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4
<저기에 적힌 것이 주신 교회의 사람들이 쓰던 고어라는 걸 생각해보면 주신의 이름을 가벼이 논했을 리는 없다. 진정 저 끝에는 주신이 남긴 것이 있단 소리다!>
할배는 잔뜩 흥분해서 목소리를 키웠지만 난 그를 반쯤 흘려들었다.
내가 군도에 온 이유는 뭐지?
라샤에게 한 번 엿을 먹여주고 싶다는 게 시발점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난 여기에 왔을 거야. 허접 주신이 2왕비의 회한을 풀어주란 퀘스트를 내어 준 이상 내겐 선택지가 없어.
2왕비가 내게 거래를 제안하게 된 과정에도 허접 주신의 영향력이 존재했다. 그 녀석은 내가 연단에 서서 개짓거리를 하길 바랐으니까. 그 후에 일어난 여러 사건에는 내 잘못이 크긴 했지만 어쨌든 허접 주신이 손을 거든 건 사실이지.
…허접 주신은 내가 저 지도를 보길 바랐어. 자신이 남겨둔 것을 찾길 원한 거야.
지금 퀘스트창이 튀어나온 것만 봐도 그래. 허접 주신은 내가 저 보물을 가지길 바라고 있는 게 분명해.
대체 저 안에 뭐가 기다리고 있길래 날 여기로 유도한 걸까?
허접 주신이 내게 장난을 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중요할 땐 나름 주신답게 행동하는 녀석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이는 걸 보면 저기에 기다리고 있는 히든 피스는 분명 상당한 것이리라.
저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카리아와 헤이샨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열띈 목소리로 토론을 나누던 두 사람이 의견을 취합하기 시작한 것은 가게 한 가운데에서 소란을 피우던 모험가들이 술에 뻗어 널부러졌을 무렵이었다.
종업원이 제발 뒤졌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며 그들이 벌인 소란을 치우는 동안 수첩에 여러 내용을 정리한 카리아가 나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고용주님.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 들었지?”
‘아뇨. 안 들었는데요.’
“내가 왜 늙어 빠진 아줌마들의 수다를 들어야 해? 당연히 안 들었지.”
요즘 메스가키 스킬에 도발에 익숙해진 카리아도 이번에는 살짝 긁힌 듯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난 그 분노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러게 뉴비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줬어야지. 지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중얼대니까 딴 생각이나 하는 거잖아.
“그럼 대체 뭐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당당할 수 없었다. 허접 주신이 남겨뒀을 물건을 생각하며 히죽대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으니까.
남자라면 누구나 은행에 쳐들어 온 강도를 쓰러트리는 상상을 한다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어 하진 않잖아?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야.
그렇다고 마냥 입을 다물기엔 카리아의 짜증이 커보였던지라 나는 지도 한 구석에 있는 꼬불 글자를 가리켰다.
‘이거 해석했어요.’
“이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글자 해석했는데?”
“…이 글자를 해석했다고? 어떻게?”
할배의 시대에도 실전되어가던 언어란 말은 사실인 듯 카리아조차 저 언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허접 주신의 이름을 들먹였다. 주신께서 친히 계시를 내려 저 글씨의 뜻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이다.
전후사정을 무시하더라도 납득시킬 수 있는 치트 변명인 계시라는 단어에 카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신께서 친히 기적을 남기셨다라. 진짜 어마어마한 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네.”
그렇게 나는 멍청한 망상을 감춤과 동시에 마냥 놀고 있지 않았다는 명분을 얻었다.
‘그러니…’
“그러니까 아줌마들끼리 수다 떨면서 내놓은 결론을 알려줄래? 분명 허접하겠지만 그래도 참고는 될 거 아냐.”
“으음. 일단 처음부터 설명을 해줄게. 이 지도를 보면…”
카리아가 또 다시 자기만 아는 단어로 유창하게 설명을 하기에 난 과정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과정을 이해해서 뭘 하겠냐. 어쨌든 간에 정답만 맞추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 이 섬부터 뒤져봐야 할 것 같아.”
나란 섬인가. 저 쪽의 지형이라면 대충 다 알고 있지. 게임 속 헤이샨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섬을 이 잡듯이 뒤져야 했거든.
근데 내가 아는 지역 중에서 허접 주신과 관계있던 지역은 없었어. 현실이 게임 속과 달라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러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지니까.
우선은 게임 속 지식을 믿고 움직이자. 첫 섬에서 실패하면 다음 섬부터 바꿔 생각하면 되잖아.
으음. 그럼 일단은 분명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들어갈 수 없었던 진입불가 지역부터 뒤져보는 게 맞나.
‘카리아…’
“노처녀 아줌마. 이 좆밥 섬 세부지도 있지? 내놔.”
카리아에게 지도를 받아든 나는 흐릿한 게임 속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섬을 살폈다.
정확한 길까진 기억 안 나지만 미니맵 정도는 대충 생각나네.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랑 여기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맞아. 사람들이 DLC떡밥이라면서 난리를 피웠던 게 기억에 남아 있어. 분명 여기야.
펜으로 지도 위에 표식을 남긴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끌어봐야 뭐 하겠어. 해야 할 일이면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 낫지. 낮에는 애들 데리고 던전 돌아다녀야 해서 바쁘니까 밤에 다 처리를 해두자.
수치심에 몸부림치고 있을 아서를 나중에 봐야 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건 내일 아침에 봐도 되는 거니까.
“바로 가게? 고용주님?”
‘그러려고요. 안 되나요?’
“왜. 아줌마. 늙어서 피곤해? 하긴 잠 안 자면 주름이 많아진다니까.”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거지? 좋아. 바로 가자.”
지도를 볼 때는 기억이 흐릿했는데 지역을 눈으로 보니까 대충 생각이 난다. 분명 여기에서는 이렇게 가면 됐었지?
“알른 영애께서는 군도에 와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달빛이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길을 찾아내는 내 모습을 헤이샨이 신기해했다. 이 지역에 오래 머문 모험가들도 이 정도는 못 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굳이 거기에다 무어라고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길이라 외웠다고는 할 순 없으니까.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내 옆에 붙어있던 칼이 내 능력이 제 것인 듯 환히 웃으며 헤이샨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가씨께서는 예전부터 길을 찾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답니다. 바깥의 길도. 던전의 길도 말이죠.”
“와아. 정말요?”
“예. 과거 아가씨와 함께 했던 때의 일입니다만.”
성질 더러운 2왕비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사람답게 헤이샨은 칼의 주접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허접견의 시선에서 왜곡된 나의 영웅담을 헛웃음과 함께 들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목표로 하던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 외각에 있는 동굴의 입구. 겉으로 보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장소지만 게임 속에서 여긴 진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 여기인가요.”
헤이샨은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카리아가 그녀에게 설명을 촉구했다.
“여기에 대해 알아?”
“알죠. 저 군도에 오고 나서 수상한 장소는 다 뒤져봤거든요.”
“이 동굴이 뭐길래 그래? 평범한 동굴처럼 보이는데?”
“보기엔 그렇죠.”
헤이샨은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동굴에 들어가려 하자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 막힌 것이다.
그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린 카리아가 헤이샨의 뒤를 따랐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동굴입구에 존재하는 결계는 모든 이들을 가로 막고 있었다.
“뭐지? 처음 보는 형식인데?”
“저도 여기 머무르면서 이런저런 조사를 해봤지만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이런 데 익숙한 두 사람이 골몰을 하는 동안 칼이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한 번 힘으로 뚫어보도록 하죠.”
“…응? 아니. 야! 잠시.”
“하아아!”
카리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검을 치켜 든 칼은 자신의 색이 담긴 검기를 피워 올렸다.
콰아앙!
이전의 대련에서 내 방어를 무너트렸던 것보다 더한 위력의 일검이 동굴 입구로 내리쳐졌지만 결계는 굳건했다.
이럴 것을 예상하진 못한 듯 칼이 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허. 단단하군요. 저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칼 네가 안 되면 나도 안 되겠네. 이야. 이 정도면 가주님이 직접 와야 하는 거 아냐?”
“거기 알른의 멍청이 두 사람. 너네 가주한테 뭐라 그러기 전에 닥치고 뒤에 서 있어.”
이마를 부여잡은 카리아의 협박에 두 기사가 얌전히 물러섰다. 힘이면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 바보들은 더한 힘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단 신성 관련인 것 같긴 한데. 그 쪽 사람을 데려와 봐야 하나.”
<여아야.>
카리아가 혼잣말을 쉴 새 없이 내뱉으며 고민을 하던 그 순간 할배가 말을 꺼냈다.
‘왜요?’
<너라면 들어갈 수 있을 거다.>
‘할아버지가 아는 형식이에요?’
<그런 건 아니다만. 음. 그래. 영웅의 직감이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어투였지만 난 그걸 파고들지 않았다. 계속 따지고 물어봐야 내 속만 더 답답해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 대신 다른 이들을 지나쳐 동굴 앞에 선 나는 결계가 있을 법한 장소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내 손이 허공을 지나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신체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칼의 전력을 다한 공격조차 거부하던 결계는 내 육신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들였다.
그것이 신기해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있으려니 카리아가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용주님. 대체 뭐 한 거야?”
‘글쎄요?’
“글쎄? 못생긴 너희들과 달리 귀여운 나는 괜찮은 거 아닐까?”
“모른단거구나. 잠시만. 몇 가지 실험을 좀 해보자.”
그 후 카리아의 주도로 이런저런 시험을 해보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동굴 안에 나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만들어 줄 뿐이었다.
물론 내겐 별 문제될 사안이 아니었다. 허접 주신이 나를 위해 안배해 둔 곳이라는 게 확실시 된 이상 이 안에 극복 불가능한 시련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으니까.
“안 됩니다! 아가씨!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아가씨를 홀로 보내겠습니까!”
“결계도 못 넘으면서 왜 짖어대는 거야?♡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입구나 잘 지키도록 해. 허접견♡”
“그렇지만! 그렇지만!”
팩트폭행에 울상이 된 칼이 어찌할 줄 몰라하는 동안 내 곁으로 다가온 카리아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주었다. 물약이라거나. 수호의 목걸이라거나. 마법이 각인 된 두루마리같은 것들을 말이다.
“고용주님이 어련히 하시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말해둘게.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나. 알겠지?”
‘걱정 마세요.’
“푸하핳. 오지랖도 넓네. 노처녀 아줌마는 결혼 상대를 납치할 방법이나 걱정하지 그래?”
카리아가 경고하지 않아도 난 무리하게 모험을 할 생각이 없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고 내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내가 새로운 컨텐츠에 굶주린 건 사실이지만 내 목숨을 판돈 삼을 정도로 정신이 나간 건 아냐.
손을 휘휘 내젓는 것으로 칼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안심시킨 나는 신성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내고서 동굴 안 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을 무작정 걷길 얼마나 했을까. 동굴의 길 끝에 도착한 나는 그 곳에 자리 잡은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다.
악신이 만들어낸 던전 입구와는 달리 자그마한 불길함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썩은물인 나조차도 본 적 없는 형식인데. 악신이 아니라 허접 주신이 직접 만든 던전인 건가.
재밌겠네. 뭐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새로운 컨텐츠에 신이 나 던전의 문을 연 순간.
“푸하하핳!”
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아야.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게야?>
할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계라 말을 할 틈을 잡을 수가 없었다.
푸흐. 푸하핳.
…
하아.
젠장.
나 이 던전 공략해 본 적 있어.
게임의 본편이 아니라 소울 아카데미 악귀 짓을 하며 여러 모드 던전을 공략해 볼 때 와 본 적이 있다고.
야.
허접 주신.
네가 그 빌어먹을 모드들의 주인이었던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