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7
거의 1년만에 성지로 돌아온 페이비였지만 그리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녀가 성지를 비운 동안에도 성지는 자신이 할 일들을 해나갔고 그 과정에서 본래 페이비가 해결해야 했을 일들이 차츰차츰 쌓여나갔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교황이 잠시 성지를 비웠다는 것도 페이비를 정신없게 만든 요소 중 하나였다.
성지에서 가장 큰 상징성을 지닌 교황이 자리를 비우면 그가 해야 할 일들을 페이비가 대신 수행해야 하니까.
그렇게 한 주 동안 밀렸던 일과 함께 교황의 일까지 함께 수행하던 페이비는 어느새 성지의 생활에 적응을 해버렸다.
해가 완전히 기울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일을 하다 잠들었음에도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난 페이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이 처음이니 적응하는 데에 조금 어색함이 있으리라고 여겼었는데 십 년 가까이 몸에 새겨진 것들은 쉬이 사라지는 법이 아닌가 보네요.
신성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 피곤을 몰아내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깨끗이 하고 위대하신 주신께 기도를 올렸다.
이전에 고아원에서 주신과 대화를 나누며 그 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듯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페이비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신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페이비의 믿음은 이전의 맹목적임을 벗어던졌을 뿐 여전히 그녀의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주신은 완전무결하지는 않으나 선한 존재이고 선하려 노력하는 존재일 지어니 페이비는 그것만으로 믿음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략 삼십분 가까운 기도가 끝나갈 즈음에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아침 예배를 준비할 시간입니다.”
“네. 금방 나갈게요.”
옷가짐을 바로 한 페이비가 바깥으로 나오자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좌를 해주었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페이비는 거기에 여느 때처럼 인사를 건네면서 속으로는 복잡한 마음을 품었다.
얼마 전 주신께 직접 신성을 부여 받은 그녀는 진정으로 신앙을 품은 사람과 신앙을 품은 체를 하는 이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신성이 많고 적고로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신성을 품고 있어도 그 신성 속에 차가움만을 깃들일 수 있는 자가 있고 페이비 본인이 그렇고 주신의 사도인 루시가 그렇듯 따스함을 깃들일 수 있는 자가 있으니.
전자는 믿음 없이 신성만을 취한자요 후자는 믿음으로 신성을 갈고 닦으려는 자였다.
그리고 페이비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오랜 기간 성지에 머물렀음에도 차가움만을 지니고 있었다.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페이비가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거짓된 성녀인 이상 그녀의 주변에 머무르는 이들 또한 거짓될 수밖에 없으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일이었지만 페이비는 살짝 아릿한 마음을 다잡을 뿐 그 이상 여인에게 무어라 말을 내뱉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영애님께서는 이럴 때에 어떤 식으로 하셨으려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어쩌면 신앙의 대상인 주신보다도 더한 믿음을 가진 그 얼굴을 떠올린 페이비였지만 그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허접성녀는 그것도 해결 못해서 나한테 의존하려는 거야? 푸흐흫. 그래선 평생 허접이라고 불려야 할 걸? 혹시 허접이라면서 매도당하는 게 마음에 든 걸까? 허접 성녀가 아니라 마…’
“아니에요!”
복도 중간에서 빼액 소리를 내지른 페이비는 시종 역을 맡은 여인의 당혹어린 시선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아. 그… 없던 일로 해주시겠어요?”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지요?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감사합니다아아…”
자그마한 소란과는 별개로 페이비가 주관하게 된 아침예배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녀가 성녀의 직함을 얻고 아주 어릴 때부터 매일 같이 해오던 일이다. 몇 달 정도 쉬었다 해서 모두 앞에 나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있을 리가.
설령 아침예배 자리에 나오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차가움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페이비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처음 교회에 복귀했을 때 페이비는 과거 루시가 교회의 부패에 대해 경고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지에 머무르는 성직자 중에서 육할 이상이 따스함을 잃어버린 채였던 것이다.
이 곳이 다른 평범한 교회였다면 그럴 수 있다. 따스함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곳은 평범한 교회가 아니다. 성지다. 대륙 전체에 널리 퍼진 주신 교회의 성직자들 중에서도 가장 뜻 높은 이들이 모이는 장소란 말이다.
주신의 따스함을 전하는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이 자그마한 따스함조차 품지 못하고 있단 사실은 가벼이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따스함조차 품지 못한 이들이 어찌 다른 이들에게 주신의 따스함을 전할 수 있을까.
성지에 돌아오고 나서 며칠 간 주신교회의 타락을 확신하게 된 페이비는 어찌하면 이를 다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답은 쉬지 나오지 않았다.
“오늘 말씀도 훌륭했습니다. 성녀님.”
“교황 성하께서 자리를 비웠음에도 그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질 않는 군요.”
“하루 빨리 성녀님께서 교회로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차가움을 품은 채 빈말을 내뱉는 이들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주던 페이비는 자신이 성지에 오는 대신 알른 기사단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거기에도 나름의 고됨이 존재할 테지만 거기엔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외모와 달리 허술하지만 착한 조이가. 마음에 아픔을 품었으면서도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아서가. 너무도 순수하여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프레이가.
그리고 루시. 몇 번이나 페이비를 구원해주었던. 그 누구보다 소중한 그녀가.
페이비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짙게 만들던 그 때에 성직자들의 뒤편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성녀님께서 곤란해 하시지 않나. 물러서게.”
나름 지위를 지니고 있던 성직자들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가 그 곳에 서 있는 노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떴다.
주신 교회의 추기경이자 따스함을 품은 성직자인 라자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렇지만 그가 페이비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달랐다. 한없이 엄하던 그의 얼굴에 자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부터 말씀드렸습니다만 모두 다 받아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성녀님.”
교회의 많은 이들이 차가움만을 품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 거리 교회의 주교가 그러했고. 그녀가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요한 주교가 그러했으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추기경이 그러한 것처럼 올바름은 혼란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때로 단호히 잘라낼 줄도 알아야하죠.”
“정말 곤란했다면 그랬을 거에요. 라자로 추기경.”
“그렇습니까? 그럼 확인을 위해서라도 성녀님을 곤란케 해봐야겠군요.”
“너무 짓궂게만 하지 말아주세요.”
“하하. 그것은 성녀님의 대처에 따라 다르지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을 몰라 괴팍하단 평을 듣고 사는 라자로 추기경이지만 페이비의 앞에서는 그저 장난스러운 할아버지에 불과했다.
“바쁜 일이 대충 끝났으면 나중에 차나 한 잔 하러 오십시오. 따로 할 이야기가 많을 듯 하니.”
“꼭 한 번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성녀님!”
그 때 교회의 성직자 중 하나가 다급히 페이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라자로 추기경은 그 성직자의 무례에 엄한 눈빛을 내비쳤지만 성직자는 그를 눈치 채지 못한 상태에서 다급히 말을 이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급한 일입니다.”
“마플 사제. 아무리 다급한 일이어도 품위를 지키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아. 라자로 추기경 예하! 추기경 예하께서도 아셔야 할 소식입니다!”
“…흠?”
“바드로넬 영지에서 저희 교회의 사람이 참살당했습니다!”
*
스스로의 멍청함을 마주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신이 나서 내 머리를 매만지는 에린의 콧노래를 가만 듣고 있자니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카데미에서 오랜 시간 혼자 살며 단장을 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에린에게 아침 일찍부터 날 찾으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럴 시간에 한숨이라도 더 자라고 말이다.
이건 분명 에린을 향한 내 호의였지만 정작 내 말을 들은 에린은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젠 제가 필요 없어지신 거군요.’
졸지에 쓰레기가 될 위기에 처한 나는 다급히 농담삼아 한 말이었을 뿐이라 변명하며 에린을 달랬다.
‘훌쩍. 정말요? 안 버리실 건가요?’
‘너 같은 허접을 다른 데서 써주기나 할 것 같아? 버려져서 길바닥을 돌아다니다 객사하면 기분 나쁠 게 분명하니까 안 버릴 거야. 됐어?’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 반응이 이해되진 않는다. 아침 시간에 더 쉬게 해주겠다 그러면 기뻐하는 게 정상 아닌가?
최소한 나는 출근 좀 더 늦게 해도 된단 소리 들으면 눈물 흘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외칠 자신이 있는데.
“아가씨. 불편하신 부분 없으신가요?”
‘괜찮아요.’
“불편했음 내가 가만히 있었겠어? 허접 에린. 눈치를 좀 기르는 게 어때?”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일의 자부심을 지닌 게 분명한 에린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보던 나는 문득 내 머리를 손질하던 변태 사도를 떠올렸다.
그 녀석의 손길은 에린과 달리 기분 나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니까. 이번 방학 때 시간이 남으면 그 녀석을 불러서 에린한테 기술 좀 알려 달라 그럴까.
보통 예술가들은 자기 기술을 내어주는 데 인색하지만 변태 사도라면 내가 발로 몇 번 꾹꾹 눌러주면 감사하다면서 해줄 것 같거든.
“마무리 됐습니다. 아가씨.”
나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더 말끔한 머리를 매만지던 나는 몇 마디 말을 꺼내는 대신에 에린을 향해 한 번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밥 먹고 바로 뉴먼 가문의 거점으로 가보자. 거기에서 알아봐야 할 게 한 둘이 아니니까.
그리 생각을 하고서 1층으로 내려가던 나는 식당 한 가운데를 점거하고 있는 면면을 보고 내가 아직 잠에 취해 있는걸까하는 의심을 품었다.
식당에 베네딕이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번 여행 내내 나보다 일찍 식당에 내려와서 나를 기다렸으니까.
그 옆에 카리아가 있는 것도 그렇게까지 당혹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급하게 전해야 할 소식이 있다면 그녀가 직접 찾아올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 끼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뉴먼 가 당주 커즈 뉴먼의 모습은 내 상상력에서 저만치 벗어난 것이었다.
저 인간이 왜 저기에서 쩔쩔 매고 있는 거야?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카리아와 내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고용주님. 일어났네. 이리로 와. 해줄 이야기가 있어.”
‘저기…’
“노처녀 아줌마. 옆에 좆밥 당주님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실시간으로 머리카락이 줄어드는 게 보여서 좀 불쌍한데.”
“딱히 뭐 한 거 없어. 그치? 베네딕?”
“맞다. 루시. 뉴먼 백은 예전부터 카리아를 어려워했다.”
“야. 커즈. 너도 빨리 해명해. 입 다물고 있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잖아.”
“그. 그렇습니다. 알른 영애. 카리아님께서는 제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봐도 협박당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아. 그러고 보면 카리아는 예전에 왕국의 그림자였지. 그렇다면 뉴먼 가문이 음지에서 벌이고 있는 여러 수작질을 파악하고 있을 테고 당연히 약점이 될 여러 정보까지도 잘 알고 있겠네.
대충 사정을 파악한 나는 계단에서 내려와 빈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줌마?”
“좀 중요한 일 이야기라서. 그 당사자 중 한 명인 커즈를 데리고 왔어.”
중요한 일? 지금 시점에서 크게 중요한 일이 있나? 방학 때 일어나는 이벤트라고 해봐야 별 거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카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솔라딘의 2왕비님께서 고용주님을 만나고 싶대. 뉴먼 가문은 그 사이의 중재 역을 맡았고.”
‘…네?’
“…뭐?”
– 띠링!
[퀘스트가 지급됩니다!]
[세라느 솔라딘의 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