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의 깊숙한 곳, 회색 벽과 차가운 금속 문이 늘어선 복도 끝에 ‘회색 사신 격리실’이라는 표지판이 달린 방이 있었다.
예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드디어…!”
예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평양 사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예린은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 지구적 규모 사건의 종결은 곧 회색 사신의 귀환을 의미했고, 예린은 회색 사신과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보안 카드를 갖다 대자 문이 살짝 열렸고, 예린은 희희낙락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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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미니 사신들밖에 없었고, 회색 사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힝.
예린의 입에서 실망스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예린은 격리실 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안 돌아왔나 보네.….’
아쉬움이 가슴을 스쳤지만, 슬퍼하지 말라며 발치에 달라붙어서 토닥이는 미니 사신들을 보며 예린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예린은 격리실 중앙에 놓인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리모컨을 집어 들어 벽에 걸린 대형 TV를 켰다.
화면이 밝아지며 뉴스 채널이 나왔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속보입니다. 태평양 전역을 뒤덮었던 대규모 정신 오염 현상이 극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이번 사태는 태평양 중심부에서 시작되어 미 서부 해안은 물론 하와이와 일본 열도까지 영향을 미쳤던 초유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 위기를 해결한 주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특급 오브젝트 ‘회색 사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임스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회색 사신은 단독으로 태평양 한가운데로 진입해 단시간 만에 오브젝트를 제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이번 활약으로 회색 사신의 능력이 다시 한번 입증되면서, 몇몇 오브젝트 협회에서는 회색 사신의 등급 상향 조정을 심각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회색 사신의 능력이 기존 특급을 넘어서는 수준이라며, ‘초월급’ 신설 논의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액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추산되며, 각국 정부는 신속한 복구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회색 사신의 활약으로 인명 피해는 최소화됐지만, 정신 오염의 후유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 관계 당국의 철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서는 녹화 화면이 흘러나왔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고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회색 사신의 모습.
그때, 예린의 주변에 모여 있던 미니 사신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다!’
‘엄마!’
TV 화면에서 회색 사신을 발견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미니 사신들.
‘….’
그리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미니 사신들.
대부분의 미니 사신들은 마치 TV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린은 폴짝폴짝 뛰는 황금 사신을 하나 붙잡더니,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들여다보았다.
“TV를 즐기는 미니 사신이가 점점 늘어나네…. 사신이에게 옮은 걸까?”
예린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하지만 황금 사신은 예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때 예린의 시선이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다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미니 사신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처음 격리실에 들어왔을 때보다 미니 사신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예린의 눈이 크게 떠졌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신이가 돌아왔구나!”
예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심장은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니 사신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그러자 몇몇 미니 사신들이 히히 웃으며 예린에게 작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달려 나간 예린은 안뜰을 지나, 미니 사신 정원 내부로 들어섰다.
달콤한 핫초코의 향기와 말랑한 마시멜로.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가득한 미니 사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 사신들의 뱃살을 두들기고 있는 회색 사신을 발견했다.
예린은 잠시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회색 사신에게 달려갔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앙대!’
‘엄마가 속였어!’
나는 댖지가 된 황금 사신들의 뱃살을 두들기며 놀고 있었다.
히히.
댖지가 된 황금 사신들은 전부 나에게 융합시켜달라고 달려든 황금 사신들이었다.
융합이 재밌는지, 사방에서 몰려드는 황금 사신들을 융합시켜 주던 도중, 문득 좋은 생각이 나버렸다.
‘융합을 미끼로 황금 사신들을 유인하다가 댖지로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건전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융합을 미끼로 황금 사신들을 잔뜩 끌어모으다가, 쾅!
그 결과가 이 황금 사신 댖지 랜드였다.
‘앙대!’
나는 황금 사신들의 원통한 의지를 들으며, 황금 사신들의 통통한 뱃살을 두들기고 다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황금 사신들과 놀고 있었더니, 미니 사신 정원으로 예린이가 나타났다.
“사신아! 테마파크로 놀러 가자!”
그러더니 나를 다짜고짜 고양이처럼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만들고 있던 그 테마파크가 드디어 완성된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얌전히 예린의 손에 들려 테마파크를 향했다.
***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를 달구는 한낮, 회색 사신 테마파크 입구는 예상 밖의 북적거림으로 가득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 있었다.
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옆에 멍하니 서 있는 회색 사신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연구소를 몰래 빠져나와 둘이서만 몰래 놀러 다니려고 했지만, 실패해 버렸다.
아무리 세희 연구소가 엉망이라도 회색 사신과 당당히 정문을 빠져나오는 것은 무리수였다.
보안팀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노리고 나왔지만, 처음에는 “나도 같이 놀러 가자!”라고 하며 세희 언니가 달라붙었다.
그리고 연구소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정문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던 서아 언니에게 붙잡혀 버렸다.
그렇게 탈출기가 허무하게 마무리되나 싶은 순간, 세희 언니가 “세희 연구소 소풍이다!”라고 핸드폰으로 연구소 전체 방송을 날려버렸다.
결국 예린의 테마파크 탈출 시도는 세희 연구소의 단체 소풍으로 변모해 버렸다.
힝.
예린이 회색 사신과 함께 매표소에서 줄을 서고 있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전과 달리 호의 혹은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예린은 괜히 자신이 칭찬받는 느낌이라 어깨가 으쓱해졌다.
매표소에 도착하자, 회색 사신을 보고 약간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직원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회색 사신 테마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유 이용권 달아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예린은 회색 사신을 들어 올리더니 매표소를 향해 내밀었다.
회색 사신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예린은 그 모습을 보고 히히 웃었다.
하지만 미니 사신 허리둘레에 맞게 만들어져서 그런지, 회색 사신은 장착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손가락에 끼우기에는 헐겁고, 손목이나 발목에 끼우기에는 너무 작았다.
‘….’
예린이 고심하고 있자, 회색 사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히히 웃었다.
“아!”
예린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자유 이용권을 회색 사신의 머리에 묶어 버렸다.
회색 사신은 포니테일이 된 채, 뚱한 표정을 지었다.
매표소를 지나서 나오자, 세희 언니와 서아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 언니는 원래 데리고 다니던 황금 사신에게 벨트를 매어줬는데, 그 황금 사신은 히히 웃으며 허공에다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마 저 옆에는 영체 상태인 새싹 사신이 있겠지.
새싹 사신이랑 친한 황금 사신들은 박수 치기 놀이를 자주 하던데,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희 언니는 돈이 아깝지도 않은지, 잔뜩 데리고 온 황금 사신들에게 전부 자유 이용권 벨트를 매어주었다.
세희 언니는 돈 낭비를 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서아 언니를 향해 소리쳤다.
“한 명만 벨트를 하면 나머지가 슬퍼하잖아!”
“!”
그러자 서아 언니는 ‘그런 깊은 뜻이!’하는 표정으로 놀랐다.
예린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며, 언니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어디부터 가볼까요?”
예린과 회색 사신의 테마파크 투어의 시작이었다.
***
해 질 무렵의 붉은 하늘이 세희 연구소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붉은 빛 아래에서, 협회장의 마지막 손녀였던 붉은 사신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사신의 머리카락이 저녁 바람에 나부꼈다.
마지막 붉은 사신의 눈동자는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고민이 감돌고 있었다.
‘애착 인간이라….’
붉은 사신의 작은 의지가 밖으로 스며 나왔다.
마지막 붉은 사신은 애착 인간에 대한 생각이 대부분의 붉은 사신들과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붉은 사신들은 검은 양복의 남자를 자신의 애착 인간으로 삼았거나 애착 인간을 만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면, 마지막 붉은 사신은 몇몇 애착 인간을 만든 붉은 사신들처럼 애착 인간을 찾고 싶은 마음을 작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혁명!’
문득 의지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붉은 사신의 시선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유일하게 손녀가 아닌 붉은 사신이자, 가장 귀여움받는 붉은 사신이 양손을 하늘로 뻗고 의지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붉은 사신들도 ‘혁명!’을 하나둘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지막 붉은 사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잠시 후, 마지막 붉은 사신은 결심한 듯 깊게 불꽃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지면으로 불꽃을 내뿜으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은 애착 인간을 찾기 위해서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은 온기가 도움이 될, 추운 북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