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마시멜로가 펼쳐진 평원 위, 미니 사신들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거대한 침대의 캐노피처럼 포근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로 평화로운 풍경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평온한 광경 한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검은 구체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불변하는 검은 공.>
그것은 주변의 부드러운 색조와 너무나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보는 이의 시선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듯했다.
“마아아.”
탈색 사신은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불변구를 올려다보았다.
탈색 사신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불변구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불변구를 매일같이 살펴보고 있었다.
‘….’
‘….’
불변구는 겉보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엄마가 자식들을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반드시 자신이 필요할 거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 기이한 부름은 탈색 사신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불변구 주변으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검은 사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구?’
‘부르고 있어?’
검은 사신들은 서로 속삭이며 불변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검은 사신들이 내뱉는 의지 속에는 꺼림칙함이 감돌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엄마?’
‘엄마 아니야!’
검은 사신들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경계심이 묻어났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마치 실에 묶인 꼭두각시처럼 불변구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아아!”
그 순간, 탈색 사신이 검은 사신들 앞을 가로막았다.
의지를 제대로 뿜어내지 못했지만, 표정과 눈빛만큼은 영웅처럼 단호했다.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돼!’라고 외치는 듯한 그 표정에 검은 사신들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
그와 동시에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검은 사신들은 정신을 차렸다.
검은 사신들은 탈색 사신을 내려다보며,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며 “삐-!”하고 울었다.
“마아아.”
탈색 사신도 검은 사신들을 따라서 행복한 표정으로 울었다.
그리고 검은 사신들은 마시멜로로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 대회의에서 정한 미니 사신 금지 구역을 뜻하는 울타리였다.
‘해로운 엄마?’
‘해로운 오브젝트!’
울타리를 만든 검은 사신들이 다시 정원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탈색 사신은 등 뒤로 시선 하나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어둠 속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가 보내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탈색 사신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불변구만이 여전히 그 자리에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
송파구 외곽에 있는 제임스 타워의 상황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텅 비어서 고요한 분위기를 자랑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자료를 나르고,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가 긴박한 상황을 더욱 고조시켰다.
상황실의 한쪽 벽면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도록 거대한 세계지도가 배치되어 있었다.
세계지도 위에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커다란 붉은 영역이 구불구불 그려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거의 태평양 전역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제임스와 연금술사는 그 지도 앞에 서서,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 연구소 직원들이 데리고 있는 몇몇 황금 사신들도 상황실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인간들처럼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연금술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동쪽이 수상하다고 알리러 왔는데, 이미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군.”
“맞아.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제임스는 미리 준비된 것 같은 보고서를 집어 들더니, 연금술사에게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회색 사신 말고는 아예 방법이 없을 정도로 막막한 상황이야. 이 보고서를 보고, 연금술사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말해주면 좋겠어.”
연금술사는 천천히 보고서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내용을 훑어나갔다.
그때, 회의실 안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외침이 들려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구소, 침식이 의심됩니다!”
“현재 미국 서부 해안 연구소들 대부분 정보 누락 발생!”
직원들의 보고와 함께 지도 위의 붉은 표시가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태평양을 거의 다 집어삼킨 붉은 영역은 이제 미국 서부 해안마저 집어삼켜 버렸다.
연금술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과 손에 들린 보고서를 번갈아 보며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정신 오염 대책이 즉각적으로 돌파되는 정신 오염.>
<외부 관측이 불가능한 현실 왜곡을 포함함.>
<현재 오염된 지역은 어떤 상황인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붉은 글씨로 강조된 문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U3pnY1pRaU5OZVlrWGsxQUxDREd6eldxZGJEamNSOTFMKzZ6WDM3S2N0Ug
<태평양 침식을 받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푸른 바다와 꿈틀거리는 구름, 그리고 해저 도시를 언급했다.>
연금술사는 그 내용을 보면서 한 가지 오래된 서적을 떠올리고 있었다.
옥으로 만들어진 고대 연금술의 잔재.
분명 고대 연금술사, 옥인들이 섬기던 존재 중에 바다와 관련된 마도서가 있었다.
연금술사는 그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
그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오랜 친구였다는 여자와 여동생 사이로 한 발짝 내딛으려는 찰나, 남자의 발아래로 대지가 요동쳤다.
하늘이 일그러지고, 공간 자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얇디얇은 비눗방울이 터지듯, 불완전한 환상의 막이 찢어져 나가는 듯했다.
남자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 아득한 시야 속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는 거미줄 같은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남자의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한순간에 걷히고 선명한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는 저 여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청부업을 하던 시절의 친구라고?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본능적으로 총을 뽑아 들어 의심스러운 여자를 겨누려 했다.
그 순간, 여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꼴로 겨눌 수 있겠어?”
그 말에 남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총을 쥐려고 했던 손은 이미 거미줄과 동화되듯이 잔뜩 파먹혀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환상이 산산조각 났다.
고즈넉해 보이던 오두막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끝없이 펼쳐진 거미줄의 둥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스멀스멀 기어 오는 거미줄은 마치 기생충의 촉수처럼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여자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사람의 형상을 한 거대한 거미줄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덩어리 사이사이로 작은 눈동자들이 꿈틀거리며 돌아다녔고, 그 모든 눈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
남자는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몸 전체가 거미줄 속에 파묻혀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는?’
그와 동시에 남자는 빠른 속도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고통 없이 몸을 야금야금 파먹는 거미줄.
거미줄에 묶여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침대가 있던 자리에는 거미줄 속에 파묻힌 여동생과 청.
‘불행 중 다행이군.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
남자는 그러면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서 누군가를 찾았다.
‘보라 사신과 왕관 사신은 어디 있지?’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라색 그림자의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남자의 몸을 옥죄고 있던 거미줄을 불태워 버렸다.
‘인간!’
‘드디어 깨어났구나!’
그와 동시에 보라 사신이 남자 곁으로 내려앉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보라 사신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언제나 냉철하고 진지한 표정만 짓던 보라 사신이였기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옆으로는 창백한 얼굴의 왕관 사신이 자리 잡았다.
거미줄의 속박에서 벗어난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신을 잃은 여동생과 청.
그리고 굉장히 지쳐 보이는 보라 사신과 왕관 사신.
‘이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의안에 비치는 에너지의 흐름을 보며 의지를 다졌다.
***
지평선을 가득 메운 거미줄 위를 뛰어다니며, 나는 허공을 ‘뀩’ 움켜쥐었다.
거대한 검은 구체가 생겨나서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미줄은 공허를 향해 일제히 몰려들더니, 공간의 균열을 거대한 공 모양으로 덮어버려서 공허를 없애 버렸다.
마치 말벌에 대항하는 꿀벌들처럼.
마치 굉장히 ‘뀩’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거미줄은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거의 무한에 가까운 거미줄을 처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미줄이 다시 슬금슬금 내 주변을 채우기 시작하자, 나는 고통을 참고 헤일로를 불러들였다.
‘능력 무효화 헤일로.’
하얀 불길이 거미줄들을 녹이고 태워버렸지만, 태평양 전역의 거미줄을 전부 없애버릴 순 없었다.
다른 헤일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가장 유효한 헤일로는 ‘공간의 헤일로’였지만, 이 거미줄들은 공간 능력만큼은 기민하게 대처해서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거미줄들을 보면 공간 능력을 쓰는 나보다 더 공간 능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뀩’과 헤일로들은 거미줄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아마 거미줄을 모두 태우려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건 즉, 나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내 장작이 헤일로를 가볍게 사용할 정도로 많아졌어도, 무한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외신이니만큼 죽음을 보는 능력도 통하지 않았다.
눈을 통해서 이 거미줄들을 바라봐도, 붉은 외신처럼 <■ ■ ■ ■ ■> 라고 보일 뿐이었다.
아마 미니 사신들을 불러내서 헤일로를 동시에 사용해도 큰 차이는 없겠지.
‘답이 없네.’
내 능력으로 이번 외신을 처리하기엔, 외신의 크기가 너무 거대했다.
내가 검은 거인처럼 몸이 커다랬다면, 엄청나게 넓은 범위의 ‘뀩’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외신과 싸울 때는 역시 불변구 같은 외신의 힘을 써야 하는 건가?
하지만 불변구를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게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특히 달을 모두 모으고 나자, 그 느낌이 1,000배는 강해져서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지금 저 거미줄 아래에 미니 사신들이 있는 것 같은데….’
‘위험할 텐데….’
아이들이 다치는 것보다는 역시 검은 거인을 꺼내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냥 ‘푹’하고 심장을 뚫어서, 내 가슴 속에 있는 ‘죽음을 보는 헤일로’를 꺼내고 싶네.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하며 짜증을 담아서 내 심장 어림을 찌르자, 내 오른손이 푹하고 박혀 들어갔다.
‘?!’
깜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꺼내자, 손아귀 안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뒤틀린 헤일로가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끼에에엑!
그와 동시에 주변의 거미줄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면서, 솜사탕이 되어 휘날리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헤일로의 묵직한 진동에 맞춰서 주변 거미줄들이 온갖 간식으로 변했다.
마치 심장 박동 같은 헤일로의 맥동에 맞춰서 보이지 않는 파동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