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9
알른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고서 어언 2주 째. 자신의 앞에 놓인 식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조이는 수저를 집어들려다가 손에 힘이 빠져서 떨어트렸다.
영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면 후일 추문이 될 일이지만 오늘의 조이는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했다. 자잘한 것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몸도 정신도 한계에 몰렸기에.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인 조이는 자기 가문의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봤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직전엔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러 나선 적도 있었지.
그렇기에 조이는 보통 기사단의 훈련이란 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인 체력훈련. 근력의 단련. 개인적인 실력의 증진. 그리고 몇 개 조로 나누어 진행되는 협동훈련. 마지막으로 기사단 전체가 함께 움직이는 단체훈련까지.
수많은 고함소리 속에서 쉴 틈 없이 진행되는 훈련은 기사라는 개인을 기사단에 속한 하나의 도구로 만드는 과정처럼 보였다.
알른 기사단의 훈련도 큰 틀에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기사이기 이전에 알른 가문의 무력이어야 하는 이들은 실전 속에서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던지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알른 기사단의 훈련이 다른 기사단과 다른 점이라면 알른이 생각하는 실전과 다른 기사단이 생각하는 실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저희 알른 기사단은 솔라딘 왕국의 변경을 수호하는 이들이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자들이고 전장의 최전선을 내달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위기를 항시 대비해야만 하죠.’
알른 기사단의 단장 포셀이 이야기하는 실전은 타국의 침공을 기사단의 힘만으로 쫓아낼 수 있는 수준을 이야기했다.
‘최악의 경우에도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힘을 지녀야한단 것이 알른의 지론입니다.’
여느 평범한 가문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조이는 단순히 자부심이 넘칠 뿐이라 생각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허나 알른 기사단과 함께 훈련을 해 온 조이는 저들의 말에 자그마한 과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저들은 홀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휴식을 포기하는 법을 익혔다. 하나로써 일백을 상대하기 위한 무를 수련했다. 그 어떤 던전이 생겨나더라도 분쇄하기 위한 연습을 거듭했다.
‘포셀 경. 내 가르침을 받는 자로써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다만. 알른이 여태까지 보여준 충성이 없었다면 자네들은 반란분자 취급을 받았을 걸세.’
‘저희도 압니다. 3왕자님.’
‘…아는데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알른의 충성이 의심받지 않을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토록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지녔기에 알른 기사단의 훈련은 다른 기사단의 훈련과는 격을 달리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저쯤 되어야 대륙 최강 중 하나라 여겨질 수 있구나 생각할만큼.
만약 조이가 관객의 입장에 있었다면 그녀는 질린단 느낌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이는 관객이 아닌 참가자였고 그녀는 일국을 상대하기 위해 짜여진 훈련을 자신의 몸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루시가 떠나가며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된 후로부터 조이는 매일 밤 세 시간의 쪽잠을 자고 나면 또 다시 지옥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침대 위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물론 그 두려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피곤에 찌든 그녀의 몸은 길바닥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푸하핳. 침 질질 흘리는 것 봐. 얼빵이는 오랜만에 봐도 얼빵이네.”
며칠간 듣지 못한 조롱어린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조이는 특유의 얄미운 웃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른 영애!”
“엄청 신났네? 많이 보고 싶었나봐? 그 동안 외로웠어?”
“저희를 이 지옥에 버려두고 혼자만 놀러 가시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조이가 며칠간의 울분을 담아 거센 목소리를 냈지만 그 앞에서도 루시는 태연했다.
잘못 하나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입술을 우물거리던 조이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자기 혼자 비난을 해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지원을 부르려는 것이다.
다행히 조이의 주변에는 이미 지원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이유에 따라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힘든 훈련을 받은 아서는 루시를 보자마자 형형한 눈을 한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얼굴색이 좋은 걸 보니 아주 잘 놀다왔나 보군! 우리들을 버리고 가니 즐겁더냐?! 재밌더냐!?”
“그렇게 즐겁진 않았어요. 허접들만 한 가득이었거든요. 아 물론 그 허접들이라 해도 불쌍왕자님보단 나았지만.”
“루시 알르으으은!”
분노로 가득 차 소리를 지르던 아서는 문득 자신을 향하는 여러 시선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알른 가문의 기사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평상시 훈련을 할 때의 흐뭇한 눈빛과는 다른, 언제라도 무기를 뽑아들 것 같은 무감정한 눈.
식당에 자리 잡은 무거운 공기를 느낀 아서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허접하고 멍청한 기사들. 너희 친구 없어? 평생 검만 잡아와서 사람들 간의 교류를 모르는 거야?”
그 시선을 가로막은 것은 방금 전까지 그를 놀리던 루시였다. 눈가를 잔뜩 찌푸린 그녀는 식당의 기사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날선 목소리를 냈다.
“눈 치워. 진짜 기분 나쁘니까.”
기사들은 훗날 가문의 주인이 될 아이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렇게 시선의 압박에서 벗어난 아서가 긴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루시가 키득대며 아서를 놀렸다.
“저런 허접들한테 쫄다니. 진짜 왕자 맞아요? 그런 것치고는 담이 너무 쪼끄만한 것 같은데요?”
아서는 억울했다. 함께 훈련을 하며 저들이 얼마나 괴물 같은 이들인지를 보았는데 어찌 겁을 먹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변명의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당장이야 루시 알른의 명령 탓에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지금도 안 쪽에 무언가를 쌓아두고 있을 터.
이 이상 루시 알른을 공격하면 후일 훈련할 때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루시. 루시. 나 힘냈어.”
“칭찬 듣고 싶어? 무릎 꿇고 제발 칭찬해 달라 그러면 못 해줄 것도 없는데.”
“이러면 돼?”
“…”
아서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동안 프레이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는 것으로 루시에게 쓰다듬을 받았다.
자신이 겪은 모든 고생을 이거 하나로 보상받았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은 프레이의 모습에 무심코 부럽단 생각을 하던 조이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재차 목소리를 드높였다.
“알른 영애! 전 아직 화가 나 있어요!”
“흐응? 그래서?”
“그래서라뇨! 저는!”
“그럼 나랑 같이 다른 데로 안 갈 거야? 땀내 나는 기사단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얼빵이가 그걸 바란다면 뭐.”
“아니. 잠시만요!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세요!”
“왜? 나한테 화난 얼빵이는 삐져서 같이 안 갈 거잖아? 그런데 굳이 말을 해줘야 하나?”
뺀질뺀질한 루시의 태도 앞에서 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지옥 같은 훈련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곳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데 조이가 어찌 반발을 이어나가겠는가.
두 손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던 조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저 화 안 났어요.”
“응? 뭐라고? 얼빵이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리는데에에?”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가게 해주세욧!”
“푸흫. 푸흐흐흫. 푸하하하핳!”
뺨이 벌겋게 물든 조이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이나 웃음소리를 내던 루시는 조이가 아예 울상이 되고 나서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알겠어. 얼빵이가 그렇게 던전에 가고 싶어하는 줄 몰랐네.”
“네! 맞아요! 저는 던전에… 던전이요?”
“응. 우리 다 같이 던전 공략하러 갈 건데?”
조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곳이 설마 또 다른 지옥일 줄이야!
알른영애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면 어떤 꼴이 될지는 뻔해요. 아카데미 던전에서 지겹도록 굴러봤는걸요. 그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거에요.
어떡하죠. 어떻게 해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아! 그래요! 그거라면!
“저. 저도 영애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고 싶지만 던전 공략 같은 경우에는 가문의 허락을 구해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허술 공작님께서 맘대로 하라 그러셨는 걸. 알른의 기사와 함께라면 별 일 없을 거라면서.”
이미 퇴로를 막아뒀다고요!? 경악으로 물든 조이가 굳어있는 동안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칼이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파트란 영애. 그래도 여기서 죽어라 구르는 것보다는 던전 공략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겠네요. 지옥에도 정도라는 게 있으니.”
“아. 열등공자 넌 같이 안 갈 거니까 여기 계속 있어.”
“…예?”
홀로 지옥에 남겨질 거란 사실에 자칼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저항할 방도는 없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방적인 갑을관계에 놓인 사람이니까.
자칼이 터덜터덜 제 자리로 돌아가 수저를 드는 걸 본 루시는 슬쩍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서 쪽으로 고갤 돌렸다.
“불쌍왕자님. 지난 번에 제가 드린 건 모두 외우셨죠?”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그 두꺼운 걸 기사단의 훈련과 병행하면서 어떻게 외울 수 있는가!”
“아~ 너무 힘들어서 힝힝 우느라 못 외우셨단건가요? 뭐어 그럴 수도 있죠. 불쌍왕자님한테 기대한 제가 잘못이에요.”
“젠장! 어쨌든 그 던전에 도착하기 전에만 다 외우면 되는 거 아니냐! 외워주마! 외워 보이겠다!”
도발을 견디다 못한 아서가 소리를 내지르는 걸 본 루시는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 말을 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근데 루시. 우리 어느 던전으로 가는 거야?”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아서가 정신을 부여잡았다.
“어쩐 일이냐. 평상시에 바보 같은 말만 하던 네가 요점을 짚다니.”
“그야 루시한테 장난감 취급 당하는 왕자님보다 내가 똑똑하니까.”
“…할 말은 많다만 이번에는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넘기겠다. 루시 알른. 대답해라. 우리는 어디에 있는 던전으로 가는 거지? 쿠르텐 영지 인근에 있는 대형던전? 그게 아니라면 평소 알른 기사단이 훈련할 때 사용하는 중소 던전?”
“불쌍왕자님. 바보에요? 눈 감고도 박살낼 수 있는 허접한 곳에 왜 가겠어요?”
“그럼 뭐냐. 어디로 갈 거냐.”
“저희는 깡촌 중의 깡촌인 군도에 가서 그 곳의 쓰레기 같은 던전들을 모두 박살내고 올 거랍니다.”
루시가 말을 끝마친 순간 식당 전체에 정적이 깃든다.
그녀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러갈 아서나 조이, 프레이 뿐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슬며시 듣고 있던 기사들까지도 그녀의 말에 놀란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녀의 기행에 익숙해진 호위기사 칼이었다.
“저. 아가씨. 군도의 모든 던전을 공략하시겠다고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 곳에는 14개의 섬에 하나씩 중형 규모의 던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방학 기간내에 그걸 모두 공략하는 데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허접견. 진짜 강아지랑 두뇌를 바꾸기라도 한 거야? 오래 걸릴 이유가 어디 있어? 하루에 두 개씩 공략하면 일주일이면 끝나는데.”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난 발언에 칼마저 침묵하자 식당 안에서 멀쩡히 움직이는 사람은 루시 한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