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6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는 어린 루시의 모습에 머리가 굳어버렸다.
내가 문 너머에 있으리라 생각하던 존재는 나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키득거리는 꼬마아이가 아니라.
어. 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어린 루시를 상대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저 꼬맹이랑 뭘 가지고 겨뤄야하는 건데?
내가 적에게 가차 없는 성격인 건 사실이지만 저 자그마한 꼬맹이의 뚝배기를 깰 정도로 험악한 인간은 아냐. 허접 주신도 그런 걸 바라서 어린 루시를 여기에 내버려두진 않았을 테고.
그럼 뭐지? 뭘 해야 하는 거지? 메스가키끼리 만났으니까 매도 배틀을 해야 하는 건가? 누가 먼저 상대를 꼴 받게 하는지를 가지고 승부를 겨루는 거야?
하. 멍청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허접 주신이 개변태 새끼인 게 확실하다고는 하지만 메스가키 둘이 서로 매도하는 걸 보고 싶다고 이 난리를 피울 녀석은 아니잖아.
…아니겠지? 그래도 주신인데 그 정도로 막장일 리가 없잖아.
아무 말 없이 키득대기만 하는 루시의 모습에 두 손을 든 난 다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할아버지! 어떡하면 좋죠?!’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공허한 나의 목소리뿐이었다. 당황해서 메이스에 신성을 흘려보낸 나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깊은 잠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건 허접 주신의 수작일 거야. 할배를 잠에서 깨운 게 그 녀석이니 잠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이 너머에 뭐가 도사리고 있길래 이런 귀찮은 짓까지 벌이는 거야?
툭툭. 멍하니 메이스를 바라보던 나는 앞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린 루시가 바닥을 차서 내 시선을 끈 것이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아무런 말없이 앞 쪽으로 발을 움직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날 살폈다.
따라…오라는 건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발을 움직이자 어린 루시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톡톡 가벼운 걸음으로 동굴을 걸었다.
“저기.”
어라? 내 목소리가 멀쩡하게 나와!? 메스가키 스킬에 의한 번역이 발동되지 않는 걸 확인한 나는 다급히 어린 루시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루시?”
루시는 왜 부르냐는 듯 날 올려다봤지만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어렸을 때라 해서 루시의 성미가 이렇게 얌전했을 것 같진 않고 그냥 말을 못할 뿐인 거려나.
그래도 내 말은 들을 수 있는 듯 하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반응을 지켜보도록 할까.
“우리 지금 어디에 가는 거야?”
내 물음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으로 네모를 그리고 그 위에다 세모를 다시 한 번 그렸다.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 어린 루시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을 집이라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녀가 말한 바를 이해했다. 어느 순간 척박하던 동굴의 정경이 초원으로 바뀌며 알른 가문의 저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어린 루시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미라. 정말 내가 안아도 괜찮은 걸까? 뭐가 잘못 되지 않을까?’
‘당신은 아기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취급주의물품?’
‘후후. 베네딕.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에요. 그렇게 연약할 리가 없잖아요.’
미라라 불린 여인이 떠넘기듯 아이를 넘기자 베네딕이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기는 베네딕의 거친 손길이 어색한 듯 몸을 뒤척이다가 베네딕의 사나운 얼굴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었다.
‘어. 어. 어떡하지. 울 것 같은데?’
‘어떡하긴요. 울면 달래야죠. 도전해 보세요.’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베네딕의 목소리에 놀란 듯 아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어찌할 줄을 몰라하던 베네딕이 다급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본판이 본판인지라 그의 얼굴은 광대보단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를 닮았지만 취향이 특이한 아기는 그것이 재밌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미라! 애가 웃어!’
‘잘하면서 왜 지레 겁을 먹고 그래요.’
일상의 행복이 묻어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뒤로 한 채 또 다시 풍경이 바뀐다. 방금 전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아기는 어느새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생긴 모습만 보면 너무도 귀여워서 누구라도 잘 대해주고 싶어 할 아이였지만 정작 아이를 바라보는 사용인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추녀. 마마 어디 있어.’
문제는 어투였다. 도대체 누구를 보고 따라하는 것인지 모를 공격적인 어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적의를 품게 만들었다. 선하신 두 분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찌 저럴 수가 있는 것이냐고 사람들은 저 마다 한 마디씩을 내뱉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이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나는 아이가 바라여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저주스러운 축복이 저 자그마한 여자아이에게도 머무르고 있던 것이다.
스스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했던 여자아이의 속은 점차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저주가 주어진 거야?
왜 나는 바라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어?
왜 나는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응?
응?
왜 나만.
‘루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인 베네딕은 루시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귀엽지 않으냐며 해실거렸고 어머니인 미라는 루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부드러운 웃음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여자아이는 부모의 곁을 떠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의 품을 떠나는 순간 무수한 적의가 쏟아지기에 바깥으로 나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면 그냥 영원히 저택 안에 머무르고 싶다고 말이다.
툭툭.
무언가가 허리춤을 건드리는 감촉에 고갤 돌린 나는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루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무너졌다.
“허억?!”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아이의 기억이 머릿속을 휘젓는 것을 이악물고 버텨냈다.
아이가 느꼈던 행복. 아이가 느꼈던 좌절. 아이가 느꼈던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만들어진 고통은 여지껏 느꼈던 그 어떤 아픔보다 격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의 기억이 완전히 내 뇌에 스며들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낸 나는 온갖 액체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냈다. 영약을 먹었을 때 이후로 이만큼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나? 죽을 뻔한 적은 몇 번 있지만 그 때는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으니까 말야.
<루시! 정신이 드느냐?!>
‘일단은요.’
<정말 다행이구나!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발작을 하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할배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들자 던전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방금 전에 내가 보았던 그건 모두 다 환상이라는 건가.
기어서 벽 근처에 도달한 나는 거기에 기대어서 방금 전 보았던 걸 떠올리다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 루시의 관한 소문들이 너무 기괴하다는 생각은 했어. 아무리 철이 없는 꼬맹이라도 제 목을 내놓은 것마냥 기행을 벌이는 건 이상하잖아.
하지만 루시가 메스가키 스킬의 피해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 내가 고통 받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고통을 받았을 테니까.
아니 내가 받은 고통과 비교하는 건 루시에게 실례겠네. 이미 마음의 상처에 무뎌진 사람과 아무것도 모른 채 고통 받아야 했던 사람이 어떻게 같겠어.
거칠어졌던 숨을 간신히 달랜 나는 루시의 기억과 감정을 되짚어보다가 문득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것들이 마냥 생소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루시의 몸을 빌리고 있기에 생겨난 착각인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루시.>
‘예전의 기억을 봤어요.’
<예전?>
‘네. 예전.’
<…좋은 기억은 아니었나보구나.>
할배는 무언가 눈치 챈 듯 그 이상 파고들지 않고 입을 닫았다. 다시금 자리한 침묵 속에서 난 멍하니 던전의 천장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루시를 떠올렸다.
내가 아는 허접 주신은 개변태새끼에 신다운 위엄을 찾아볼 수 없는 폐급이지만 최소한 악한은 아냐. 그런 녀석이 왜 루시에게 이딴 저주를 준 걸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고개를 휘저어 떨쳐낸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접 주신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보물지도의 끝에 도달한다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판단을 내리는 건 그 때 가서도 충분해.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문에 발을 들이자 날 기다리던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고용주님. 안에…”
“뭔가가 있었…”
그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뒤 쪽으로 고갤 돌리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었던 동굴이 자취를 감춘 채였다. 자신의 역할을 끝마쳤다는 건가.
“아가씨?”
칼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멀쩡하단 걸 보이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허접견. 잠시 혼자 있었다고 분리불안이라도 온 거야?”
목소리를 낸 후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어라? 어라라? 뭔가 중간에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에 말을 멈추자 주변의 다른 이들이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뭐…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라도 지금 내 표정은 당당할 텐데?
“고용주님.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은. 허접한 던전이 있길래 박살내고 왔을 뿐이야.”
카리아의 물음에 답하던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메스가키 특유의 당당한 모습은 없었다.
카리아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의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는 여자아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