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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7

밤.

따스하게 비추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숨고 고요한 어둠이 지상에 내려앉는 시간.

고된 일에 지친 이들이 숨을 돌리고, 근심거리에 한숨을 쉬던 이들이 걱정을 내려두고 잠에 드는 안식의 시간.

그러나 밤에는 어머니처럼 따스한 면모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모든 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얼굴 뒤엔 한겨울 모진 칼바람보다 차가운 얼굴이 숨어 있다.

“원래 계획은 거래만 하고 바로 출발해서 야영하는 거였는데, 지금 시간이라면 얼마 못 가겠네요.”

“아무래도 여기서 하루 쉬었다 가는 게 낫겠죠?”

“대신 내일 조금 더 일찍 출발하기로….”

안락한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이들은 밤의 두 얼굴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횃불을 치켜들고 마탑제 랜턴을 쓴다고 해도 어둠 속에 가려진 악의를 비추기엔 부족했으니.

지금은 아직 해가 떠 있지만, 용무를 마치고 마을을 떠날 땐 슬슬 해가 질 무렵이라 얼마 가지 못해 야영지를 만들고 야생의 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조금 움직이고 위험을 감수할 바엔 마을에서 편하게 하루를 보내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상단은 계획을 약간 틀어 오늘 하루는 작은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용병들에게 지급하는 추가금과, 늦어진 일정으로 인해 놓친 이윤을 생각하면 꽤 과감한 결단이었다.

졸지에 자유 시간이 생긴 용병들.

갑작스럽게 생긴 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며 실력을 기르는 사람도 있었고, 부드러운 들판에 태평하게 누워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소녀의 손을 잡고 마을을 종횡무진 누볐다.

카나의 손을 잡고 마을을 누비던 저니는 어느 작은 집 앞의 의자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던 노파와 마주쳤다.

“실례합니다~ 잠깐 말씀 좀 여쭐 수 있을까요?”

“으응? 뭐라고?”

“헉….”

저니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답과 거리가 멀었다.

‘맞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긴 그라시스 영토였지.’

나이가 지긋한 노파에겐 아르키쉬보다 그라닉이 더 익숙할 것이다.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린 저니는 제 불찰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마을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오, 왕국어를 할 줄 아는구나.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보기 드문 처자구나.”


“잘은 못하고 조금이지만요. 헤헤….”


“그게 어디니? 그래, 마을 이름이 궁금하다고? 이 마을의 이름은 블럼이란다.”


“블럼….”

저니는 노파가 알려준 이름을 되뇌었다.

되새김질하듯 여러 번 되뇐 그녀가 방긋 웃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후후. 고맙구나.”

여행지의 주민과 스몰토크를 나누는 건 저니가 특히 좋아하는 일이었다.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사는 곳의 문화와 생활이 여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진학한 대학이고, 그러기 위해 공부한 언어 아닌가.

당연히 원어민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런 건 딱히 상관없었다.

외국인이 자기가 사는 나라에 여행을 와서, 어눌하게나마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시도하는데 엄격하게 평가하거나 나쁘게 볼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실제로 쌀쌀맞던 카나와의 첫 만남 때도 그 덕을 보지 않았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뭘 해도 싫어할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겁먹고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만큼 아까운 일이 있을까.

저니의 그런 점은 가상현실 게임인 실리아 온라인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와, 정말요?”

꾸욱, 꾹.

“응?”

미숙한 그라닉으로 노파와 스몰토크를 나누던 저니는 문득 손을 당기는 힘을 느끼고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양 고개를 돌리고 있는 카나.

하지만 저니의 손을 잡아당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동생이니? 아이고, 이 노인네가 말이 너무 많은 탓에 꼬마 아가씨가 많이 지루했나 보구나.”


“꼬마 아니야.”


“이런, 나이가 들었더니 눈이 침침해서 그런지 잘못 봤나 보구나. 그럼 숙녀라고 부르면 되겠니?”


“….”

저니는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는 카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카나야….’

설마 했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사람한테도 반말하는구나….

전직 기사단장이라서 그런 걸까. 저니는 카나의 반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정작 카나는 단장은커녕 어렸을 때부터 반말을 써왔지만, 저니는 그걸 알지 못하니 오해할 법도 했다.

아무튼, 그러면서도 고압적이거나 건방지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게 상당히 신기했다.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무덤덤한 말투 때문?’

방울방울 드는 생각을 톡톡 터트리던 저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 게 뭐야, 귀여우니까 됐어.

그녀는 오히려 카나가 존댓말을 쓴다면 더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건방지다고 느껴도 카나의 버릇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저니는 당당하게 말하며 검을 휘두르는 카나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카나는 그럴 아이가 아니야.

설령 진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입이 아니라 검으로 말할 아이라고.

“여기 유명한 꽃밭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꽃밭? 있고말고. 우리 마을의 자랑이란다. 보고 싶니?”


“네. 제 동생이 꽃을 좋아하거든요. 어디로 가야 볼 수 있을까요?”


“저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나온단다.”


“마을 안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더라니, 마을 밖에 있었구나.

꽃밭을 찾아 한참이나 헤맨 저니는 살짝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노파와 작별 인사를 나눈 그녀는 카나와 같이 다시 꽃밭을 찾는 여정에 올랐다.

노파가 가리킨 길은 마을 밖을 넘어 산 아래의 야트막한 언덕까지 이어졌다.

“누가 가꾸는 곳이 아니었구나….”

카나에게 제안했던 저니도 따로 알아본 게 아니라 그런 곳이 있다고만 들은 거라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

‘알았으면 헤매지도 않았겠지.’

한숨을 쉬며 언덕을 오른 저니.

오르막길이 끝나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니의 입이 헤 벌어졌다.

“와아…!”

언덕을 수놓은 각양각색의 꽃들.

서로의 매력을 뽐내듯 앞다투어 고개를 내민 꽃들이 저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나가 가꾼 꽃밭처럼 열을 맞춰 피어있진 않지만, 화사한 꽃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는 광경은 그것과는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아니, 사람의 손을 탔다면 이런 풍경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자연의 손길만으로 빚어냈기에 받을 수 있는 감동.

한차례 이는 바람에 실린 은은한 꽃향기가 저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넋을 놓고 구경하던 저니는 문득 손이 허전해졌음을 느꼈다.

“…카나?”

언제 손을 놓쳤는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카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소녀의 행방을 찾아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쪼그려 앉은 채 이름 모를 꽃을 들여다보는 작은 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저니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올망졸망한 분홍색 꽃잎이 인상적인 작은 꽃 앞에 앉은 카나의 뒤에 섰다.

아무리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고 해도 이미 알아챘을 게 분명한 카나였지만, 꽃에 심취한 카나는 그녀에게 관심 한 터럭 주지 않았다.

‘귀여운 꽃이네.’

뭔가 카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카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저니는 그녀의 감상을 굳이 입에 담는 대신 카나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달큰한 향기를 뿜는 분홍색 꽃 앞에 앉아 있기를 한참.

슬슬 저니의 다리가 저려 올 때쯤, 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나를 따라 일어선 저니가 미소를 지었다.

“예쁜 꽃밭이네. 그렇지?”

“….”

대답은 없었지만 저니의 눈은 카나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은 저니였으나, 어느덧 중천을 한참 넘어선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아마 이 중에는 밤에 피는 꽃도 있겠지?”

이대로 밤이 오기를 기다리면 은은한 달빛 아래 피어난 꽃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니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블럼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밥은 거르면 안 되지.’

한창 성장할 나이의 아이라면 더더욱.

다시 오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밥을 먹고 다시 와도 되는 거니까.

저니는 부끄럼 많은 소녀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저니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태양은 이미 지평선에 반 정도 몸을 걸치고 있었다.

웅성웅성.

“…뭔가 소란스러운데?”

마을 입구 목책에 도착한 저니는 문득 자신들이 마을에서 나올 때와 지금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저녁 시간이라 떠들썩하다고 하기엔 무언가 달랐다.

더 어수선하고,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는 느낌.

“빨리… …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여기를 …고 …자고요?”

“우리가… …것도 아니잖아요.”

상단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나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위축된 저니가 어깨를 움츠리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저니 님!”

그때, 저니를 발견한 캐서린이 빠르게 다가왔다.

“한참 찾았어요!”

“…저를요?”

“네!”

“왜, 왜요?”

“그야, 이런 일이 생겼는데 저니 님을 두고 얘기를 할 순 없으니까요.”

“…이런 일이라뇨?”

“혹시 아직 아무 얘기 못 들으셨어요?”

“네. 바깥에서 산책하고 돌아오느라….”

“아…! 정말 큰일 날 뻔하셨네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저니의 말에 캐서린이 순간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니 입장에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말하는 걸 보면 꼭 전쟁터에 나가 무사히 돌아온 사람을 반기는 듯한 뉘앙스인데, 언제부터 산책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었지?

저니의 얼굴 가득 떠오른 의문을 눈치챈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근처에 오우거 무리가 나타났대요! 게다가 이 마을을 향해 오는 중이라고…!”

“…네?”

갑자기 오우거 무리가 나타났는데, 하필 이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고?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당해진 저니는 무심코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혹시 마차에 꿀이라도 발라놨나요?”

어제는 오크 무리, 오늘은 오우거 무리.

내일은 드래곤 무리라도 나오나?

저니의 말을 들은 캐서린이 발을 동동 굴렀다.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아, 아니….”

농담은 아니었는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저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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