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7
바드로넬의 적의가 퍼져 나가며 그를 뒤따르던 이들의 표정도 험악하게 변했지만 정작 내 주변을 지키던 이들은 질린다는 얼굴을 할 뿐 딱히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네가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익숙해질 때도 됐지.>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닌데요.’
<누가 뭐라 그랬냐? 그냥 사실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내가 할배랑 티격태격하는 동안에 베네딕이 바드로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딸아이가 워낙에 유별난지라.”
“…이 또한 소문대로군요.”
나한테는 직설적인 적의를 보내던 그도 강대한 기사인 베네딕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는지 헛기침을 내뱉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도시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설마 베네딕 경께서 직접 투기장에 참여하실 생각입니까?”
“하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열정을 불태우기엔 너무 늙은 나이인지라.”
“아쉬운 일이군요.”
“대신 제 딸아이가 투기장에 참여를 할 겁니다.”
“영애께서.”
눈짓으로 날 훑어 본 바드로넬은 살짝 어깨를 늘어트리며 능글맞은 목소리를 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알른 영애의 무위를 꼭 보고 싶었습니다만 이번 투기장의 참여자가 가득 차버려서요.”
“허어. 아예 방법이 없습니까?”
“알른 백의 부탁이시니만큼 되도록 힘을 쓰고 싶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국에서 투기장이 지니는 의미가 큰지라.”
참여가 어려울 것 같단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나는 태연했다. 이렇게 될 것임을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온갖 힘있는 사람들이 투기장에 참여하기 위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자리가 남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게임 속에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투기장에 참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관객석에 자리를 마련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말하는 동안 내 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던 바드로넬이 관객석의 이야기를 할 때는 내 얼굴을 살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 같은 년은 관객석에 처박히는 게 어울린다 그거야?
하하. 적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유쾌할 정도네.
이런 눈치가 부족한 나조차도 쉬이 느낄 수 있을만큼 생각 없는 태도다. 베네딕이 저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방문하지요.”
“귀한 손님께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애써 분노를 억누르는 베네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끓었다.
스스로의 잘못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가족을 건드렸다는 것에만 몰두하는 부덕한 마음.
이 감정은 지난 번 루시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을 들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해.
그 때 감정에 삼켜지면서 무언가 변화가 생겨난 걸까?
나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도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이번 투기장에 바드로넬의 아들이 참가한다 그랬지?
마침 잘 됐네.
내가 아직 약해서 네 머리를 깨부수지는 못하지만 네 아들을 박살내는 것쯤은 얼마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관객석에서 자기 아들이 오줌을 지리는 꼴을 보여주도록 할게.
– 띠링.
[투기장의 제왕]
[투기장의 참가자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당신의 강함을 입증하세요.]
뭐야. 허접 주신답지 않게 왜 제대로 된 퀘스트를 내어줬대?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긴 거야?
내가 여태까지 울분을 담아 소리쳤던 게 드디어 닿은 거야?
으음. 근데 조건이 좀 빡세네.
바드로넬의 자식을 짓밟는 거야 별 일 아니지만 투기장에서 우승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내가 강하다 강하다 그래도 아직 난 아카데미에서 졸업도 못한 꼬맹이인 걸.
투기장에 참여할 여러 강자들을 이길 수 있을지는 애매해. 최선을 다해보긴 하겠지만 성공하기는.
[보상 : 상태창 1회 이용권]
어라?
내 눈이 잘못됐나?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들어온 거 같은데.
눈을 부볐다가 다시금 뜬 나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문구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상태창이라니!
드디어 나 내 스텟을 볼 수 있는 거야?
내가 배웠던 여러 스킬들하고 그 숙련도도 볼 수 있는 거야!?
미친. 이건 성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수준이 아니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거야.
머릿속으로 온갖 방안을 강구하던 나는 문득 벌칙이 뭘 지가 궁금해졌다.
아니 이렇게 좋은 보상을 준다는 건 실패의 리스크도 크다는 거잖아.
이번엔 뭐지? 어떤 괴악한 게 나와서 나한테 치욕을 심어주는 거야?
[실패시 : 풀메이크업 상태에서 기도]
푸핳. 아. 진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게 너무 솔직하셔서 좋네요.
풀메이크업이라는 건 그거죠?
연설할 때 했던 그거?
그거라면 뭐 별 거 아니네요.
에이. 기분이다. 만약 퀘스트에 성공한다하더라도 벌칙을 받을게요.
상태창을 보게 해주시는 데 그 정도쯤이야.
페도 주신답게 얼빠여우마냥 코피를 뿜을 준비나 하시죠.
“허어.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구나.”
베네딕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나는 곁눈질로 그의 어색한 웃음을 살폈다.
“투기장의 참여자가 이미 꽉 차 버렸을 줄은. 어쩌면 좋을까.”
‘저한테…’
“걱정 마세요. 바보 아버님. 싸움 말고는 잘 하는 게 없는 바보 아버님과는 달리 유능한 저한테는 방법이 있거든요.”
“그게 정말이니?”
‘네…’
“바보 아버님이 저를 의심하실 줄이야. 좀 슬프네요. 눈물이 나올 것 같.”
“아니. 딱히 우리 루시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그게. 음. 하여튼! 그 방법이란 게 뭐니?”
말을 꺼낼수록 바닥을 파고 들 뿐임을 눈치 챈 듯 변명을 멈춘 베네딕이 다급히 화제를 바꿨다.
놀리려면 더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쯤에서 멈추자. 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니까.
‘양도받을 거에요.’
“다른 허접한테 참여권을 뺏어오려고요.”
제국의 투기장은 참여권의 양도를 허락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양도가 가능해야 귀족들이 투기장에 참여할 수 있으니까.
규칙을 정하는 게 귀족인 이상 그 규칙이 귀족에게 유리한 쪽으로 제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내가 잘 아는 것은 아니다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베네딕의 말처럼 양도를 받는 게 쉬운 건 아니다.
이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제국에서 투기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영예로 여기니까. 투기장의 참가자들은 어지간해선 자신의 참여권을 넘기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귀족이 아닌 것들이 표를 움켜쥐고 있으면 여러 귀족들이 곤란해질 것 아닌가.
제국의 귀족들은 당연히 이 상황을 예견하고 다른 규칙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자신들이 쉽게 다른 이들의 표를 뺏기 위해서.
나는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규칙을 이용할 생각이다.
‘보고 계세요.’
“무능한 바보 아버님은 구경이나 하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그마한 망설임도 없이 거리를 걷던 내가 방문한 것은 바드로넬 영지의 골목 한켠에 있는 주점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퀘퀘한 냄새가 퍼져 나오는 가게는 누가 보더라도 귀족 영애가 방문할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루시. 정말 여기가 맞니?”
베네딕의 떨떠름한 질문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대답한 나는 잡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혼자 의자 두 개를 차지하고 있는 덩치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구린내 나는 쓰레기씨.”
“넌 뭔데 시비야.”
‘투기장의 참여권. 가지고 계시죠?’
“투기장 참여권 가지고 있지? 그치?”
“…”
덩치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내 뒤편에 있는 이들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변화를 보니 확실하네.
참여권을 가지고 있구나.
다행이다.
게임하고 다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말야.
“특별히 나한테 투기장 참여권을 넘길 기회를 주려고♡ 투기장에 참여해봐야 첫 싸움에서 처발리고 질질 짤 너보다는 귀엽고 예쁜데다 강하기까지 한 내가 나가는 게 참여권한테도 좋은 일이지 않겠어?♡”
내 말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표정이 썩어 들어가던 덩치였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랄하네. 미친 년이.”
와아. 방금 전의 건방진 발언을 저 정도로 참아 내다니.
이 덩치 외모와는 다르게 교양이 넘치잖아?
그렇지만 난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투기장의 참여권을 얻으려면 이 녀석이랑 싸워야 하거든.
“겁먹었어?♡ 이런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쫀 거야?♡ 푸하핳♡ 개변태새끼처럼 생겼는데 속마음은 여린가보네♡ 쓸데없이 귀여워서 속이 메스꺼워질 지경이야♡”
속을 게워내는 시늉을 하고 있으려니 분노를 참는데 실패한 덩치가 병을 집어 들어서는 내게 던졌다.
당연하게도 그 병은 내게 닿지 못했다. 그 전에 내 앞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방벽이 생겨났으니까.
“찔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이 들켜서 화났어?♡ 미안~♡ 내가 눈치가 없었네♡ 그치만 어떡해♡ 너무 역겨워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토가 나올 것 같단 말야♡”
“…이 애새끼가!”
자리에서 퍼뜩 일어난 덩치는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꼴에 판타지의 주민이라서 그런가 덩치가 휘두르는 주먹은 꽤나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바꾸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것 말고는 봐줄 것이 없었다.
움직임은 어설프고 꽉 쥔 주먹은 허술하고 주먹이 빗나갔을 때엔 어떻게 될 지조차 생각하지 않은 쓰레기 같은 공격.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가볍게 그 주먹을 피한 나는 앞으로 쏠린 덩치의 턱에 주먹을 꽂은 후 뇌가 흔들려 앞으로 고꾸라지는 덩치의 복부를 걷어차 테이블에 처박아 버렸다.
눈이 까뒤집힌 걸 보면 기절한 게 분명하네.
재미없어라. 최소한 방금 전의 짜증을 풀 수 있을 만큼 버텨주길 원했는데.
투덜거리며 덩치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베네딕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 루시?”
‘왜요?’
“뭐에요. 바보 아버님.”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니?”
‘참여권을 양도 받는 중인데요?’
“이 허접한테 과분한 참여권을 가져오는 중인데?”
“하아아. 루시.”
내 말을 들은 베네딕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두 손으로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엄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다그치듯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투기장에 참여하고 싶다지만 다른 이를 겁박해서 그걸 가져와선 안 된다. 그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야.”
난 그제서야 베네딕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지금 내가 무작정 힘으로 참여권을 뺏으려 하다 생각하는 거구나?!
그런 거 아냐! 이거 투기장 참여권에 적혀 있는 규칙이라고!
서로 합의를 했거나 참여권의 소유자가 타인을 먼저 공격함으로써 싸움이 일어날 경우 그 승리자가 참여권의 권리를 지닌다!
난 그 규칙을 따랐을 뿐이란 말야!
투기장이 열리는 때라면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루시. 예전하고는 다르다. 지금 네게는 힘이 있지 않으냐.”
베네딕은 내 설명을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해! 이번에 한해선 진짜 잘못한 거 없는데!
솔직히 좀 치졸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잘못된 일은 아니란 말야!
더 짜증나는 건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베네딕의 심정에 공감이 간다는 거다.
그 동안 쌓아놓은 업보가 한 둘이여야지!
그치만 그건 예전의 루시잖아! 지금의 나는 딱히 사고를 치지…
어. 음.
그래도 예전보다는 적게 치잖아! 무고한 사람을 마구 괴롭히지도 않고!
애초에 진짜 나쁜 일이었으면 내가 너를 데리고 여기에 왔겠냐! 혼자 움직였지!
“저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른 백.”
베네딕의 잔소리를 가로 막은 것은 주점에 있던 한 사내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베네딕과 나의 시선을 받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말을 이었다.
“알른 영애의 말씀이 옳습니다. 따님께선 잘못한 게 없어요.”
“…예?”
“바드로넬 영지에 사는 사람 누구에게 묻더라도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도발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른 쪽이 잘못이라고.”
눈을 끔뻑이던 베네딕은 느릿하게 주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러자 주점의 사람들이 사내의 의견에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놈 말이 맞습니다. 알른 백. 이길 자신이 없었다면 끝까지 참았어야죠.”
“애초에 저 놈한테는 과분한 물건이었어.”
“영애의 말씀이 맞아. 저 놈이 투기장에 나가봐야 처참하게 지고 질질짜기밖에 더 하겠어?”
“따님께 죄가 있다면 제국의 정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거겠죠.”
“이 놈도 분명. 야. 일어나. 언제까지 뻗어있을 거야.”
“…어. 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냐? 너 먼저 주먹 휘둘렸다가 졌어.”
“미친. 진짜로!? 하. 씨발. 이번에야말로 투기장에 참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잠에서 깨어난 덩치마저 억울해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멍청함을 탓함에 따라 나의 무고가 증명된 후.
베네딕은 손목에서 커다란 손을 떼어놓으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 루시? 그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 쪽 사정에 무지해서 말이다.”
“흐응♡”
“그. 그리고 말이다. 네가 설명을 제대로 안해준 것도 있잖니. 우리 루시가 자주 말하던 것처럼 파파는 바보 파파라 말을 안 해주면 몰라요.”
“흐으응?♡”
“그으러니까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를 해주겠니?”
베네딕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파파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