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위에 박힌 무수한 발광체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천장을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바꾸는 동굴 속.
은색 소녀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
마치 빛 한 점 없는 끝없는 어둠처럼 느껴지는 남자.
은색 소녀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그의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서 있는 자세, 차가운 눈빛, 그리고 주변을 감싸는 위압적인 분위기까지.
은색 소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온몸이 아프고 피로했지만, 마지막 힘을 모아 칼을 들어 올렸다.
그 칼은 칼날부터 손잡이까지 전부 피로 물들어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남자는 은색 소녀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들개 한 마리가 짖어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건만,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다니….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남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은색 소녀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려는 그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잘 싸웠다.”
그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그의 말은 소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등이 굽은 남자의 시체.
소녀가 조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싸워 쓰러뜨린 상대였다.
싸움을 치하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남자의 말투에는 아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끝없는 여유와 작은 성가심뿐이었다.
남자가 그런 말을 뱉은 순간, 시체 내부에서 무언가가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퍼억.
그리고 살이 억지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체가 폭발해 버렸다.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끔찍한 광경은 따로 있었다.
시체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 속에 수많은 지렁이가 꿈틀거렸다.
지렁이들은 마치 명령받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단 하나, 바로 남자의 발치였다.
그리고 지렁이들이 그 남자의 발치에 닿는 순간, 남자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남자는 순식간에 은색 소녀의 앞으로 이동해서 소녀의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계에서, 남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은 승리의 쾌감으로 빛났고, 온몸에서는 압도적인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이 순간을 위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꿈꾸던 그 순간이 왔군.”
영원한 정지.
진정한 세계의 지배.
남자가 바라는 순간이 코앞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오직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신비로운 남색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이 고요한 세계에서, 그 나무는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보기에 정말 기묘한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욱 멀어졌고, 시야 중앙에 담으려고 하면 시야 밖으로 밀려났다.
멀어지면 조금씩 가까워지고, 보지 않으려고 하면 시야 중앙으로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결코 닿을 수 없었고, 아무리 멀어져도 시야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가축의 고기를 먹고, 능력이 강해지면 저 나무는 점점 뚜렷해지고 가까워졌다.
“이제 곧, 나는 저 나무를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시설’이었다.
그것을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무를 향해 나아갔지만, 그만큼 나무는 멀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멈춰버린 세상, 그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완벽한 놀이터였다.
사실 남자는 당장이라도 가축 소녀의 목을 꺾고 그 피와 살을 섭취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롭게.’
그것은 그의 미학에 반하는 일이었으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문득 한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바닥에 쓰러진 부하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잠시 그를 내려보다, 시간의 흐름을 풀어주었다.
“제법 잘 싸웠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부하를 위한 짧은 애도의 시간을 보낸 후, 그는 다시 시간을 정지시켰다.
우아한 걸음으로 돌아선 그의 시선이 한 소녀에게 멈췄다.
놀란 상태 그대로 얼어붙은 소녀의 표정이 그의 입가에 미소를 자아냈다.
그야말로 피지배자에게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은색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걸로 마지막 조각이 채워진다!”
희열이 가득한 목소리가 멈춘 시간 속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소녀의 머리 위에 있던 오브젝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색 새싹 오브젝트의 황금색 눈동자가 꾸물꾸물 남자를 향했다.
“!!!!”
남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은 공포로 커졌고, 온몸이 경직되었다.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그는 뒤로 펄쩍 뛰었다.
그토록 확신했던 절대적인 안전이 깨어지자, ‘언제나 여유롭게’라는 가면 속에 있던 민낯이 드러나 버렸다.
“내가… 이 내가…. 도망친 건가?”
남자는 천천히 뒷걸음치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오만함도, 여유로움도 없었다.
***
어둠 속에서 새싹 사신의 의식이 꿈틀거렸다.
깊은 수면의 바닷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물거품처럼 피어올랐다.
그 거품 하나하나에는 애착 인간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니?”
호기심과 의문이 가득한 애착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또 다른 기억의 거품이 터졌다.
“내 능력을 강화해 준 게 너지?”
감사와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
“이거 먹어볼래? 먹을 수 있어?”
따뜻한 배려가 담긴 목소리.
마지막으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새싹 사신’이라고?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
힘든 여정 중이었지만, 애착 인간과의 소중한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새싹 사신의 의식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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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싹 사신이 깨어나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조용하고 검은 세상 속에서 새싹 사신의 체감 시간만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끝없는 어둠 속에서, 새싹 사신은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시간을 향해 가지를 펼친 거대한 나무.
공간을 자르고 이어 붙이고, 시간을 뒤섞어 버리는 강력한 오브젝트.
어느새 거대한 남색 나무가 새싹 사신의 검은 세계에 우뚝 솟아있었다.
‘이미 죽어있어.’
저 강대한 오브젝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시체 따위는 아니었다.
시간이 뒤죽박죽인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과거에 존재했던 모습이었다.
‘이미 죽은 별의 별빛 같은 걸까?’
새싹 사신은 푸른 사신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떠올리며, 거대한 남색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새싹 사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을, 그리고 어떤 연금술사의 안배를.
새싹 사신의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서, 시간의 꽃을 피워냈다.
그렇게 새싹 사신은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에서 눈을 떴다.
어둠이 가득한 세계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싹이 돋아난 애착 인간의 정수리.
검은 바위로 만들어진 동굴 천장과 그 위에서 빛나는 발광체들.
느슨한 오르막길과 그 끝에 입을 벌린 하얀 출구.
오르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펼쳐지는 거대한 도시.
저 멀리에 보이는 애착 인간이 계속 지냈던 ‘시설’.
그리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해로운 오브젝트.
새싹 사신이 장작을 태우기 시작하자, 시간이 멈춘 세계 속에서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공간에 뿌리내리고, 시간에 가지를 뻗은 거대한 나무.
시간이 멈춘 공간 속에서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나무.
하지만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장작이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으니까.
새싹 사신은 그 얼마 없는 장작을 이용해서, 해로운 오브젝트를 물리칠 최강의 기술을 사용했다.
나무가 날카로운 창처럼 모습을 바꿔,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동굴 천장을 뚫고, 그 너머의 공간을 찢어버리는 순간.
새싹 사신은 의지를 듬뿍 담아, 염파를 내뿜었다.
[엄마!!!!!!]
***
태평양에 덩그러니 떠오른 섬 한가운데.
나는 그 섬의 중심부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마치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빛을 삼키고 있었다.
‘들어가야 하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질문이었다.
저 무저갱 같은 동굴은 보는 순간부터, 왠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발을 들여놓기에는 굉장히 귀찮았다.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어.’
주변을 둘러보니, 벼락을 맞고 있는 황금 사신들이 잔뜩 있었다.
히히.
하지만 내가 황금 사신 두어 마리를 붙잡기 위해서 손을 뻗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섬 전체가 흔들렸다.
폭발의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동굴이 있던 곳에서 거대한 남색 나무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쨍!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가지들은 주변의 공간을 마구 찢어발겼다.
하늘은 마치 깨진 거울처럼 산산조각 났고, 현실의 틈새로 미지의 차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 나무!’
‘새싹 나무!’
미니 사신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저, 나무가 어째서 여기에?”
“위험해!”
“모두 도망쳐!”
“시공간 왜곡 수치는 문제없나?”
갑자기 나타난 남색 나무 때문에 대다수의 제임스 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은 패닉에 빠졌다.
‘저게 왜 여기에 있지?’
팔다리가 싹둑싹둑 잘린 적이 있어서 그런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뀩’으로 박살 내려는 순간, 그 깨어진 공간 사이에서 염파가 들려왔다.
[엄마!!!!!!]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깨진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엄청나게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모방한 것 같은 동굴 천장.
가짜 별하늘 밑으로 펼쳐진 거대한 지하 도시.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자라난 남색 나무.
나무 근처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새싹 사신.
그리고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해로운 오브젝트’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