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안개가 짙게 깔린 섬의 중심부.
하늘은 마치 수백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킨 듯한 불길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아래로 펼쳐진 산은 거대한 괴물이 찰흙을 짓이겨 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곳은 광기와 정신 오염, 그리고 오브젝트 변이가 만연했다.
나는 그 뒤틀린 산의 중턱에 한 남자를 만났다.
이런 곳에서 ‘인간’이 있다니?
공기 중에도 은은한 푸른 빛이 서린 풍경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봤던 인간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게 재단된 정장, 반짝이는 구두, 그리고 세련된 코트까지.
보라 사신이 좋아할 법한, 영화 속 멋진 마피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잠시 멈춰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순간 그의 눈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고, 이내 표정을 풀고 말을 걸어왔다.
“정말 다행이군. 이런 절망적인 장소에서 회색 사신을 만나다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지만, 이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도 또렷이 들려왔다.
‘….’
남자는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했다.
‘보라 사신은 어디에 있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보라 사신을 찾았다.
남자가 살아있을 정도의 환경이라면 보라 사신은 당연히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보라 사신은 보이지 않았다.
‘미니 사신들의 위치가 확인이 안 되니 불편하네….’
푸른 안개에 휩쓸린 뒤로 미니 사신들의 위치가 느껴지지를 않으니, 육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미니 사신 정원을 열거나 정원으로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미니 사신 네트워크 연결은 엉망진창이었다.
“우선 내가 머무는 곳으로 안내하지.”
남자는 내가 무시하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뒤로 돌아서더니, 어딘가를 향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흠….’
나는 남자가 유창한 한국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내 앞에서 말한 적이 있었나?
모르겠어.
나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저 남자를 ‘뀩’으로 박살 낼까? 말까?’
척 보기에도 외국인처럼 생겼으면서 한국어를 잘해서 그런지 너무 수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들어 올렸던 오른손을 내렸다.
만에 하나라도 진짜 보라 사신의 애착 인간이라면 대참사였으니까.
그렇다고 미니 사신 정원을 열어서, 남자를 정원으로 옮기기에도 조금 꺼림칙했다.
저 남자, 인간인 것 같기는 한데 조금 이상하단 말이지.
그냥 조금 더 두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
나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선형으로 뒤틀린 길을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 점점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의 푸른 빛은….”
“이 섬에는 상당히 많은 오브젝트가….”
남자는 나를 향해 계속 말을 걸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나 말이 많은 남자였나 싶을 정도로.
‘어지럽네.’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 가끔 어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남자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계속 나를 향해 말을 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섬의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남자를 따라서 도착한 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푸른빛이 마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 빛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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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기괴하고 불길한 색조로 모든 것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들은 마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조각상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듯한 그들의 자세는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한 황홀경을 띠었다.
마을에 흩어져 있는 안개는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안개의 어둠 때문인지 창문들은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검은 구멍으로 변해버렸다.
골목길에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했다.
[….]
[….]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귓가를 맴돌았고, 그 소리는 광기의 씨앗을 뿌리는 속삭임 같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처럼, 다시 거미줄처럼 썩어버린 세계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어지러워.’
그것은 마치 정신 오염을 당하는 감각이랑 조금 닮아 있었다.
***
늦은 밤, 송파구 외곽.
연금술사 자매가 살고 있는 단독 주택의 한 방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빨리 와!”
“조금만 기다려.”
몇 번이고 반복된 ‘조금만 기다려.’ 대답을 들은 여동생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근처에 누워있던 분홍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언니가 도무지 오지 않아서 상심한 마음을 파자마 차림의 분홍 소녀를 껴안아서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손가락 두 개로 푸른 아이돌 사신이랑 손뼉치기 놀이를 하고 있던 분홍 소녀는 깜짝 놀랐다.
분홍 소녀는 학교 입학 준비와 연금술 공부를 위해서 연금술사 자매의 집에 얹혀사는 중이었다.
연금술사의 연금술은 분홍 소녀의 시대와 비교하면 수백 년 전의 연금술이었지만, 제대로 배운 연금술이었으니까.
물론 연금술사도 분홍 소녀가 알려주는 ‘미래’ 연금술의 정보를 들으면서, 자신의 연금술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여동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분홍 소녀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좋네.”
그런 여동생의 귀에 색 아귀의 행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뀨히히.
여동생이 고개를 돌려보자, 머리맡에 누워있는 색 아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색 아귀와 조그마한 분홍 아귀.
분홍 아귀는 분홍 소녀가 언니의 수업을 듣고 만든 것이었는데, 언니는 그 아귀를 보고 굉장히 놀랐었다.
‘단색 아귀라니!’하고 놀랐던 것 같은데, 여동생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여동생 입장에는 색이 화려한 색 아귀 쪽이 더 귀여웠다.
게다가 요즘 색 아귀는 쿠션처럼 말랑말랑하기까지 했다.
마치 마시멜로 같은 감촉.
언니가 정신을 차린 뒤에 바뀐 거니까, 아마 언니가 롤케이크가 된 거랑 관련이 있는 거겠지?
여동생은 손가락으로 말랑말랑한 색 아귀를 꾹꾹 누르며, 전단지 한 장을 분홍 소녀에게 내밀었다.
“정식 오픈하면 셋이서 같이 가보자!”
분홍 소녀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며 전단지를 펼쳐 들었다.
<회색 사신 테마파크, 곧 오픈 합니다!>
아직 한글이 익숙하지 않은 분홍 소녀는 천천히 전단지를 읽어 내려갔다.
‘회색 사신 테마파크?’
회색 사신이라면… 분홍 소녀도 잘 아는 오브젝트였다.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푸른 아이돌 사신’의 원천이었으니까.
“언니, 언제쯤 끝나?”
여동생은 여전히 올 생각하지 않는 언니를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은 ‘조금만 기다려 줘.’ 였다.
‘….’
연금술사는 별을 올려다보며, 커다란 접시 위에 시약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시약이 저절로 물표면 위로 흩어지며 별하늘을 그대로 모사했다.
몇몇 별이 밝기나 모양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정말 똑같았다.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군.”
연금술사의 곁에는 똑같은 별하늘을 그려낸 접시가 잔뜩 놓여 있었다.
연금술사가 하는 것은 제임스의 0호 유물에서 찾아낸 연금술이었는데,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에 가까운 연금술이었다.
‘동쪽에 뭔가가 있는데, 뭘 뜻하는지 모르겠군. 내일 제임스에게 가서 0호 유물을 보고 확인해 보면 되겠지.’
연금술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접시 위의 별하늘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저장했다.
***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처음엔 평화로운 듯했지만, 이내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파도 소리에 겹쳐 들리는 노이즈.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있었다.
남자는 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
눈을 뜨자마자 그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갈라진 벽 틈새로 푸른 안개에 휩싸인 해변이 보였다.
낯설고 불길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시야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미간을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미국을 향하는 유람선 안에서, 푸른 안개가 밀어닥쳤었지.’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눈을 다시 뜨고 주변을 살폈다.
처음엔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여동생과 청, 그리고 미니 사신들이 같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는 서둘러 여동생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끼이익.
그 순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파도치는 해변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너는… 죽은 거 아니었나?”
여자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죽지 않았어. 청부업이 하기 싫어서 잠적했을 뿐이야.”
“그런가….”
남자는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청부업을 하며 길러온 그의 직감이 위험하다고 경종을 마구 울리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여기에 나타난 거지?”
여자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친구를 보는 것 같은 따뜻한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입을 열었다.
“아마 너희랑 똑같지 않을까? 나는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 수상한 해변에서 눈을 떴어.”
“….”
긴장감이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파도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