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7
눈동자 너머에 비친 나를 확인한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내가 스스로 바라는 대로 움직이고 있어? 메스가키 스킬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채 당혹을 드러내고 있다고?
다급히 인벤토리에서 거울을 꺼내든 나는 거기에 비친 여자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이 세상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나는 지겹도록 루시의 얼굴을 마주했다. 너무도 귀엽고 예쁘다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에 무덤덤해질 정도로.
그렇기에 난 스스로가 지을 수 있는 표정에 제한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메스가키 스킬의 제약은 나에게 허약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헌데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루시의 모습은 달랐다. 항시 자리하던 당당함과 거만함 대신 혼란을 담은 그녀의 모습은 그 나이 대의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비쳤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직 나는 루시가 보여주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아얏.”
보드라운 볼을 마구잡이로 잡아 당겼더니 입에서 절로 고통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야.
이게 꿈이 아니라고? 나 진짜로 메스가키 스킬의 제약 없이 행동할 수 있게 된 거야?!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나는 거울을 보며 온갖 표정을 지어 보았다.
웃어 보았다가 미간을 찡그려봤다가 울상을 지어 보았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울 속에서 바뀌어가는 표정을 살피던 나는 카리아가 거울을 뺏어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고용주님.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용주님이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 아줌마? 에휴. 나이도 많은데 이렇게 눈치도 없으니까 주변에 남자가 없지.”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난 진심으로 긁혀서 소리를 내지르는 카리아를 무시한 채 생각을 이어나갔다.
방금 전 나는 평범하게 카리아에게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려했다. 그렇지만 내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은 온건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메스가키 스킬은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 제약이 약해졌을 뿐.
근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을 할 때랑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올 때 약간의 차이가 존재했는데 지금은 아냐. 그 미세한 차이가 자취를 감춰버렸어.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지금 말할 때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는 표현보다는 올바름을 찾았다고 해야겠구나. 내 보기엔 지금이 훨씬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니.>
‘그…런가요?’
<그래. 괴리가 사라지지 않았느냐.>
그런가? 할배의 말을 듣고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잘 체감은 되지 않았다. 할배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맞기야 하겠지만. 음.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나에게 물어봐도 답을 해주기가 어렵구나. 네 변화는 네가 본 것 속에서 생겨난 것일 테니.>
결국 제대로 된 답을 알려면 허접 주신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건가.
“고용주님?! 내 말 듣고 있어?!”
“카리아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저희 아가씨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말야.”
“그리고 카리아님께서 미모를 지녔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아가씨께서 무어라 한들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웃어 넘겨 배포를 보이시는 게 어떨는지요?”
아카데미의 여러 여학생들이 연심을 품을 만큼 괜찮은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끔한 발성. 거기에 칼 특유의 세치혀가 합쳐지자 카리아의 표정이 잠시나마 풀렸다.
허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카리아는 기사의 가면 뒤에 자리한 칼의 본심을 금방 추측해냈다.
“야. 너 지금 주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내가 고용주님한테는 은혜가 있어서 뭘 못하지만 넌 아니거든? 기대해라. 꼭 조져줄게.”
카리아의 분노를 짐작한 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동안 헤이샨이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와 지도를 내밀었다.
“영애께서 저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신 건 맞죠?”
“어느 허접이 빈약한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던전이었어. 별 재미도 없더라.”
“그럼 지도에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지도를 받아들어 거기에 신성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지도의 위에 새로운 그림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저희는 섬 모든 곳을 돌아야 할 것 같네요.”
그 그림은 다른 섬의 모양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 곳에서 또 다른 비밀을 찾아내라는 건가.
허접주신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피식 웃고는 지도를 다시 헤이샨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내게서 일어난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긍정적인 방향인지 부정적인 방향인지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여정의 끝을 봐야 한다는 거지.
모든 던전을 공략한 후라면 허접 주신이 내게 무얼 전하고자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어느덧 검었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을 본 나는 기지개를 키고서 발을 움직였다.
숙소로 돌아가서 두어시간 정도는 자자.
오늘 하루 동안 생겨난 일이 너무 많았어.
조금은 쉬어야지.
*
지난 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아서를 잔뜩 놀린 조이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평상시에 매번 놀림만 당하던 왕자님께 그 수모 중 일부를 되갚아주는데 성공하다니!
알른 영애의 장난기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 왕자님께서 오랫동안 저 토끼 머리띠를 부끄럽게 여겨주면 좋을 텐데.
프레이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던 아서의 모습을 떠올린 조이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지만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요 근래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적이 없던 그녀의 몸이 살기 위해 조이를 잠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꿈조차 꾸지 않을 만큼 편안한 수면을 취한 그녀는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가를 비비며 몸을 일으킨 조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녘의 풍경을 보고 길게 하품을 했다.
어제 저녁에 나갔던 알른 영애께서 지금 돌아오신 건가. 아직 출발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까 좀 더 자고 내일 아침에 인사드리자.
다시금 베개에 머리를 가져다 댄 조이였지만 그녀는 잠에 들 수 없었다. 알른 기사단에서의 거친 훈련을 겪은 그녀의 몸이 이미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고 판단 내렸기에.
이대로 누워 있어봐야 괴로울 뿐임을 직감한 조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단장을 했다.
능숙하게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끝마친 조이가 1층으로 내려가자 피로를 달래는 기사들의 모습과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루시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는 의자에 앉아서 바닥에 닿지 못한 다리를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걸까?
평소의 표독스러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귀여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조이가 계단을 내려오자 기척을 느낀 루시가 고개를 돌렸다.
“얼빵영애. 여태까지 안 잤어? 덜 피곤했나보네. 더 굴려야겠는 걸?”
그녀의 입밖으로 새나오는 말은 여느 때처럼 살벌했지만 표정은 달랐다.
루시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은 오랫동안 루시의 곁을 지켰던 조이도 본 적 없을 만큼 해맑았다.
그 미소를 본 조이는 새삼 루시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 아이인지를 느꼈다.
평상시 루시는 항상 거만하고 다른 이들을 깔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워낙에 외모가 출중한지라 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부정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지만 특유의 표정이 외모를 돋보이게 하진 않았다.
찡그린 얼굴보다 해맑은 얼굴이 더 예쁜 건 상식이니. 루시는 항상 자신의 미모를 까먹고 있는 셈이었다.
헌데 평소 얼굴을 펴질 않았음에도 탄성을 불러일으키던 루시가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 것이다. 그 위력이 얼마나 출중하겠는가.
멍하니 루시의 미소를 바라보던 조이는 우당탕하는 소음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칼. 얘 왜 이래?”
“아가씨의 웃음을 보고 정화된 거겠지.”
“아가씨의 미소가 아름답긴 하다마는 이건 좀.”
“…가주님께서 아시면 기함을 하겠군.”
“미리 명복을 빌어둘까.”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한 채 쓰러진 칼을 두고서 알른의 기사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지만 조이는 그 말들을 귀에 담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조이의 당혹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듯 고갤 갸웃거리던 루시는 폴짝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조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얼빵영애. 어디 아파? 이젠 하다하다 몸까지 얼빵해 진 거야?”
조이를 올려다보는 루시의 시선에는 평소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던 걱정이 서려 있었다.
뭐지? 이게 정말 알른 영애가 맞나? 내가 아는 알른 영애께서는 결코 이런 표정을 짓지 않는데?
나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잠에서 깬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야?
혼란 속에서 눈동자를 떨던 조이는 자신의 코를 찌르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 계단에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야야…”
당혹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던 조이는 자신이 방금 전에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에 익숙하지만 어째선지 좀 더 맑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푸하핳. 완전 바보 같아.”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조이는 아예 터져버릴 듯 붉어진 얼굴을 부채로 가리면서 루시의 얼굴을 살피다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알른 영애.”
“응? 왜? 얼빵아? 너무너무 부끄러우니까 제발 놀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러고 싶긴 하지만 부탁한다고 놀리는 걸 멈추진 않으실 거잖아요! 그걸 빌미로 더 놀릴 거면서! 제가 영애한테 어디 한 두 번 속는 줄 아시나!
속으로 잔뜩 투정어린 목소리를 낸 조이는 길게 숨을 내쉬어 평정을 되찾은 후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밤중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얼빵이 답지 않게 눈치가 좋네. 응. 뭔가 있었어.”
루시는 조이의 의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있어 자신이 변했음을 긍정한 것이다.
“궁금해?”
“예. 무척이나.”
“흐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얼빵 영애는 친구니까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어제 밤에.”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에 루시의 대답을 기대하던 조이였지만 루시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푸흐. 푸흐흫.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 봐. 내가 정말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네?”
“얼빵이가 잔뜩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까 비~밀로 할래. 안 말해 줄 거야.”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루시의 모습에 조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이거 진짜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