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외곽에 우뚝 선 제임스 타워.
그 거대한 건물 안, 어느 방에서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학교 문제로 제임스 타워를 방문한 분홍 소녀는 푸른 아이돌 사신의 통통한 뺨을 장난스럽게 찌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엄청 심각한 얼굴이었는데….”
조금 전, 분홍 소녀와 같이 온 연금술 스승님은 제임스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모습이 분홍 소녀의 마음에 조금 걸렸다.
제임스는 분홍 소녀에게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 줘.”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신경 써도 별수 없겠지?”
분홍 소녀는 뺨을 너무 찔러서 조금 토라진 푸른 아이돌 사신을 달래듯이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옴뇸뇸.
분홍 소녀가 시선을 돌리자, 탁자 위에서 커다란 쿠키를 천천히 뜯어 먹는 황금 사신이 보였다.
제임스는 사라져 버렸지만, 제임스가 데려온 황금 사신은 분홍 소녀 곁에 남아 방 안에 잔뜩 놓인 간식을 야금야금 먹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연금술 스승님이 만든 색 아귀와 분홍 소녀 자신이 만든 분홍 아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황금 사신은 분홍 아귀를 처음 만난 순간을 제외하면, 아귀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분홍 아귀를 발견했을 때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분홍 아귀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하지만 분홍 아귀의 돌처럼 딱딱한 감촉에 실망한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앉아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황금 사신이 먹던 과자가 예상보다 맛있었는지, 자신이 먹던 과자를 들고는 주변에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거 엄청 맛있어!’
땅콩버터를 베이스로 만든 부드러운 쿠키.
“고마워.”
분홍 소녀는 황금 사신이 내미는 조그마한 쿠키 조각을 먹으며,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금 사신은 분홍 소녀의 감사에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황금 사신의 쿠키 나눔은 푸른 아이돌 사신은 물론, 심지어 아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황금 사신은 마지막으로 색 아귀에게 과자를 나눠주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랑해!’
분명 돌처럼 딱딱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색 아귀였는데!
황금 사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황금 사신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색 아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도 맛있는 아귀야?’
‘맛을 봐도 괜찮아?’
아귀는 황금 사신의 의지를 받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귀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금 사신은 조심스레 색 아귀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색 아귀를 핥았다.
예상대로의 달콤한 맛이었는지, 황금 사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맛있는 아귀!’
이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분홍 소녀의 입가에도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푸른 안개가 은은하게 깔린 해변.
그 음산한 풍경 속에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오두막 안에는 롱코트를 입은 남자와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계속 어지럽군.’
남자는 계속되는 두통과 어지럼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자기 진단을 해본 상태였다.
하지만 푸른 안개가 남자의 두통을 유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미간을 주무르며, 바닥에 기절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남자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여동생과 청이 의식을 잃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보라 사신과 왕관 사신마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뭔가 이상했으니까.
여자는 그런 남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기다리면 곧 깨어날 거야.”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남자는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치 ‘정신 오염’처럼.
남자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정신 오염을 일으키는 오브젝트인 건가?’
‘두통 하나만으로 오브젝트라고 봐도 괜찮은 건가?’
두통 때문인지, 남자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남자는 이런 일에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답답함을 느낀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늘에는 뒤틀린 뱀 같은 구름이 꿈틀거렸고, 파도는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풍경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넓게 펼쳐진 불길한 풍경이 답답했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는 듯했다.
잠시 후, 남자의 곁으로 여자가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여동생이 일어나면 좋겠어?”
별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 남자는 그저 묵묵히 바다만 내다보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천천히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남자가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여동생이 깨어나 있었다.
“아, 오빠!”
여동생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남자에게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수상쩍은 여자와 친밀한 태도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의 의심을 자아냈다.
‘뭔가 이상한데.’
남자는 혼란스러워했다.
‘여동생이 그녀를 알고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녀와 만난 것은 여동생이 사라진 후야.’
그 순간,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여자가 갑자기 여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더라?”
“어렸을 때 만났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네.”
그 말에 남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랬었나?”
그가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 순간, 남자에게 보인 여자의 눈빛은 무기질적으로 번뜩였다.
마치 상어의 탁한 눈동자처럼, 인간이 아닌 무언가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는 그 장면을 곧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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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누군가가 그의 인식을 뒤트는 것처럼.
의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버렸다.
오두막 안의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애해졌지만, 푸른 안개는 더욱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안개 속에서 여자의 미소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
거미줄을 닮은 유기물이 가득한 기괴한 세계.
시체 같기도 하고 곰팡이 같기도 한, 푸른 빛을 머금은 거미줄이 빠르게 자라나는 속에서 보라 사신은 그림자를 휘둘러 거미줄을 마구 잘라내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마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주황 달이 있었고, 그 밑에는 입에서 핏물 같은 장작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주황 왕관 사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라 사신의 표정에는 극도의 피로가 서려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필사적이었다.
주황 왕관 사신은 평소의 느긋한 표정을 지우고,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슬금슬금 자라나는 거미줄이 애착 인간을 천천히 뜯어먹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뜯어먹힐수록 애착 인간은 점점 거미줄과 하나가 되는 중이었다.
‘앙대….’
탄식이 담긴 의지가 미니 사신들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미니 사신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거미줄을 제거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웬만한 힘으로는 잘라낼 수도 없고, 잘라내도 순식간에 자라나는 거미줄 속.
마치 괴물의 뱃속처럼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마…. 빨리 와….’
미니 사신들은 엄마를 기다렸다.
***
뒤틀린 섬 중앙, 광기의 마을.
나는 그 마을 내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을 내부로 첫 발자국을 디디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안개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토록 잔뜩 떠들었으면서, 더 말할 것이 남은 건가?
“보는 것처럼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은 전부 미쳐버렸어.”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마을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그곳에는 공터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인간은 제대로 마주 보려면 적응이 필요한 것 같더군.”
마을 중심부는 텅 비어 있는 듯했지만, 동시에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모순된 감각이 나를 엄습했다.
공터에 가까이 갈수록 몸이 무거워졌고, 움직이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너는. 그런. 것. 같지. 않군.]
그리고 공터에 다가갈수록 남자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의 말이 끊어지듯 들리면서, 마을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움직이기 너무 힘들어져서 손을 내려다보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
회색빛 손을 푸른 거미줄이 촘촘히 덮고 있었다.
순간 시야가 흐려지며 두 개의 세계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마주. 보고.]
[같이. 마주. 보고.]
[함께.]
[계속. 함께.]
시야가 뒤틀리며 두 개의 시선이 중첩되었다.
한쪽은 푸른 안개로 가득한 광기의 마을이었고, 다른 한쪽은 끔찍한 거미줄이 모든 것을 덮은 세계였다.
거미줄 세계의 시선으로 마을의 공터를 바라보면,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맥동하고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대한 눈알.
‘설마….’
태평양이 있던 자리에 바다가 없고, 거미줄만 가득했었다고?
순간 마을의 모습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거미줄의 풍경을 억지로 제거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푸른 안개의 풍경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사방이 거미줄로 가득 찬 세계가 나를 반겼다.
내 몸을 둘러싼 거미줄은 내 몸을 천천히 거미줄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 감각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져서, 나는 공간을 붙잡고 내 몸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으드득.
그렇게 나는 거미줄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을 뚫고 나갔다.
‘!!!’
하지만 하늘 위에서 마주한 광경은 더욱 끔찍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 지평선 끝까지 끈적이는 유기물로 뒤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