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형의 통로를 미끄럼틀처럼 내려온 끝에 도착한 곳은 폐기물 처리장이었다.
그곳에는 말라붙은 피와 검게 물든 뼈, 그리고 썩은 냄새가 가득했다.
“윽.”
바닥에 잔뜩 들러붙은 부산물들은 왠지 조금 물렁물렁한 느낌이라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은색 소녀는 토할 것 같았지만, 몸을 낮춰서 폐기물 틈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갈색 소녀도 어느새 따라 내려와서, 은색 소녀 뒤에 따라붙었다.
갈색 소녀도 마찬가지로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있으니,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도축장과 이곳은 꽤 거리가 있는지, 귀를 찢을 것처럼 느껴지던 비상벨 소리는 이제 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벨 소리와 다르게, 폐기물 처리장 근처에도 여전히 수많은 발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소녀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복도를 내다보자, 인류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간간이 보였다.
“저 사람들도 전부 오브젝트인 걸까?”
갈색 소녀의 말소리에 은색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우울한 표정의 갈색 소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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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처럼 속아버린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글쎄….”
은색 소녀는 내심 전부 오브젝트일 거로 생각했다.
거대한 도축장의 모습이나 인간으로 변이한 오브젝트 등을 보면, 사람을 살려뒀을 것 같지 않았다.
다만,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갈색 소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인류군이 되기를 원했었으니까.
그렇게 한차례 잔뜩 울려 퍼지던 발소리가 그치자, 은색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폴짝폴짝 뛰고 있는 새싹 오브젝트.
아직은 조금 수상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귀여운 길잡이였다.
***
시설을 벗어나, 후미진 곳에 있는 빈 건물.
갈색 소녀와 은색 소녀는 시설에서 탈출한 끝에 이곳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소란스러워 보이는 시설이 보였다.
“후우, 겨우… 도망쳤네….”
갈색 소녀는 벽에 기대어 앉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다.
은색 소녀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시설 쪽을 바라보며, 갈색 소녀의 말에 대답했다.
“이상해. 왜 갑자기 추적이 멈춘 걸까?”
그러자 갈색 소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은색 소녀를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아. 마지막에 일부러 놓아준 것 같은 느낌이었어. 혹시, 함정일까? 아니, 굳이 함정을 팔 이유도 없을 텐데?”
마치 은색 소녀의 의견에 동조하듯이, 갈색 소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불안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은색 소녀와 갈색 소녀는 계속 고민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도망자’에 불과한 소녀 두 명을 일부러 놓아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 모르겠다! 아무리 함정이라도, 계속 도망갈 수밖에 없어!”
갈색 소녀가 은색 소녀에게 해답 없는 고민은 그만두자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시설을 나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부터 어쩌지?”
갈색 소녀는 ‘시설’이 삶의 전부였기에,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인류군이 되지 못한 미래라니.’
그 말에 은색 소녀는 구석에 뭔가 작은 생물이 있는 것처럼 멍하니 구석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우선, 시설에서 최대한 멀어져야겠지. 그리고 지상으로 나가볼 생각이야. 시설은 지상이 멸망했다고 했지만,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어.”
“그렇다면 역시 저쪽으로 가야 하는 건가.”
갈색 소녀는 저 멀리에 커다랗게 뚫린 거대한 통로를 바라보았다.
외부랑 연결된 것으로 예상되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
태평양의 푸른 물결이 ‘제임스 익스플로러’ 호의 거대한 선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가운데, 나는 갑판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햇빛은 잔잔한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뉴스에서 매번 소개하던 그 유명한 배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사실 이 배 위에 올라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브젝트 사태를 자동으로 사냥해 준다는데, 내가 같이 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TV를 틀기만 하면 나오는 ‘제임스 익스플로러’ 뉴스에 호기심이 생겨, 와버리고 말았다.
이 배는 내가 뉴스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했다.
거대한 선체는 마치 떠다니는 도시와 같았다.
윤기 나는 흰색 외관에 금빛 장식들이 어우러져, 태양 빛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셨다.
배가 고급스러운 흰색이라서 그런지, 탐사선이라기보다는 유람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물론 배에 잔뜩 배치된 첨단 장비들이나 안테나들, 그리고 함포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뚜방뚜방.
갑판을 천천히 걸어 다녀 보니, 곳곳에서 미니 사신들이 애착 인간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착 인간의 손가락을 붙잡고 환하게 웃으며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황금 사신들.
커다란 모자로 변해 애착 인간의 햇빛을 막아주는 검은 사신들.
애착 인간과 노는 미니 사신들을 지나쳐서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인간보다 미니 사신이 많은 것 같은데?
갑판 난간 근처로 이동해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검은 사신들이 난간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갑판 근처에 걸려 있는 구명보트를 살펴보자, 그 안에 병아리처럼 황금 사신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앗, 엄마다!’
‘엄마!’
나는 심심해서 놀아달라며 달라붙는 성가신 황금 사신들을 전부 태평양에 던져버린 뒤, 갑판 내부로 내려갔다.
미니 사신이 우글거리는 건, 갑판 내부나 선실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을 내다보면 창문 외부에 붙어있는 황금 사신이 히히 웃으면서 눈을 빛냈다.
갑판과 내부를 잇는 계단 사이에도 황금색 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해맑게 웃으며 숨어있는 황금 사신일 테니, 확인하지는 않았다.
‘으음.’
제임스 익스플로러는 탐사선이라기보다는 미니 사신 테마파크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이상하게 조그마한 배추 한 포기가 보였다.
갑자기 웬 배추?
다가가서 살펴보니 탁자 위의 배추는 배추가 아니라 초록 사신이었다.
미니 배춧속에 들어간 채, 새근새근 잠든 초록 사신.
‘그러고 보니, 식당에 만두를 찌는 찜기가 있었지.’
배추 초록 사신을 보다 보니, 예전에 했던 재미있는 장난이 떠올랐다.
황금 사신을 호빵 찜기 속에 집어넣었던 장난이었다.
물론 황금 사신들은 찜기 속이 사우나라도 되는 것처럼 느긋하게 누운 채, 호빵을 야금야금 뜯어 먹었었다.
초록 사신을 찜기에 넣으면 재미있는 반응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라, 배추 초록 사신을 들고 식당을 향했다.
나는 그렇게 식당에 도착해서 찜기를 열어 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는 만두 세 개와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주황 사신 하나가 들어 있었다.
‘….’
내가 황당해서 잠시 멈춰있자, 배 전체에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긴급 상황을 알립니다.]
[미확인 섬이 우리 항로상에 출현했습니다. 반복합니다. 미확인 섬이 출현했습니다.]
[이것이 오브젝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모든 연구 인원은 즉시 비상 집결 지점으로 이동하십시오.]
[이는 훈련이 아닙니다. 반복합니다. 이는 훈련이 아닙니다.]
***
가짜 별빛이 내리쬐는 어두운 동굴 속, 은빛과 갈색 머리를 가진 두 소녀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극도의 피로가 깃들어 있었고,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괜찮아?”
갈색 소녀가 옆에 있는 친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은색 머리 소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조금 지친 것뿐이야.”
두 소녀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경계하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했다.
지난 며칠간 겪은 일들은 그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은색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도시에 있던 사람들마저 모두 가짜였다니.”
갈색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 상점 아저씨 생각이 나. 정말 호탕한 아저씨였는데…. 오브젝트였다니….”
두 소녀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들이 알고 있던 세계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지하 시설에서의 삶.
인류의 마지막 보루인 군인들.
가끔 허락된 외출에서 만난 ‘인간들’.
그 모든 것이 거대한 기만이었다.
그 힘든 여정 속에서 귀여운 길잡이가 없었다면.
곁에 새싹 사신이 없었다면, 은색 소녀는 무너져 내렸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동굴 깊은 곳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소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가야 해.”
은색 소녀가 갈색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목적지가 코앞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갈색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녀들의 앞에는 거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통로가 그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시설의 아이들에게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던 동굴.
소녀들이 예상하기에 아마 지상으로 통할 것이 분명한 동굴이었다.
“저기야.”
“저길 지나면 드디어….”
[조심해, 인간!]
하지만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새싹 사신의 경고와 함께 사방을 안개가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서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은색 소녀는 꼭 붙잡은 손으로만 갈색 소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안개가 가득 찬 순간, 안개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짙은 안개가 깔려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모습만큼은 명확히 보였다.
“집 나간 양이 희망을 품고 발버둥 치고 있구나.”
언제나 엎드려 있는 것처럼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