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4
루시 알른과 라샤의 대결이 끝난 후. 반파된 투기장의 복구를 위해 잠시 휴식이 선언되었을 때 관객석에 숨어 있던 교회의 정보원은 방금 전 루시 알른이 보여주었던 여러 기적을 떠올리며 입술을 곱씹었다.
성하께서 루시 알른이 투기장에서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보고하란 명을 내렸을 때 난 그 분의 명령을 경계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루시 알른이 교회에 적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과거 알른 영지의 교회에서 벌인 수많은 패악질부터 시작해서 성녀님의 은덕에 힘입어 어느 정도 교화가 되었단 이야기를 듣는 지금도 공적인 자리에서 위대하신 주신을 허접이라 비하하길 서슴치 않는데다가.
한없는 자비를 지닌 주신께서는 그런 불신자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신성 마법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전설적인 성기사 루엘의 메이스까지 선물했음에도 감사는커녕 불경한 행동만을 이어나가는 루시 알른은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교화될 수 없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다.
개중 급진적인 이들은 위대하신 주신의 은혜도 모르는 저딴 꼬맹이에게 루엘님의 메이스는 과분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게 몇몇 이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을 지경이었지.
문제는 루시 알른이 불신자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그녀가 막강한 재능을 지니고 있단 사실이었다.
알른의 수치라는 대중의 평가를 자신의 재능만으로 뒤집어 버릴 만큼 압도적인 실력.
베네딕 알른이 보여주었던 위업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그보다 더 한 영광을 가져올지 모른다 평 받는 루시 알른이라는 존재는 훗날 대륙의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자였다.
그래서 교회의 정보원은 지금 루시 알른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눈에 새기는 것은 물론 회유의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진작에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 지에 대해 알아보는 일을 맡았다 생각을 했다.
허나 방금 전 라샤와 루시 알른의 전투를 본 후 그는 자신이 커다란 착각을 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라샤의 공격을 막아낼 때 루시 알른이 보여주었던 신성은 신자가 지닐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보다 훨씬 더 따스하고 포근한 신성은 과거의 영웅들이 펼쳐 보였다던 신성과 한없이 닮아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냐. 위대하고 지혜로우신 주신께서 오롯이 자비를 보이기 위해 불신자에게 영웅이 사용하던 무기를 전했겠는가.
루시 알른은 단순히 불경한 자가 아니다. 불경으로 겉을 가린 채 속에 다른 것을 품은 인간이다.
어쩌면 성녀님께서 루시 알른의 옆에 머물렀던 이유가 저것을 눈치 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뭐. 이 이상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성지에 머무는 여러 추기경 각하분들이며 교황 성하일 테니까.
방금 전 펼쳐졌던 놀라운 광경에 관객들 사이에서 소란이 그치지 않는 동안 교회의 정보원은 조용히 투기장 밖으로 빠져 나왔다. 주신 교회의 사람을 통해 이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
“어이. 거기 샌님. 멈춰.”
그가 뒷골목에 들어선 순간 뒤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낸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음성.
얼마 전 이와 비슷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던 교회의 정보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강자사냥.”
라샤. 강자사냥. 강한 자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는 광인.
저 자가 왜 내게 말을 거는 거지?
그녀가 자신의 흥미를 충족하기 위해 교회의 성기사나 성직자를 공격한 적은 많다. 허나 나는 아직 라샤에게 공격당한 분들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 라샤의 흥미를 끌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왜지? 왜 라샤가 나를.
“너 교회의 잔챙이지? 직급이 어떻게 돼?”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속일 생각 하지 마. 등신아. 자꾸 그러면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고. 귀찮게.”
라샤의 협박에 교회의 정보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진심을 다한다면 나 따위는 발악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이 비틀리겠지.
평소 같았으면 기꺼이 영원한 침묵을 받아들였을 터이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교회에 전해야만 하는 정보가 있단 말이다. 그러니 당장은 라샤가 바라는 것에 맞추어 주면서 물러나는 것이 옳을 터.
“당신의 예상이 옳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하의 명을 받아…”
교회의 정보원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중간에 이르기도 전에 라샤의 손이 그의 목을 사로잡아 비틀어버렸으니까.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생명이 바닥에 널부러진 후 라샤는 기지개를 펴고는 터덜터덜 골목에서 빠져 나왔다.
흐아아.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하루였어.
훗날 모든 재능을 개화하는 순간 베네딕보다 더 즐거운 싸움을 만들어 줄 꼬맹이를 만난 것도. 그리고 아직 무르익지 않은 꼬맹이가 보여준 전력이 내 예상을 한참 상회했다는 것도. 과거 내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몇 안 되는 상대인 베네딕과 다시금 주먹을 맞대어 본 것도. 하나하나 즐겁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주제도 모르고 내 먹잇감을 노리는 개자식들만 아니었어도 웃으면서 훌쩍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라샤가 저들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루시와 싸우기 위해 투기장에 입장할 무렵부터였다. 자신이 다른 강자들을 평가하듯 관객석에서 루시를 관찰하고 있는 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주신의 신성을 품은 사람만 해도 다섯. 흑마법과 관계된 놈이 둘. 이외에도 여러 자잘한 속내를 품고 있는 녀석들이 여럿 있었지.
루시와 겨루기 전의 라샤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눈치 챘으면서도 굳이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딕의 딸이 지닌 가치를 생각해보면 거기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많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리고 아직은 베네딕의 딸에게 신경을 쏟을 가치가 없었기에.
허나 싸움이 이어지면서 루시에 대한 평가를 끌어올린 라샤는 얽매인 것이 많은 베네딕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평범한 놈팽이들은 별 상관없어. 그들은 베네딕의 딸을 이용하려 하면서도 베네딕을 두려워해 선을 지킬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주신 교회의 쓰레기들과 흑마법을 다루는 병신새끼들은 이야기가 달라.
썩을대로 썩어버린 주신 교회는 주신의 사도를 찬양하긴커녕 부정하고 매도하고 짓밟아 화형시키려들 개자식들이고 흑마법을 다루는 놈들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목숨을 걸고 베네딕의 딸을 제물로 바치려들 역겨운 족속들이거든.
자신이 점찍어 둔 싹이 다른 쓰레기들에 의해 꺾이는 걸 원치 않았던 라샤는 투기장에 빠져나온 후 교회의 정보원과 흑마법을 다루는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후환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면 라샤는 웃으며 그들을 맞이해 줄 뿐이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술이나 마실까 생각을 하던 라샤는 머릿속에 새겨지는 목소리를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개소리 좀 적당히 하라니까? 열매가 맺어지지도 않았는데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는 미친 놈이 어딨냐?”
“하아. 자꾸 지랄 떨면 당신 이름을 대고 다른 쓰레기들을 박살내고 다닐 거야. 알겠어?”
“꼬와? 꼬우면 덤벼보든가. 당신이 그 이름만큼의 힘을 되찾는다면 기꺼이 환영할게. 못 덤비면 그냥 닥치고 도구로 살고.”
허공에다 대고 날선 목소리를 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도시의 바깥으로 향했다.
“군도 쪽에 재밌는 녀석이 있다고 했으니 이번엔 거기로 가볼까.”
*
나와 라샤의 싸움이 끝난 후 내게는 충분한 수준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베네딕과 라샤의 격돌로 인해 생겨난 피해가 너무도 커서 그를 수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 덕분에 나는 그 동안 몸을 회복하고 말라버린 신성을 다시 채울 수 있었지.
물론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뿐 만전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이번 투기장 참가자 중에서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라샤가 이미 다 박살내 놓은 지 오래이기도 했고. 라샤와 싸우며 얻은 깨달음이 다른 적들을 상대하는 걸 수월하게 만들어줬으니까.
남은 내 상대들은 모두 한창 투기장 스피드런 기록을 세운답시고 난리를 칠 때 지겹도록 마주했던 이들.
그들의 공략법은 눈 감고도 쓸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고 자신과 수백 수천번을 싸워 본 것처럼 모든 공격에 대응하는 나의 앞에서 상대들은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우승을 거머쥐는데에 성공하긴 했다만.
‘…다시는 단상에 안 설 거라고 다짐했었는데에에에에!’
설마 우승소감이라는 악마적인 절차가 남아있을 줄이야.
<우승자는 우승소감을 발표한다. 당연한 상식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마아안.’
얼마 전에 그 참사를 내놓고 또 단상에 올라야 한단 사실이 얼마나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아요!?
저 지금 완전 긴장상태라고요!
결승전 상대랑 무기를 맞댈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고요!
<괜찮다. 왜 네가 말하길 이 곳은 강자를 존중하다 그러지 않았느냐. 투기장의 우승자인 네가 허접이니 쓰레기들이니 좆밥이니 해도 별 문제는 없겠지.>
‘그…렇겠죠?’
<그리고 정 안 되면 네 아비가 어련히 문제를 해결해줄 터.>
…언제는 나보고 뒤가 없다면서 뭐라 그러더니 이제는 뒤없이 행동하는 걸 권장하고 계시네. 전설적인 성기사라는 인간이 이렇게 태도가 휙휙 바뀌어도 되는 겁니까?
<네가 바라는 대로 대답해줬는데 투덜대면 어쩌잔 게냐.>
‘에휴. 됐어요. 이러니까 할아버지가 인기가 없었던 거겠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만 난 인기가 없던 게 아니라!…>
발작버튼이 눌린 할배가 소리를 내지르는 걸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후우. 괜찮아. 별 문제 없어. 정 일이 커지며 그냥 긴급탈출하면 되는 거잖아.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단상 위에 올라서자 바드로넬 백작이 내게 나뭇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 준 후 품 안에서 구리로 만든 패 하나를 꺼내서 줬다.
“갑옷이 많이 상했더군. 이를 가지고 영지 북쪽의 대장간에 들르게.”
이건 게임 속에 없던 보상이네. 바드로넬 백작이 따로 신경을 쓴 걸까?
뭐든 간에 거절할 이유는 없다 생각하며 인벤토리에 패를 집어넣은 동안 바드로넬 백작이 내 활약을 짧게 치하했다.
“자. 이제 우승자로써 이번 투기장에 참여한 소감을 말해주게.”
소리증폭의 마법이 부여된 수정구를 받은 나는 심호흡을 한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알른 가문의 장녀 루시라고 합니다.’
“안녕.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처발린 허접허접들. 루시야.”
인사말을 꺼내기 무섭게 싸해진 관객석을 본 나는 연설을 끝맺기 위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우승해서 기쁩니다. 이상입니다.’
“허접쓰레기들에게 제 주제를 알려줄 수 있어서 참 기뻤어. 할 말은 이걸로 끝. 여자애한테 매도당하는데 아무 말도 못하는 마조 돼지들한테 이 이상 뭐라 하기 싫거든.”
음. 역시 이렇게 되나.
얼마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나는 당혹 속에서 말을 잇는 대신 다른 이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도주하는 것을 택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