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4
아서 일행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포셀이 아예 상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단 것이다.
기사단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이들을 가르쳐 보았던 그는 세 사람을 살피는 것만으로 각자의 수준을 짐작하고 마도구의 무게를 조정했다.
짊어지는 순간 억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그렇다고 달릴 수 없을 정도는 아닐 만큼.
“알른 기사단의 훈련이 처음이시니만큼 우선은 몸을 적응시키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일단 근육부터 풀어볼까요?”
“…마도구를 찬 채로?”
“예. 마도구를 찬 채로.”
포셀이 시키는 스트레칭은 평소 그들이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입에서는 시종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이러는 게 맞는가?
근육을 풀기는커녕 근육에 부하만을 가하고 있는 듯 한데.
“푸하핳.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이 꼴이야?”
방금 전까지 달리다 온 듯 땀으로 범벅이 된 루시는 세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며 배를 부여잡았다.
이제 막 발을 들였을 뿐인데 그 정도냐면서. 그래서 끝까지 버틸 수가 있겠냐며.
“못 버티겠으면 미리 말해. 지금이라도 추하고 더러운 허접이 될 기회를 줄 테니까.”
아서는 키득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힘들다는 이유로 여기에서 도망쳐봐라. 그랬다가 나중에 루시 알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
저 녀석에게 입을 놀릴 명분을 줄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지.
아서의 이런 다짐은 달리기가 이어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에? 벌써 지친 거야? 아직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허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허접허접일 줄은. 풉. 완전 한심해.”
분명 방금 전까지 달리다 왔을 터인데 루시는 휴식을 취하는 대신 세 사람의 달리기에 합류해선 시도 때도 없이 목소리를 냈다.
“시끄럽다.”
달리기 초반에만 하더라도 아서는 거기에 토를 달만한 여유가 있었다.
몸이 무거워졌다한들 평상시에 죽어라 단련한 육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 버겁지만 충분히 할 만 하다 여겼지.
허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평상시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몸은 빠르게 피로를 쌓아나갔다.
“불쌍왕자님. 처음에 있던 여유는 어디로 사라지셨나요? 이제 자기가 허접하단 걸 인정하게 되셨나요?”
“…큽!”
젠장. 루시 알른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거지?
분명 방금 전까지 기사들과 함께 달리고 우리에게 합류한 것일 텐데 어찌 이리 힘이 넘칠 수 있단 말이냐!
아. 설마 녀석이 낀 마도구는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여유를.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보이네요. 체력조루인 불쌍왕자님.”
루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마도구를 벗어 아서에게 내밀었다.
“진짜일 때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확인해보셔도 돼요. 뭐 허접한 불쌍왕자님께 그럴 용기는 없을 테지만.”
가벼운 도발에 넘어가 마도구를 받은 아서는 무게중심이 흐트러져 앞으로 구르고 말았다.
이 마도구는 진짜다.
그 뿐일까. 우리가 착용하고 있는 것보다 더 무거워.
이런 것을 차고 우리보다 더 오래 달리고 있는데도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다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다 손에 들린 마도구를 빼앗긴 아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루시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루시 알른 이 녀석은 도대체.
“바보 포셀. 불쌍왕자님께서 지금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재미가 없다는데?”
“하하. 발전의 의지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강제로 발전 의지가 넘치는 학생이 된 아서는 달리기가 끝났을 즈음 다리를 움직일 기력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건 다른 두 사람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체능력이 뛰어나단 죄로 다른 기사들처럼 말 한 마리를 지게 된 프레이는 숨을 헐떡이느라 말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나마 비교적 적은 무게를 짊어졌던 조이가 멀쩡한 축에 속했지만 그녀도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함께 달렸던 사람들 중에 멀쩡한 이는 단 둘.
평소 이런 훈련을 거듭해왔던 포셀과 루시 뿐이었다.
“아가씨의 친우 분들답게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계시군요. 첫 날인데 끝까지 달리는 데 성공하시다니. 점심 후에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을 때가 기대됩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에요?!”
본격적인 훈련이라는 단어에 놀란 조이가 퍼뜩 일어나며 목소리를 드높이자 루시의 입꼬리에 진득한 미소가 새겨졌다.
“얼빵아. 바보인 거 티 적당히 내. 앞에 말하지 않았어? 몸풀기라고?”
“이게 몸풀기.”
반쯤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후 식당을 찾은 이들은 그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를 만나게 되었다.
“자칼.”
버로우 가문의 둘째 공자이자 지금은 유일한 자식이 된 자칼 버로우가 기사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처박고 살기 위해 음식을 입에 넣던 자칼은 아서의 목소리를 듣고 느릿하게 고갤 들었다.
“3왕자님.”
“오랜만이군. 여기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칼과 안면은 있으나 그리 친하다보긴 어려운 조이와 프레이가 루시와 함께 떠나간 후 아서는 자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가문에서 버로우 공작을 보필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이미 정정해지셨습니다. 정확히는 병환 이전보다 더 정정해졌다 하는 편이 맞겠군요.”
“허.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 그래서 자네는 왜 여기에?”
“사정이 복잡해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강해지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그 말을 하는 자칼의 표정에서 아서는 그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눈치 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칼의 눈에는 표독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지만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로 올라가야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다급함에 헛발을 디디던 그는 항시 주변에 독을 내뿜어 대는 사람이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혹을 떨쳐낸 자칼은 표독스러워지기 전의 성정을 되찾은 채였다.
“그 또한 잘 된 일이구나.”
아서는 그의 표정을 보고 호기심을 품었지만 속을 파고드는 대신 수저를 집어 들었다.
“저어. 3왕자님께서는 어찌 이 곳에 이 곳에 오셨습니까?”
“그대가 여기에 온 것과 동일한 이유다. 강해지기 위해서.”
“그렇다면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는 여기만한 지옥이 없으니까요.”
어미를 끄는 자칼의 모습에 아서가 한 쪽 눈썹을 내렸다.
“자칼 자네. 여기에 며칠이나 있었지?”
“제 삶에서 가장 긴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게 무슨.”
“왕자님께서도 머잖아 이해하실 겁니다. 그 어떤 날보다 긴 하루를 보내게 될 테니까요.”
자칼의 말이 옳았다는 게 밝혀지는 데엔 오후 단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전과 달리 기사들 사이에 끼어 움직이게 된 그는 루시가 경악스러운 훈련표를 건네주면서 배려를 입에 담았는지를 알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 살면 그걸 배려라 생각할 법도 하.
채앵!
“빌어먹을! 숨 쉴 틈 좀 다오!”
“하하! 충분히 배려하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 배려를 더 늘려라!”
“거절하겠습니다! 그래선 훈련이 안 되니까요! 저길 보십시오! 켄트 영애와 버로우 공자도 잘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게 어디가 잘만 하고 있는 것이냐! 죽기 직전에 발악을 하는 게지!”
아서의 비명어린 외침은 악수였다.
그의 대련 상대가 된 포셀은 강도를 줄이긴커녕 아직도 말할 틈이 있다며 더 거세게 몰아붙일 뿐이었으니까.
*
다른 이들과 함께 훈련을 하러 가려는 조이를 따로 불러낸 나는 메이스를 제외한 모든 무장을 한 채 그녀의 앞에 섰다.
“알른 영애. 무슨 훈련을 하려는 건가요?”
‘실전의 훈련이에요. 조이는…’
“실전의 훈련. 얼빵영애는 다급해질수록 실수가 많아지잖아? 위험한 순간에 얼빵한 짓을 해서 꼴까닥하는 걸 보긴 싫으니까. 그 전에 착한 내가 먼저 괴롭혀 두려고.”
나는 되도록 조이나 다른 친구들을 위험 속에 내던지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바에야 나 혼자 힘든 것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위험해도 나 혼자 위험한 편이 마음 편하니까.
그렇지만 내가 바란다고 해서 내 친구들이 언제나 평화 속에서 살 순 없다.
내 앞에 있는 조이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소울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이상.
그녀가 이 나라의 귀족인 이상.
그리고 이 세상이 가면 갈수록 혼란스러워질 뿐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이상.
조이는 언젠가 위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나나 다른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옆에 있다면 괜찮겠지만 항상 운이 좋기를 바랄 순 없다.
당장 나크라드와 내가 첫 대면했을 때를 생각해봐라.
조금만 상황이 어긋났다면 그 옆에 있었던 조이는 무력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을 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이에겐 실전의 경험이 필요했다.
다른 누가 주변에 없어도 홀로 모든 걸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다른 누군가의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얼빵아♡”
“…넷?!”
“지금부터 진심으로 달려들 거거든?♡ 어디 한 번 버텨봐♡”
영웅을 흉내 내는 해골과 싸운 후 나의 싸움법은 버티는 쪽으로 발전했다.
내가 주력으로 하는 방패술과 신성마법.
그리고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이 이러한 싸움법과 어울렸기에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 내가 달려드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버티는 것은 상대가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강할 때에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발악일 뿐.
지팡이를 꼭 쥔 조이처럼 빈틈투성이라면 방어를 굳힐 이유가 없지.
“할 수 있다면 말야♡”
이 말을 끝으로 대지를 박찼다.
수많은 초인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안전거리라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
거리가 벌어져있음을 믿고 자그마한 틈을 보이는 순간 그 목에 칼이 날아들지.
여태 누군가의 뒤에만 서 있던 조이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 바로 앞에 도착한 내 모습에도 대응하지 못했고.
자신의 코앞에 도착한 주먹을 보고서도 마법을 짜내지 못했으며.
주먹이 만들어낸 풍압에 머리가 휘날리고 나서야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완전 실망스럽네♡ 상상 이하야♡ 너~무 허접해서 웃음도 안 나와♡”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말을 잇는다.
그녀도 알 것이다.
방금 전 자신이 죽을 수 있었단 사실을.
내가 주먹을 물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박살났을 거란 걸.
“겁 먹었어?♡ 쫄았어?♡ 푸하핳♡ 우리 얼빵이는 앞에 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네♡ 한심해♡”
조이가 충격받았음을 알면서도 나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조이라면 좌절 대신 이를 악물고 일어날 것이라 확신했기에 오히려 도발의 강도를 올렸다.
“평~생 뒤에서 벌벌 떨고만 있을 생각이라면 그러고 있어♡ 얼빵이는 허접해도 귀족이니까 누군가가 어련히 지켜주겠지♡”
그러자 입술을 깨문 조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끄러워요. 앞에서 사고만 치고 혼자 수습할 줄도 모르는 무능 영애에게 그런 소리 듣기 싫으니까.”
악역영애다운 냉철한 눈빛을 본 순간 난 내 생각이 옳았단 것이 기뻐 웃었다.
“다시 덤벼요. 진심으로 구워드릴게요.”
“푸하핳♡ 괜찮겠어?♡ 그런 말하고 발리면 너~무 쪽팔릴 것 같은데♡”
“그러는 영애께서는 괜찮나요? 얼빵이라면서 놀리던 사람한테 지면 기분이 참 좋으시지 않을까요?”
조이의 사나운 미소를 마주한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미리 계획한 것을 위해 영지를 떠날 때까지 조이에게 마법사의 싸움법을 때려 박아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