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2
과거 모니터 너머의 나는 커뮤니티에 여러 공략글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게임을 해왔다는 증명정도로 생각을 했지.
그래서 아서가 던전의 공략법을 알려 달라 그랬을 때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커뮤니티에 적었던 것처럼 아서에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을 했거든.
근데 종이에 글을 적다 보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서는 모니터 너머의 사람이 아니라 던전에 직접 들어가 마물과 싸워야하는 사람이니까.
유저에게 맞춰진 방식을 그가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쓰던 걸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글을 썼다. 과거 내가 소울 아카데미를 처음으로 공략할 때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온갖 모드를 돌파하며 던전 공략의 기반을 쌓을 때를 기억하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완벽하게 숙달한다는 전제 하에 이 세계관에 존재하는 어떤 던전도 공략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물건이 되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많은 만큼 어지간한 사람들은 감히 읽을 엄두도 못 낼 괴서적이 되긴 했다만 난 그걸 굳이 수정하진 않았다.
내가 준 책을 읽을 사람은 아서니까. 기본적인 지능 스텟이 100을 넘기는 그 녀석이라면 이 정도는 가뿐히 이해할 수 있을 게 분명하잖아.
1년 내내 노력한 내 지능보다 그 녀석이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지능이 2배나 높은데 아서가 그 정도도 못할 리 없다고! 지능이 58인 나도 하는데 그 녀석이 못한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나는 오늘 아서한테 던전 공략을 맡겼을 때 기대를 가졌어. 던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자신만만했잖아.
그 때 너무 시간을 길게 준 거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했었다니까? 근데 공략을 진행하다보니 내가 아서를 과대평가했다는 걸 알게 됐어.
일단 길 찾는 게 어설퍼. 던전의 갈림길에는 규칙성이 있으니까 그거만 확인하면 문제없다고 했는데 그걸 못 찾아서 몇 번이나 헤매고. 잡몹을 굳이 다 상대하는 거 낭비니까 넘길 수 있으면 넘기라고 했는데 굳이 다 상대하고. 보스 때 자기 움직이느라 제대로 기믹도 안 살피고.
아 진짜 중간에 훈수 두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진짜 이빨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니까.
하여튼 어설프게 내 흉내를 낼 뿐 내가 책에 적어둔 것들을 조금도 체화하지 못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내기의 결과가 어찌 될지 보였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아서는 네 시간 안에 던전 공략을 하는 데에 실패했다.
‘여섯 시간 걸렸네요.’
“어라? 제 눈이 잘못된 걸까요? 왜 여섯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죠? 그 자신만만하던 불쌍왕자님이 실패할 리가 없는데?”
아서는 내 비꼼에도 입술을 깨물뿐 답을 하진 않았다. 자신이 했던 실수들을 돌이켜보고 있는 거겠지. 최소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건가.
“저 알른 영애.”
자기 잘못은 알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조이가 아서를 변호했다.
“3왕자님께만 무어라 하지 말아주세요, 공략이 늦어진 데는 저희 탓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반박할 방법은 차고 넘쳤다.
지금 우리 파티가 지닌 스펙을 생각해보면 네 시간도 차고 넘치는 수준이란 것.
중간에 길을 잘못 들지만 않았어도 시간이 부족할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것.
까놓고 말해서 파티원들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도 지휘의 잘못이라는 것.
하지만 난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서 본인이 짐작하고 있을 잘못을 굳이 언급해봐야 무얼 하겠는가. 그 대신에 난 바로 세 사람을 데리고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3왕자님. 잘 봐요.’
“불쌍왕자님. 잘 보도록 해요. 당신의 지휘가 얼마나 허접했는지를 절절히 알게 해줄 테니까.”
일단 아서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한 번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
다음 던전에 발을 디뎠을 때 아서는 루시가 특유의 던전 공략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던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듯한, 꼭 수많은 미래를 읽고 그 중에서 최선의 길을 고르는 것 같은 공략법을 말이다.
허나 이번에 루시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언자가 아니라 노련한 용병이 되어서 그들을 이끌었다.
“앞에 허접들이 있네. 저 정도면 마법을 쓸 필요도 없겠어. 얼빵이는 마법진 준비만 해 둬.”
“이런 것도 함정이라고 설치해 둔 건가. 재미없네.”
“뒤에 따라 붙는 허접쓰레기들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저딴 놈들한테 관심주는 것조차 낭비야.”
“이 허접은 개변태새끼라서 귀여운 나밖에 못 보거든? 시선 끌 테니까 뒤에서 포격해. 얼빵이의 마법이 허접하긴 하지만 이 개변태는 더 허접하니까.”
기행이 아닌 정석적인 공략을 택했기에 평소보다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시 알른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
던전 앞을 지키던 이가 한 시간 만에 공략을 끝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한 걸 보면 알 수 있듯 루시 알른은 정도를 택해도 다른 이들에게 경외를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두 던전을 공략하고 숙소로 돌아온 후 아서는 방 안에 틀어박혀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책에 적힌 이론은 대부분 이해했다 생각했지만 실전에 들어가보니 내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실수가 너무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내가 해야 할 것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이들을 제대로 지휘하는 것조차 실패해버렸어.
우리 수준에 비해 던전의 난이도가 낮은 편이었음에도 내기에서 패배한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루시 알른이 직접 내 문제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려주었다는 것이겠지.
루시는 바란다면 얼마든 예언자의 방식을 쓸 수 있을 텐데도 굳이 기사의 방식으로 던전을 진행했다. 그 의도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아서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를 알았기에 아서는 루시의 뒤를 따르며 그녀가 던전을 나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루시 알른이 책에 적어두었던 모든 것들을 숨쉬듯 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능숙하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혼 자체에 던전을 공략하는 방식이 박혀 있는 듯한 경지였지.
그를 보며 아서는 새삼 루시 알른이 얼마나 괴물같은 인간인지를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 주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중요한 것은 시야다. 던전의 공략을 지휘하는 자는 눈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풍경 모두를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그래야 실수 없이 완벽한 지휘를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기행을 숨쉬듯 하기 위해서는 던전의 공략법을 떠올리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할 테고.
…
오늘 일만 보더라도 루시 알른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녀가 진정 심술궂은 인간이었다면 이런 배려 같은 걸 했을 리가 없어.
배에서 뱃사람을 조종했던 그 존재가 루시 알른의 본심을 왜곡하는 건가? 그녀가 진심을 내뱉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건가?왜?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그 자가 어투를 보아 딱히 루시 알른에게 적의를 지니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기에 더더욱.
아서는 언젠가 루시가 주었던 던전의 공략법이 적힌 책을 노려보며 나오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서는 잉크가 말라버린 펜 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3왕자님.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조이? 무슨. 아니지. 일단 들어와라.”
방 안으로 들어온 조이는 아서가 펼쳐둔 책을 슬쩍슬쩍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괜한 예는 되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냐. 조이. 피곤하다면서 잔뜩 난리를 치더니.”
“아. 저. 그게.”
“흠?”
“알른 영애가 전해달래요. 3왕자님.”
아서는 조이가 내민 토끼 귀 달린 머리띠를 보고는 눈을 끔뻑였다.
“이건 뭐냐?”
“머리띠요.”
“그건 나도 안다. 내가 물은 것은… 설마 이게 루시 알른이 이야기한 벌칙인가?”
“네에. 이번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착용해야 한다고 말하던데요.”
“미친.”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은 아서였지만 그런다고 눈 앞의 머리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머리띠를 바라보던 그는 긴 한숨과 함께 그것을 받아 머리에 착용했다.
그러자 조이가 다급히 부채를 꺼내 자신의 입을 가렸지만 부채는 시야를 가릴 뿐 그녀의 웃음소리를 막아주진 못했다.
“차라리 대놓고 웃어라.”
“아… 푸흡. 아뇨.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 불. 푸흐흡. 풉.”
얼굴이 벌개진 아서는 조이에게 무어라고 하려다 열린 문 너머에 있는 프레이를 발견했다.
“3왕자님은 그런 취향이구나.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게 아니다! 프레이! 이건!”
“괜찮아. 잘 어울려.”
프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복도를 걸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순간 굳었던 아서는 조이를 지나쳐서 다급히 프레이를 따라갔다.
“가지마라! 내게 변명할 기회를 다오! 제발! 내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달란 말이다!”
*
조이에게 아서의 벌칙을 전달해 준 나는 변장을 벗어던진 카리아, 그리고 내 호위를 맡은 칼과 함께 밤거리로 나왔다.
군도의 저녁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고됨을 잊기 위해 술을 퍼마시다 이성을 잃어버린 이들이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대고. 어디선가는 싸움소리가 들리고. 또 어디선가는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리는 이 곳은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기 전 대학가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나름 모험가 중에서 고참으로 보이는 이들은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딱히 제지를 하진 않았다. 진상놈들에게 괜히 조언을 해봐야 자신들만 피곤해질 것을 아는 탓이겠지.
내가 만나고자 하는 이도 주먹 다짐을 하는 사내들을 한심하단 듯 쳐다보는 이 중 하나였다.
“헤이샨. 많이 기다렸어?”
카리아가 의자를 끌어당기며 인사말을 전하자 헤이샨이라 불린 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저도 방금 막 왔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자. 여기가 내 고용주님. 널 만나고 싶어 하던 분이야. 이름은… 말해주지 않아도 아는 것 같네.”
날 확인한 헤이샨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따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알 것 같다. 루시 알른의 악명에 대해서 아는 거겠지.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지라 난 변명하는 대신 한숨을 칼이 빼내 준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루시 알른이라고 합니다.’
“날 알면서도 표정 관리를 못 하다니. 못 배워먹은 평민답게 멍청하고 무례하네.”
“아! 저. 그.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저는 헤이샨이라고 합니다. 몇 달 전 A급을 달성한 모험가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헤이샨은 평민 출신의 모험가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인사를 선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썹을 치뜨며 그녀의 교양에 감탄했을 터이지만 난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 공작가문의 영애였던 2왕비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야.
“귀족 분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게 요즘 명성이 자자한 알른 가의 영애셨을 줄이야. 너무 놀라서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네요.”
어색한 웃음을 짓는 헤이샨의 모습에 나도 마주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입꼬리가 딱딱해진 것으로 보아 역효과만 낸 것 같았다.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지어지는 웃음이 좀 살벌하긴 하지.
“저어. 알른 영애께서는 이 별볼일 없는 모험가를 왜 만나러 오신 건가요?”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찾고 있어서요.’
“허접한 평민 나부랭이여도 사람은 좋은가봐? 아직도 어떤 노괴가 널 만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노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헤이샨이 고갤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카리아가 한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고용주님. 자세한 건 내가 설명할 테니까 그냥 가만 있어줘.”
응. 내가 생각해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