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사신 정원, 나선의 끝.
황금 사신들의 의지를 듣고 찾아간 곳에는 끝없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장에서 내리쬐던 빛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작의 빛마저 탐욕스러운 어둠에 삼켜졌다.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을 감싸고 꿈틀거리는 암흑.
이곳은 왠지 미니 사신 정원이 아닌 것 같았다.
바닥에는 ‘염원’이 찰박찰박할 정도로 살짝 차올라 있었고, 그 회색빛 액체에서는 작은 물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찰박. 찰박.
미세하지만 분명한 물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서 어둠 속에 잠긴 희미한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아아.’
어둠 속 형상은 미니 사신들처럼 의지를 내뱉으며 비틀비틀, 마치 누군가가 인형의 줄을 엉성하게 조종하는 것처럼 흔들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소리와 심상치 않은 어둠, 그리고 좀비처럼 걸어오는 실루엣.
그야말로 공포 영화 속의 한 장면!
나는 이미 사라진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실루엣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염원에서 태어난 괴물?
아니면 옛 신과 관계된 녀석인가?
나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뀩’을 쏘아 보낼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 형상이 내 눈에서 나오는 빛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힘이 다한 것처럼 철퍼덕하고 쓰러져 버렸다.
엥?
찰박찰박 물을 헤치고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실루엣의 정체는 어딘가 녹아내린 것처럼 보이는 하얀 미니 사신이었다.
‘마아아….’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녀석은 내 쪽을 바라보려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의지를 흘렸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녀석이네.
원래 하얀색이 아니라, 염원에 의해서 탈색된 것 같았다.
나는 탈색 사신의 몸에 붙은 ‘염원’을 털어낸 뒤, 황금 사신들과 함께 나선의 외부를 향했다.
그리고 아직 나선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 황금 사신들까지 모두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선의 구멍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공간이고 위험하니까 막는 게 상책이겠지.
그래서 간단하게 ‘뀩’으로 입구를 공간째로 잘라내서 막아버렸다.
그리고 기절한 황금 사신들을 바닥에 늘어놓자, 다른 황금 사신들이 깜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
‘다쳤어!’
‘하얀색!’
군데군데 표백된 것처럼 하얀 얼룩이 붙은 황금 사신들을 보며 손도 대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장작을 밀어 넣으면 나으려나?’
진화액에도 멀쩡한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탈색되다니….
황금 사신의 색이 변하는 것은 처음 보는 증상이었다.
그래서 장작이 통할지 조금 걱정되었지만, 장작을 밀어 넣어 보니 순식간에 하얀 얼룩이 사라져 버렸다.
‘엄마 대단해!’
‘대단해!’
그 모습을 보자,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황금 사신들은 나를 올려다보며 만세 했다.
‘부활!’
‘살아났어!’
그리고 탈색이 치료된 녀석들은 누운 자세에서 바로 폴짝 뛰더니, 만세 하는 황금 사신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며 같이하기 시작했다.
장작을 조금 과하게 집어넣어서 그런 건지, 조금 전까지 쓰러진 녀석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활기차게 움직였다.
황금 사신들을 모두 치료하고 고개를 돌리자, 죽은 것처럼 쓰러진 탈색 사신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동생?’
‘죽은 거야?’
황금 사신들이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콕콕 찔렀지만, 탈색 사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황금 사신들 사이에 있는 탈색 사신을 손으로 들어 올려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텅 비어있네.’
탈색 사신은 다른 사신들과 달리, 그 내부에 아무것도 없었다.
물리적으로 텅텅 비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적인 의미로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원래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도 못할 것이 뻔했다.
녹아내린 것처럼 생긴 겉모습처럼, 염원의 격류에 휩쓸려서 이렇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탈색 사신은 죽어가고 있었다.
장작이 없으니까.
게다가 내부에 장작을 담을 곳이 없으니, 아마 장작을 밀어 넣어도 살아나지 못하겠지.
‘동생 죽는 거야?’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서 푸른 소녀 옆자리에 눕혀 놓을까 했더니, 어느새 황금 사신들이 내 발치에 모여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여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장작이라도 밀어 넣어 보자.’
그렇게 장작을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지만, 장작은 탈색 사신의 내부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흘러내리기만 했다.
역시 안 되나.
그렇게 포기하려는 순간.
화르륵.
장작이 탈색 사신에게 달라붙었다.
다른 미니 사신처럼 심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머리 위에 장작이 자리 잡았다.
탈색 사신은 어느새 내 손바닥 위에 일어서 있었다.
‘마아아.’
제대로 된 의지를 뿜어내지도 못하는지, 탈색 사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의지를 흘렸다.
그 의지를 듣자, 황금 사신들은 동생이 살아난 것이 마냥 기쁜지,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
송파구 인근, 제임스 타워.
제임스는 타워에 마련된 개인실에서 햇볕을 쬐며 쉬고 있었다.
그렇게 쉬면서 창문을 내다보니, 제임스는 송파구 인근이 완전히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귀 사태 이후로 완전히 황폐했던 이 주변은 이제, 새로 지은 건물들과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서 황금 사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황금 사신은 제임스의 발치에 앉아서 자기 몸통만 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크레파스가 너무 커서 제대로 그리기도 힘들 텐데 능숙한 동작으로 쓱싹쓱싹, 굉장히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뭘 그리고 있는 거지?’
제임스는 갑자기 호기심이 들어서, 황금 사신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
도화지 위에는 제임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회색 사신이 처참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고, 특이하게 생긴 황금 사신이 양손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내용은 엄마를 굉장히 좋아하는 황금 사신이 그렸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뭘 그린 거지?”
제임스는 그렇게 물으며, 황금 사신 소통 버튼을 내밀었다.
그러자 황금 사신은 크레파스를 번쩍 들어 올리며 의지를 내뿜었다.
‘요즘 유행하는 연극이야!’
‘노란 동생이 하루에 10번이나 하는 연극!’
‘재밌어!’
제임스는 그림이 뭔지 명확히 알아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수고를 들인 끝에 제임스는 황금 사신이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노란 사신이 만든 연극을 표현한 거로군.’
‘주인공은 뿔이 돋아나고, 갑옷을 입고, 장작 검을 든 황금 사신.’
‘적은 사악한 회색 사신.’
노란 사신이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금 사신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노란 사신이랑 회색 사신이 불화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회색 사신은 그냥 원래부터 이런 연극을 허용해 주는 건가?
제임스가 알게 된 사실을 간략하게 메모를 마치는 순간, 비서실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미국 오브젝트 협회, 아시아 지역 담당관이 찾아왔다는 연락이었다.
들여보내라고 하자, 상당히 나이 든 동양인 남성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임스. 정말 오랜만이야.”
“영감도 오랜만이야. 일본에서는 언제 돌아온 거지?”
한국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되었다며 가볍게 대꾸한 노인은 손님용으로 놓여있는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타더니, 한 모금 마셨다.
“이게 뭐야?”
능숙하게 커피를 타서 마시던 노인은 깜짝 놀라, 컵에서 입을 떼고 물었다.
“아, 설명이 늦었군. 이 방에 있는 커피는 전부 코코아야. 그것도 엄청나게 단 코코아.”
제임스는 작업하는 동안, 황금 사신이 전부 바꿔버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으음, 당뇨병에 걸릴 것 같은 맛이야.”
노인은 컵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손님용으로 비치된 간식들도 살펴봤지만, 전부 엄청나게 단 간식뿐이었다.
“이런 것만 먹어도 괜찮나?”
노인은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먹고 있는 제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건강 검진은 자주 받고 있지만, 별로 문제는 없었어.”
“체질인가. 부럽군.”
그렇게 말하는 노인은 굉장히 부러운 표정이었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USB 하나를 제임스에게 건네주었다.
“USB는 유럽 쪽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 데이터야.”
“사건 발생 자체는 굉장히 오래된 것 같아. 유럽 쪽에서 자기들끼리 해결하려고 정보를 숨기고 있었어.”
“이번에 한국에서 발생한 나비. 그거랑도 연관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라고 가져왔어.”
“자세한 건, USB를 확인해 봐.”
그렇게 제임스에게 USB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 노인은 남은 코코아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래, 한번 확인해 볼게.”
제임스의 대답을 듣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제임스의 방을 나섰다.
***
평온한 세희 연구소 안뜰에 황금 뿔이 돋아난 여자 한 명이 찾아왔다.
노란 탐정 사무소 소속의 후배 2호였다.
고풍스러운 지팡이 하나를 들고 나타난 후배 2호가 나타나자, 황금 뿔 사신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인간!!!’
황금 뿔 사신은 한동안 보지 못했던 애착 인간에게 달라붙어서 뺨을 비볐다.
그러고는 후배 2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후배 2호는 그런 황금 뿔 사신을 보며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틈새 연구소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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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
그러자 황금 뿔 사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후배 2호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황금 뿔 사신은 안뜰에 있는 미니 사신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가!’
‘금방 돌아와야 해!’
황금 사신들은 아쉬운지, 황금 뿔 사신과 서로 꼭 껴안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안뜰의 미니 사신들과 작별 인사를 한 황금 뿔 사신은 후배 2호의 품에 안겨서 손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안뜰의 미니 사신들도 ‘바이바이’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세희 연구소를 떠나가더니, 한적한 곳에서 지팡이로 지면을 두 번 두들겼다.
탁. 탁.
그러자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연구소를 닮은 길쭉한 복도.
그 양옆으로 쭈욱 늘어선 격리실.
후배 2호와 황금 뿔 사신은 어느새 틈새 연구소에 도착해 있었다.
뚜벅뚜벅.
복도를 따라서 걸어가자, 양옆으로 늘어선 격리실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격리실들은 전부 회색 사신이 뭔가를 하는 과거의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 끝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복도의 마지막 방 끝에서, 노란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후배 2호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