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8
숙소의 요리사는 밤 늦은 시간의 무례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멋진 요리를 우리에게 대접해줬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의욕이 넘쳤던 것은 아니다. 자고 있는데 무턱대고 요리를 해달라 그러면 당연히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정상이지.
하지만 충분할 정도로 많은 돈에는 불쾌함을 행복으로 바꿀 위력이 있었다.
잠시 기다려달라 소리친 요리사는 다급히 주방 안 쪽으로 들아가서는 요란스런 소리를 내더니 괜찮은 음식을 내왔지.
역시 옛 성현의 말씀에는 틀린 게 없어. 상대의 기분이 나빠 보일 때는 돈이 부족하진 않았나 생각해봐야 하는 법이야.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너도 내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왜요?’
<나는 충분히 옛 성현이라 불릴 법한 사람이다만.>
네 친구가 내 말씀을 가지고 예배를 하는 것도 들은 적 있다는 할배의 말을 난 한 귀로 흘려들었다.
세상에는 할배의 잔소리를 하나하나 받아주는 것보다 훌륭한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안 된다며 혀를 차는 할배를 내버려 둔 채 수저를 든 나는 파스타를 입 안에 넣었다.
특별한 것 없이 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했을 뿐인 요리였지만 밤 동안 여러 일을 겪었던 나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한 별미였다.
빈 속을 채우느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으려니 갑자기 조이가 쾅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이대로는 안 돼요!”
얘 갑자기 왜 이래? 공작 가문의 영애라는 애가 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소란을 떨어도 되는 거야?
속에서 자연스레 매도의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입 안에 파스타가 가득 들어 있었기에 난 말을 하는 대신 눈으로 조이를 질책했다.
“그게 안 된다는 거에요! 지금의 영애는 너무 귀엽다고요!”
아니 얼빵아. 말을 할 거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되겠니?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 되잖아.
“잘 들으세요! 알른 영애! 어제까지의 영애는 항상 표독스럽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서길 힘들어했죠!”
그야 그 땐 메스가키 스킬이 행동을 강제하고 있었으니까. 스킬이 바라는 행동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영애의 표정은 무지무지하게 다채롭다구요!”
조이의 말대로야. 여전히 메스가키 스킬의 제약은 내게 매도를 강요하지만 행동까지 붙잡지는 않아. 바라는 대로 웃고 울고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할 수 있어.
“얼빵아. 그게 뭐가 문제야? 혹시 귀여운 내가 더 귀여워져서 질투하는 걸까? 여자의 질투는 이렇게나 추하구나.”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런 음습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아니지. 조이 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순수하게 칭찬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말없이 웃음을 지어보였더니 조이가 끙끙거리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내질렀다. 귀족 영애다운 고귀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다 떼고 말씀드리자면 지금 영애의 모습은 너무 파괴력이 강하단 거에요!”
“…얼빵아. 알른의 뇌근육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불쌍해라. 그래도 예전엔 이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는데.”
오늘 따라 감정 조절을 왜 이리 못하는 거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주라도 걸린 건가? 혹시나 싶어 신성마법을 사용해 봤더니 조이가 자신의 마력으로 내 마법을 쳐냈다.
놀랍네. 알른 기사단에서 처음 대련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 속도의 캐스팅을 하진 못했는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만큼이나 성장한 건가.
아니. 아니네. 게임의 상식에서 벗어나 유저의 상식을 받아들인 그녀는 여태까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왔어.
알른 기사단의 훈련은 그저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줬을 뿐이야.
조이의 성장에 놀라 흐뭇한 웃음을 지었더니 양 뺨을 붉힌 그녀가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젓다 빽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일단 잠자코 제가 하는 말 좀 들어주세요!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누가 말하지 말래? 내가 입을 틀어막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람? 정말이지 얼빵이는 기품이 없네. 한심해.”
“끄아아악!”
울분을 다스리기 어려운 듯 발로 콩콩 바닥을 두드리던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얼굴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방금 전의 분노가 사라지고 평온이 깃들었다. 이제 좀 귀족답네.
“백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드리는 게 낫겠죠. 영애. 저기를 보십시오.”
조이가 가리킨 곳에는 변태 사도마냥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쓰러진 칼이 있었다.
“저 허접견이 왜?”
칼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점점 더 변태 사도의 개소리에 공감할 수 있게 되어가는 게 좀 징그럽긴 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좋은 녀석이니까. 어느 정도까진 허용해 줄 수 있어.
“…그렇군요. 저 분으로는 짐작이 안 되시겠네요.”
조이도 칼이란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듯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리셨습니다! 다음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였다. 요리사가 자신의 요리를 직접 들고 우리 곁에 나타났다. 금화 하나를 얻은 게 기쁜 듯 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 잘 됐네요. 요리사님. 잠시 기다려 주세요.”
“예?”
“영애? 이 분을 보고 미소를 지어주시겠어요?”
영문을 모를 부탁이었지만 그래도 조이가 한 부탁이었기에 난 기꺼이 그 말을 따랐다.
별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요리사의 눈을 마주하고서 웃는다. 멋진 요리를 대접해 준 그에게 미소 하나 선물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저. 저.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내 미소를 마주한 요리사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더니 다급히 주방 안으로 도주했다. 안에 다급하게 진행 중인 요리가 있었던 걸까?
“저걸 보고도 이해를 못 하시겠나요?”
“뭘?”
“…방금 걸로 이해했습니다. 영애께선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시군요.”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 거냐며 얼굴을 쥐어싸매는 조이를 보면서 고기를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할배가 머릿속에서 목소리를 냈다.
<네 친구가 하는 말을 따르거라.>
‘왜요?’
<이유를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설명하기 싫다. 다만 언제 내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있더냐?>
그건… 그렇지.
<선현의 말씀이다. 따르도록.>
우쭐대는 듯한 할배의 어투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가면을 쓰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애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에요.”
가면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오늘 보았던 루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보았던 어린 시절의 루시는 행동까지 강제당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언제나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담겨있었지.
허나 그 순수함과 선의는 메스가키 스킬의 강제성에 의해 악의로 변질되어 버렸고 그 악의에 당한 자들은 루시에게 악의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 끝에 어린 루시가 택한 것은 가면을 쓰는 것이었다. 순수함과 선의가 받아들여질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먼저 벽을 치는 걸 택한 거다.
베네딕과 미라의 앞을 제외하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어투에 걸맞게 행동했다. 어차피 미움 받게 될 거라면 애초에 희망을 지니고 싶지도 않다는 것처럼.
“영애?”
조이의 부름에 현실로 되돌아 온 나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그녀의 가면을 살피며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냈다.
“자기 표정도 제대로 관리 못하면서 누굴 가르치겠단 건지. 주제 파악도 못하는 허~접.”
“가르치는 거랑 하는 거랑은 별개라고요! 영애께서도!…”
가면이라. 그래. 필요하긴 하겠네. 나는 메스가키 스킬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 스킬 자체는 무척이나 유용하니까.
“뭐 그래도 얼빵이가 얼마나 멍청한 지 구경하는 건 재밌을 테니까. 뭘 가르치려는 지 구경이나 해볼게.”
“…어. 배우시겠다는 거죠?”
“대신에 말야. 나는 너~무너무 착해서 받기만 하는 건 싫거든? 나도 얼빵이한테 아~주 재밌는 걸 가르쳐줄게.”
“네? 재밌는 거라뇨?”
“허접 던전들을 박살내는 법 말야. 멍청한 불쌍왕자님도 어찌저찌 따라올 정도니까 얼빵이도 할 수 있을 걸? 죽을 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뭐 내 알바는 아니니까.”
내 말을 듣고서 눈동자를 떨던 조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내 눈치를 봤다.
“저어. 거부권은.”
“엉엉 울면서 싫다고 빌어볼래? 얼빵이의 추한 모습을 보면 조~금은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없으면 없다고 말하세요…”
*
조이가 내게 알려준 가면을 쓰는 방식은 다소 우악스러운 것이었다. 표정을 만들어내는 근육 하나하나를 감지해서 억지로 조종한다니.
‘저희 공작가는 마력을 통해 이를 조종합니다만 무인인 영애라면 스스로의 감각으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에요.’
조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표정을 만들어내는 근육이 얼마나 많은 게 그걸 하나하나 조정한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조이에게 조언을 구해봤더니 그녀는 고갤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니까 되던데요?’
왜 이 정도도 못하냐는 듯 의문을 표하던 조이를 대신해 우리 둘을 히죽거리며 구경하던 카리아가 조언을 건네주었다.
‘입꼬리 올리지 마. 해맑은 표정도 하지 말고. 콧노래도 부르지 말고.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카리아가 시키는 바에 따르느라 고생하던 나는 왜 이래야 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품었지만 친구의 부탁도 못 들어주는 것이냐는 조이의 투정을 이길 순 없었다.
밤을 새어가며 노력한 것이 성과를 보인 것일까. 아침에 만난 아서는 나의 변화를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짐작할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고지식하게 토끼 머리띠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와서 여느 때 그랬던 것처럼 대하고 말았거든.
아서는 부끄러움을 견디느라 내 변화를 살필 겨를도 없었을 거야.
“루시. 루시.”
“뭔데. 바보 검사.”
“뭔가 달라졌어.”
하지만 프레이는 달랐다. 나름 가면을 잘 썼다 생각했거늘 프레이는 순식간에 내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치?”
나는 표정을 풀고 웃어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내 미소를 마주한 프레이는 눈을 반짝이고는 똑같이 환한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프레이가 손을 이용해 억지로 표정을 만든 순간 난 그녀의 의도를 이해했다. 내 다양한 표정을 보고 싶은 거구나.
“나보다 약한 허접한테는 이게 끝이야.”
“…치. 두고 봐.”
투덜대는 프레이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니 토끼 머리를 쓴 채 환히 웃는 아서와 피로에 찌든 조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와라. 조이. 너도 이 지옥에 발을 디뎠구나.”
“발을 디뎠다는 표현은 잘못되었습니다. 절벽에 떨어트려졌다는 표현을 사용해 주세요.”
“하하. 어쨌든 감상은 어떠냐.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않으냐?”
“차라리 마법학 과목 세 개를 더 듣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아연실색하는 아서의 표정이 웃겨서 웃음을 터트린 나는 조이의 날선 시선을 받고는 다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으음. 이거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리겠네.
“뭐냐. 루시 알른. 갑자기 정색을 하곤.”
“관심을 거두어주시겠어요? 불쌍왕자님의 시선은 좀 불결해서 기분 나쁘거든요.”
“내 시선이 뭐 어때서.”
“그리고 그런 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책이나 더 읽으시죠? 멍청한 허접이 둘이 됐다 한들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오늘도 내기를 할 거냐?”
“당연한 걸 왜 물어봐요? 불쌍왕자님의 지능은 금붕어 수준인가요? 아님 닭?”
“…벌칙은?”
조심스러운 아서의 물음을 들은 나는 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프레이에게 보여주었던 해맑은 미소가 아니라 메스가키 특유의 얄미운 미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