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3
교회의 일이라는 페이비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페이비를 데려가는 걸 포기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한창 교회가 바쁠 시기네. 곧 새해가 다가오니까.
새로운 년도가 시작되는 12월달은 주신 교회에 있어 중요한 행사들이 연달아 펼쳐지는 시기이니 주신 교회의 얼굴이라 여겨지는 페이비는 당연 성지에 머무르며 그 행사들에 모습을 비춰야 한다.
여름방학 때야 별 다른 일이 없으니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가만 페이비의 안에 깃든 신성을 살폈다.
얼마 전 주신의 신성을 품게 된 페이비는 금방 새로운 신성에 익숙해졌다.
이전에도 신성을 다루는 데에 있어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던 그녀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 거기에 요한의 도움이 더해지자 그녀는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주신의 신성을 다루는 법을 깨우쳤다.
지금도 겉으로 보기엔 페이비에게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나야 주신의 사도이기에 허접 주신의 신성이 지닌 따스함을 느끼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당장 페이비의 곁에 있는 조이나 아서도 페이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러니만큼 지금 페이비가 성지로 향한다 한들 그녀가 바뀌었음을 인지하는 이들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몇 안 되는 인간들이지.
그 변수들을 하나하나 머리에 새기던 나는 걱정을 내려놔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쓰레기라 불러 마땅한 놈들은 어차피 페이비의 변화를 짐작하지 못할 테고.
페이비 본인도 어느 정도 성장을 거둔데다가 옆에서 요한이 그녀를 지원해 줄 예정이기도 하니.
뭣보다 교황 그 녀석이 페이비의 변화를 마음에 들어 할 게 분명하거든.
교회에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그 놈이 페이비를 아낀다면 무슨 일이 생길 수가 없지.
…그래도 안전장치 하나 쯤은 있는 편이 나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얼굴이 벌개져선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페이비에게 반지 하나를 건넸다.
그녀는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갤 들었다.
“저. 영애님. 이건?”
‘선물인데요? 싫어요?’
“뭐야? 내가 준 선물은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시 가져.”
다시 가져가는 시늉을 하자 페이비가 다급히 반지를 손에 쥐었다.
“그. 그럴리가요! 단지 이 반지가 뭔지 궁금해서!”
‘연락용 반지에요.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거에요.’
“허접성녀는 친구를 닮아서 얼빵하잖아? 무슨 이상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싶어서 연락용 반지를 준 거야.”
예전에 경매장에 들렸을 때 구매한 자잘한 물건 중 하나다.
게임에서는 잡템에 불과했지만 현실에서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듯 해서 들고 있었지.
안에 든 마법진이 작은 만큼 수정구처럼 대화를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위험해질 것 같을 때 연락하는 용도로는 충분할 거야.
“영애님이 저를 걱정…”
내가 준 반지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움켜진 페이비는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그 어느 때보다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중히 하겠습니다!”
아니 딱히 소중히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럴 만큼 비싼 물건도 아니고.
“루시. 루시.”
너무도 좋아하는 페이비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워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프레이가 소매를 당겼다.
“나는?”
…너? 너는 왜?
“나 바보야. 사고 많이 쳐. 걱정해야 해.”
그러니까 페이비한테만 선물 주는 게 질투난다 그거지?
흐음. 지금 인벤토리에 프레이 생일 때 주려고 사둔 선물이 있긴 해.
그것 말고도 얘가 좋아할 법한 물건들도 들어있고.
그 중에서 적당한 거 하나 던져주면 해맑게 웃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냥 주면 재미없잖아?
‘그렇게 선물을 받고 싶어요?’
“뭐야. 바보 검사. 그렇게 선물을 받고 싶어? 푸하핳. 으음. 어떡할까. 고민 되네.”
“응! 나 꼭 받고 싶어.”
‘싫어요. 안 줄 거에요.’
“그치만 싫~어. 절대 안 줄 거야.”
“안 줘? 안 주는 거야?”
…어라? 얘 왜 눈가가 촉촉해지냐?
아니.
아니. 아니. 잠시만.
나 울릴 생각은 없었거든?
조금 장난만 칠 생각이었다고.
“훌쩍.”
아악! 조금만 기다려봐!
자. 프레이. 여기 선물이랍니다.
네 검 손잡이 쪽에 장식할 수 있는 물건이에요.
검을 휘두를 때 지장이 없을 거란 포셀의 조언도 있었으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랍니다.
“…선물.”
방금 전의 울먹임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지은 프레이는 내 선물을 가로채듯 가져가서는 자신의 검에 달아놓고는 히죽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하아아. 프레이를 놀리려고 그랬는데 오히려 놀아난 느낌이야.
좋아하니까 아무렴 어떤가 싶긴 하지만.
“조이. 왜 조용한 거지? 너라면 저 쪽에 끼어들 거라 생각했다만.”
“전 이미 한참 전에 선물을 받았거든요. 첫 친구의 여유라는 거죠.”
“…허. 그것 참.”
*
알른 영지.
솔라딘 왕국의 변경이자 스스로를 제국이라 칭하는 오만한 나라인 테르샤 제국과 맞닿은 곳 중 하나.
수십 년 전 테르샤 제국이 침략을 선언한 후 몇 년 동안이나 전쟁이 이어졌던 토지는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루시의 초대를 받아 알른 가문의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에 도착한 아서는 활기로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금 베네딕 알른을 향한 존경심을 새겼다.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그마한 불안조차 없이 웃을 수 있는 까닭은 분명 이 도시에 베네딕 경이 머무르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으로 전황을 바꾼 기사 중의 기사가 이 곳에 있기에 모두들 걱정을 잊고 있는 거야.
참으로 감격스럽군. 그 분의 가문에서 훈련을 받게 되다니.
과거 용을 상대로 맞서던 그 등을 봤을 때부터 한 시도 그 분을 향한 존경과 동경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검을 잡았던 것도 그 분의 뒤를 따르고자 함이었으니. 본인이 검을 쥐고 있는 이상 스스로 지닌 존경심은 조금도 쇠하지 않을 것이야.
…물론 그 분께서 루시 알른의 곁에 머무르실 때에 보였던 여러 모습은 속된 말로 상당히 추하긴 했다만.
좋게 해석을 한다면 그 또한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루시 알른의 옆에서 해맑게 웃었다가 울상을 지었다가 딸아이의 발치를 붙잡고 빌거나 하던 모습들을 되새기던 아서는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그 추하던 기억들을 잊으려 노력했다.
“으으으. 결국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군요.”
그러는 동안 그의 옆에 머무르던 조이는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루시의 계략에 휘말려 알른 기사단의 훈련에 참가하게 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처음에는 위로를 했지만 슬슬 진절머리가 나는 중인 아서는 축 늘어진 조이의 어깨를 보고 한 쪽 눈썹을 내렸다.
“이쯤 됐으면 포기하고 각오를 다져라. 이미 파트란 공작에게도 허락을 구하고 오는 길 아닌가.”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라고요.”
알른의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기로 한 세 사람은 꽤나 긴 외출을 허락 맡아야했다.
허울뿐인 왕자인 아서야 그렇다 쳐도 조이나 프레이는 각 가문에서 귀히 여겨지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떠나는 것이 어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조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었다.
저는 너무 하고 싶었지만 아버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라는 말을 하기를 바랐다.
허나 안타깝게도 파트란 공작은 알른 기사단에서 훈련을 하고 싶단 조이의 이야기에 감탄을 전할 뿐 만류를 하진 않았다.
‘그 지옥을 경험하고 오겠다니. 우리 딸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지옥. 파트란 공작이 질린다는 얼굴로 내뱉은 그 한 마디는 이전에 루시가 했던 여러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 누구처럼 기사를 동경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괜찮아. 파트란 영애. 힘든 만큼 강해질 거야.”
“켄트 영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그렇게까지 강해지고 싶지 않다니까요.”
“루시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고.”
“…으으으.”
프레이가 정론으로 조이의 불평을 일축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알른 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 높은 변경백의 저택치고는 소박하단 느낌이 드는 그 곳에서 세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해 준 것은 스스로를 알른 기사단의 단장이라 소개한 남자였다.
“포셀이라 합니다. 가주님께 은혜를 입어 지금의 자리를 얻은 운 좋은 남자지요.”
“…그 포셀 경인가? 전쟁 당시 단신으로 돌진해 적의 대열 한 가운데를 찢었다던?!”
“상대의 군대가 허술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과장되어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다른 두 사람이 질린다는 시선을 보내건 말건 들떠서 포셀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하던 아서가 진정한 후 세 사람은 포셀의 안내를 따라 베네딕을 만났다.
덩치에 비해 작지 않은가 싶은 책상에서 서류 더미를 처리하고 있던 그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번쩍였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파트란 영애! 켄트 영애! 그리고 3왕자님!”
딸아이에게 친우가 생길 줄 몰랐다며 울상이 된 베네딕의 모습에선 과거 왕국의 송곳니라 불리던 공포는 존재치 아니했다.
그럼에도 아서는 베네딕이 쇠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오랜 기간 단련하며 힘을 길렀기에 느낄 수 있다.
끝이 어딘지 모를 압도적인 강함을. 이런 자가 쇠했다니.
궁중의 멍청이들이 얼마나 바깥세상을 모르는 지 새삼 느껴지는 군.
아서가 베네딕을 향한 존경심을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베네딕은 유독 아서에게 차가웠다.
조이나 프레이에게는 살갑게 대하면서도 아서에게는 은근히 거리를 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아서는 그 태도가 무얼 의미하는 지 대충 짐작했다.
내가 루시 알른에게 관심이 있다 생각하는 걸 테지.
당장에라도 그렇지 않다 소리를 치고 싶다만 딸에게 한없이 무른 베네딕 경이라면 왜 딸을 안 좋아 하느냐며 되래 다그칠 것 같아 그러지 못하겠군.
하아아. 어쩌겠는가.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를 하자꾸나.
괜히 언급을 해봐야 귀찮아질 뿐이야.
“부디 이번 훈련 동안 많은 것을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서 빠져 나온 세 사람은 각자 훈련동안 사용할 방을 안내받은 후 환복을 하고 알른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나왔다.
“훈련장이 고요하군.”
기사는 물론이고 병사 하나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다니. 우리들이 올 것을 배려한 것인가?
아서의 의문에 대답을 해 준 것은 수레 하나를 끌고 온 포셀이었다.
“체력의 단련을 위해 영지를 도는 중입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잠시. 방금 전 그대가 말한 게 변경백령 전체를 돌고 있다는 소리인가?”
“하하. 설마요.”
“그렇지?”
“그러러면 며칠 동안 달리기만 해야 할 텐데 몸풀기로는 과하지요. 훈련 때는 가볍게 이 근방만 몇 바퀴 돌고 옵니다.”
“…뭐?”
지금의 말은 꼭 하려면 할 수 있다면 소리처럼 들린다만.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난 이야기에 아서가 굳어버린 동안 프레이와 조이가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어. 포셀 경. 알른 영애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다른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좀 있으면. 아. 저기에 오네요. 아가씨께선 후열에 계실 겁니다.”
포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서는 기사들의 대열을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째서 사람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진동하는 것이지?”
“무게를 증량시키는 마도구를 사용한 탓입니다. 다들 말 한 마리씩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생각하면 편합니다.”
“…그런데 저 속도라고?”
“하하. 본래는 더 빠릅니다. 지금은 다들 지쳐서 느려진 것이죠.”
여기는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되새기던 아서는 문득 기사들의 팔다리에 채워진 것과 방금 전 수레에 담겨온 것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셀 경.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만 수레에 담긴 것은.”
“맞습니다. 제대로 된 훈련 전에 몸을 풀어야 하니까요. 자. 받으시죠”
“…끕?!”
포셀이 내민 마도구를 받은 순간 아서는 생각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는 무게에 몸을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