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처럼 반짝이는 소녀가 좁은 방으로 들어섰다.
좁은 방의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동굴 천장과 발광체들이 마치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가짜 별들이 희미하게 창가를 밝히는 가운데,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소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마치 보석 같은 광택을 지닌 둥근 열매였다.
소녀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지…?”
열매라고 하기엔 흠집이나 열매꼭지도 없는 너무나도 완벽한 구형이었다.
마치 고급 장신구나 가구를 장식하는 구슬 같았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니 부드러운 탄력이 느껴졌고, 코를 가까이 대자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
달콤한 향기 때문인지, 은색 소녀는 침이 살짝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 이상한 구슬이 굉장히 맛있는 열매 같았다.
은색 소녀는 무의식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소녀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미니 새싹 사신이 행복한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마치 ‘곧, 열매를 먹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은색 소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열매를 올려놓았다.
당장이라도 입 속에 넣어서 먹고 싶었지만, 소녀가 계속해서 받아온 교육이 그것을 막아 세웠다.
‘정신 오염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열매에 매혹된 소녀는 차마 이 예쁜 열매를 ‘시설’에 신고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먹지만 않으면 되겠지. 괜찮을 거야.’
잠시 열매를 응시하던 은색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향하더니, 곧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미니 새싹 사신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힝. 바로 먹지는 않는 건가?’
미니 새싹 사신은 잠든 소녀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애착 인간이랑 눈을 마주하고 싶었는데….’
미니 새싹 사신은 애착 인간이 한시라도 빨리 열매를 먹게 돼서, 같이 소통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하 도시는 해로운 오브젝트로 가득한 정말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
새벽 5시 40분.
언제나처럼 똑같은 ‘시설’의 아침이었지만, 은색 소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꿈이 분명하다고 되뇌어도,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아침 식사 도중, 곧 ‘졸업’하는 사람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가 들린 뒤로는 더욱 그랬다.
은색 소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빨라졌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강렬했다.
꿈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반드시 먼저 졸업해야 해.”
은색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꿈이 너무 불길하고 불안하다면, 그 꿈을 현실로 만들지 않으면 될 뿐이었다.
‘성적 우수자가 되어서, 가장 빨리 졸업하면 돼’
하지만 그런 은색 소녀의 계획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설에서 어떤 아이가 졸업하게 되는지, 명확한 조건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체적으로 초능력이 강력하고 성적이 우수한 아이가 ‘졸업’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은색 소녀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
‘시설’의 아침 훈련 시간.
은색 소녀는 훈련복을 챙겨입고, 훈련장을 향했다.
그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는 시설 아이들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일찍 왔네!”
은색 소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갈색 소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그 모습 위로 도축되는 것처럼 내장을 쏟아내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응,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
은색 소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갈색 소녀는 그 표정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건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평소의 밝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 너 요즘 좀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은색 소녀는 친구에게 끔찍한 꿈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더 열심히 훈련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측정에서 은색 소녀의 기록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너무 무리한 능력 발동으로 뱃속에서 핏물이 올라왔지만, 은색 소녀는 억지로 그것을 다시 삼키며 훈련을 이어 나갔다.
적어도 다음 ‘졸업’ 발표 전까지는 이 페이스를 유지해야만 했다.
‘인간….’
미니 새싹 사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땀투성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려고 했지만, 영체인 새싹이의 손은 볼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은색 소녀는 언제나 최고의 성과를 보였고, 오브젝트 대응 훈련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이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개인실로 돌아온 뒤, 샤워하면서 피를 계속 토해냈다.
그리고 밤마다 은색 소녀는 같은 꿈을 꾸었다.
갈색 소녀가 졸업하는 꿈, 그리고 바로 그날 도축되어 버리는 악몽.
매일 아침 은색 소녀는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났고, 그때마다 더욱 강한 의지를 다졌다.
“나는… 반드시 먼저 졸업해야 해.”
수명이 깎여나가는 것만 같았지만, 은색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졸업 대상자 발표가 있었다.
은색 소녀는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띠고 명단을 확인했다.
‘몸이 한계에 가까웠는데,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명단을 확인한 순간,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명단에는 갈색 소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치 꿈에서 봤던 것처럼.
‘정말 꿈처럼 되어버렸어….’
은색 소녀는 마치 움직일 힘조차 없는 것처럼 명단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하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때 갈색 소녀가 기쁨에 들떠 은색 소녀에게 달려왔다.
“내가 졸업하게 됐어! 드디어 인류를 위해 싸울 수 있어!”
하지만 은색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갈색 소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갈색 소녀는 은색 소녀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곧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정말 열심히 했잖아? 너도 곧 졸업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하지만 은색 소녀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미니 새싹 사신도 애착 인간을 따라서 울며, 닿지 않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토닥였다.
***
이른 아침, 미니 사신 정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멜로 평원을 걷고 있었더니, 미니 사신 네트워크를 통해서 내게 연락이 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 건강해!’
‘문제없음.’
‘엄마!’
그것은 며칠 전 봤던 ‘태평양 주변에서 발생하는 정체불명의 안개 사건’을 본 뒤, 동해안과 일본에서 머무는 미니 사신 몇몇에게 시킨 아침 정시 보고였다.
그냥 히히 웃거나 그저 ‘엄마!’라고 외치는 녀석도 있었지만, 별문제는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이야기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귀찮아.’
‘엄청 귀찮아.’
‘보고 대상 미니 사신이 너무 많아….’
그것은 내가 견디기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매일매일 5분씩 보고를 듣고 누락된 미니 사신이 없는 것을 체크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중노동의 5분이 지나자, 나는 그대로 마시멜로 평원 위에 쓰러져 버렸다.
‘힘들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보고 임무를 주지 말아야겠어.’
그렇게 과거의 실수를 곱씹으며 바닥에 누워있었더니, 전보다 튼튼해진 탈색 사신이 팔다리를 휘적휘적하며 뭔가를 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춤을 추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격투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보다 몸을 못 가누네.
탈색 사신이 훈련하는 것을 보니, 왠지 마음속에 따뜻한 기분이 퍼져나갔다.
‘나보다 못하는 아이가 있어!’라는 안심감이었다.
히히.
그렇게 마음속으로 웃고 있었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뀨히히히히.
탈색 사신이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것을 어색하게 따라 하면서, 비웃는 하얀 아귀의 웃음소리였다.
탈색 사신은 훈련에 열중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가장 약한 막내를 주변에서 지켜보던 미니 사신들은 달랐다.
‘나쁜 아귀!’
마시멜로 언덕 뒤에 숨어 있던 미니 사신들이 일제히 솟아 나오자, 하얀 아귀는 혼비백산해서 마구 도망가기 시작했다.
마치 매머드를 사냥하는 것처럼 물로 만든 창이 하늘을 날았고, 갑자기 나타난 덩굴이 하얀 아귀를 붙들었다.
그런 공격에 하얀 아귀가 비틀거리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유령 사신이 마무리 지었다.
‘나이프다!!!!!!’
그리고 미니 사신들은 하얀 아귀에게 달려들어 마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뀨힝힝.
‘마아아?’
그때, 탈색 사신이 하얀 아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와서 궁금증을 표했다.
그 물음에 미니 사신들의 대답은 하나였다.
‘나쁜 아귀!’
그 대답을 듣고 탈색 사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터덜터덜 걸어서, 아귀를 베개 삼아 누워버렸다.
그렇게 미니 사신들이 탈색 사신을 생각보다 잘 챙겨주는 걸 보다 보니, 갑자기 떠오른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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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이 스며 나오던 ‘나선의 끝’이었다.
‘생각난 김에 내가 막아둔 곳을 한번 살펴봐야겠어.’
그렇게 나는 회색빛 액체, 염원이 가득한 ‘나선의 끝’을 향했다.
***
새벽 5시 40분.
은색 소녀는 어김없이 똑같은 꿈을 꾸고 동일한 시간에 눈을 떠버렸다.
“하아.”
소녀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지쳐 보였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은색 소녀는 미니 새싹 사신의 열매를 손에 꼭 쥐고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열매를 손에 꼭 쥐고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조금 치워낸 소녀는 아침 준비를 마치고, 천천히 방문을 향해 다가섰다.
“후우.”
그리고 숨을 크게 내쉬고, 씩씩하게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형광등 하나가 깨져서 조금 어두워진 복도와 음식이 타는 것 같은 불쾌한 냄새였다.
하아. 하아.
소녀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호흡 곤란이 온 것처럼 숨을 마구 몰아쉬었다.
“마… 말도 안 돼.”
소녀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