 장기와 공기가 서로 맞닿게 하려는 것처럼.
끝없는 고통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이어지다가 멈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린 곳에 익숙한 어깨에 보였다.
사람의 겉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인의 피가 섞였다는 확신을 들게 하던 거대한 어깨가.
“2왕비님.”
베네딕 알른.
대륙 최강을 논할 때 어김없이 나오는 이름이자 전장에서 공포로 군림했던 최강의 기사.
“아니. 세나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베네딕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제 딸을 해한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