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형상을 갖추고 남자를 에워싼 것 같았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푸른 거미줄 같은 오브젝트가 공간을 가로지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악몽 속 광경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끔찍하게 생생했다.
푸른 거미줄 오브젝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정신 오염은 남자의 의식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잠깐이라도 집중을 풀면 다시 그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여동생과 청은 여전히 의식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거미줄이 틈만 나면 살을 파먹고 있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미약한 호흡과 온기가 아니었다면, 시체로 착각할 정도였다.
보라 사신과 주황 왕관 사신마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나 한껏 멋을 부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보라 사신의 입가에는 이제 굳은 선만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평온한 표정을 했던 주황 왕관 사신은 이제 미간을 좁히고 찡그리는 중이었다.
미니 사신들의 생소한 모습은 상황의 심각성을 더욱 실감 나게 했다.
남자 자신의 상태 역시 최악이었다.
거미줄에 잔뜩 파먹힌 양손은 너덜너덜했다.
한때 그의 자랑이었던 초인적인 사격 실력도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권총을 제대로 쥐는 것조차 힘겨웠고, 손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조준은커녕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자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보라 사신과 주황 왕관 사신 역시 마지막 힘을 짜내며 의지를 다졌다.
보라 사신의 그림자 참격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검은 불꽃 같은 참격은 주변의 거미줄을 베어내며 한순간 숨 쉴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 틈을 타, 남자는 재빨리 의식 없는 여동생과 청을 향해 달려갔다.
남자의 손은 이미 너덜너덜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자기 롱코트를 벗어 밧줄처럼 사용해서 억지로 두 사람을 자신의 등에 묶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사방을 돌아다니던 보라 사신과 주황 왕관 사신이 남자의 머리 위로 날아와,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한쪽 눈에 박혀 있던 의안에서 미묘한 빛이 반짝였다.
남자에게 익숙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브젝트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보이는 세계.
그것은 마치 노도의 격류와 같았다.
두텁고 빈틈없어 보이는 힘의 흐름 속에서, 남자는 순간순간 생기는 틈새를 포착했다.
“저쪽!”
남자가 외쳤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보라 사신의 참격이 날아갔다.
마치 남자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참격은 힘의 흐름 속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 순간, 거미줄로 만들어진 벽이 마치 종이를 자르듯 쉽게 갈라졌다.
남자의 의안이 흐름을 읽고, 보라 사신의 강력한 참격이 그것을 베어냈다.
그리고 주황 왕관 사신의 보이지 않는 힘이 거미줄의 확률을 조작했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자, 거미줄들은 남자 주변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거미줄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라면!’
남자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잘린 거미줄 사이로 밝은 빛이 비치는 곳에 도착한 순간, 보라 사신과 주황 사신은 깜짝 놀라서 남자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공터였지만, 도주로 따위가 아니었다.
도록도록 굴러다니는 다양한 크기의 눈알들이 바닥을 가득 채운 공간.
그리고 틈조차 베어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거미줄의 공간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유도당한 건가….”
남자의 입에서 허탈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보라 사신의 몸이 흔들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입에서는 핏물 같은 장작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절망이 그들을 완전히 뒤덮은 것 같았다.
남자는 쓰러진 보라 사신을 품에 안으며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때, 주황 왕관 사신의 움직임이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주황 왕관 사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엄마….’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누군가를 발견한 듯한, 순수한 기대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정말, 엄마야….’
그리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표정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침대처럼 써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주황 사신의 얼굴에는 고통이나 불안은 온데간데없고, 편안한 표정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자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던 하늘이.
아니, 거미줄로 만들어진 천장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구름이 가득한 흐린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위협하던 강력한 거미줄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변하고 있었다.
거미줄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달콤하고 부드러운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거미줄은 솜사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꿀타래라고 해야 할까?
달콤한 설탕 실로 변한 거미줄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
남자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죽음의 위협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동생과 청, 그리고 보라 사신도 무사해 보였다.
***
외신의 잔재들을 간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황금빛 헤일로를 머리 위에 쓰자, 외신의 일부인 푸른 거미줄들이 더욱더 빠르게 간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맥동하는 헤일로의 리듬에 맞춰 거미줄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내 발밑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푸른 거미줄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더니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는 말랑말랑한 거미줄 모양 젤리가 남았다.
시선을 들어 주변을 훑어보자, 끝없이 펼쳐진 푸른 거미줄의 바다 위로 풍랑이 몰아쳤다.
그리고 거미줄의 바다 위로 증기가 폭발하는 것처럼 하얀 설탕 실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내 시선이 닿는 대로, 거미줄이 간식으로 변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내 발밑에서부터, 내 시선이 닿는 지평선 끝까지.
마치 땅에 매설해 둔 지뢰가 순서대로 폭발하는 것처럼 거미줄이 사라지고 있었다.
냠.
나는 공중을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설탕 실 하나를 손가락으로 붙잡아서, 입 속에 넣었다.
‘설탕이네.’
처음 볼 때부터 솜사탕이 연상되기는 했지만, 정말 설탕일 줄이야.
하늘로 흩어지는 거미줄들은 모두 설탕 실.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거미줄은 튼튼한 젤리.
외신의 거미줄들은 차례차례 간식으로 변하고 있었다.
뚜방뚜방.
나는 젤리로 변해버린 거미줄 위를 걸어 다니며, 거미줄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 ■ ■ ■ ■>
아직 외신의 파괴 조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거미줄을 간식으로 바꾸다 보면 언젠가 확실히 보이게 되겠지.
그렇게 거미줄을 차례차례 지우며 뚜방뚜방 돌아다니자, 거미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해 나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거미줄이 거대하게 뭉쳐서 해일처럼 몰아치기도 했고, 정신 오염을 일으키는 푸른 안개를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황금색 헤일로와 함께하는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거미줄의 해일은 헤일로의 맥동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고, 푸른 안개는 거미줄보다 더욱 손쉽게 간식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거미줄을 지우기를 얼마나 했을까.
거미줄들은 도저히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느낀 건지, 광활한 태평양을 가득 채운 거미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떨림에 불과했지만, 점점 그 진동이 커졌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실들이 서로 얽히며 춤을 추듯 꿈틀거렸고, 그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중심부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거미줄이 물처럼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나선형의 구멍이었다.
그리고 모든 거미줄은 그 나선의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점점 더 커지고 빨라졌다.
점점 크기를 키운 그 나선은 태평양 규모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평양 전역에 흩어진 미니 사신들과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태평양을 메운 거미줄들이 소용돌이로 변해 바닷속으로 도망가는 것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는 미니 사신들과 인간을 모두 내 앞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젤리 거미줄 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널브러졌다.
젤리 위에 쓰러진 인간들의 상태는 약간 자유 도시 연합 때와 비슷했다.
신체 일부분이 설탕 실로 바뀐 사람부터 시작해서, 거의 전신이 설탕 실로 바뀐 사람까지.
롤케이크 대신 설탕 실이 있다는 점만 달랐다.
시선을 돌리다 보니, 쓰러진 보라 안대 사신과 편안한 자세로 잠이 든 주황 왕관 사신이 보였다.
‘저 아이들도 이번 외신에게 휩쓸렸구나.’
나는 쓰러진 미니 사신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얄미운 주황 왕관 사신은 볼을 한번 꼬집어 준 뒤.
인간과 미니 사신들을 전부 미니 사신 정원으로 보내버렸다.
거미줄이 모두 도망가 버린 태평양에는 바닷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도망친 외신을 쫓아, 바닷속으로 퐁당 뛰어들었다.
‘….’
그렇게 들어간 바닷속은 기분 나쁜 염파로 가득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
[우리는 같이 할 수 있어.]
[하나가 되자.]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불길한 바닷속에 거대한 수중도시와 뒤틀린 거인이 보였다.
그 거인의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깜빡이며 주변을 탐색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촉수가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붉은 외신’처럼 그 형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분명하게 보였다.
제대로 직시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외신의 모습은 계속해서 뒤틀리고 변형되었다.
마치 살아있는 물감 같았다.
때로는 여러 겹의 공간이 중첩된 것처럼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 실루엣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치 안개 속에서 형체를 알아보려는 것처럼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이 외신은 단순히 자신의 형태만 불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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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현실까지도 뒤틀어 버리고 있었다.
바닷물은 갑자기 공허 속이거나 하늘이기도 했고, 공간을 끊임없이 확장해 바다의 넓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외신은 붉은 외신처럼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 거대한 크기와, 셀 수 없이 많은 눈과 촉수뿐이었다.
그 눈과 촉수는 끔찍할 정도의 정신 오염을 머금고 있었다.
아마 인간이라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광기를 품게 만들겠지.
나는 그 외신을 향해 천천히 헤엄쳐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