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정오, 예린은 세희 언니와 서아 언니랑 같이 회색 사신 테마파크를 거닐고 있었다.
뚜방뚜방.
예린의 옆에는 뚱한 표정의 회색 사신이 뚜방뚜방 걷고 있었다.
‘테마파크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네….’
공사 현장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완성된 풍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분수대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발밑으로는 폭신한 재질의 통행로가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자리 잡은 미니 사신 동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귀여운 포즈로 방문객들을 반겼다.
멀리 시선을 돌리면 어디서든 보이는 거대한 회색 사신 동상이 테마파크의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을 닮은 환호성에 예린은 고개를 돌렸다.
‘빨라!’
‘으앙!’
미니 사신 전용 좌석이 부착된 롤러코스터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자, 탑승객들의 환호성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미니 사신 전용 좌석이 달린 롤러코스터는 아마 여기밖에 없겠지.
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사 중일 때부터 이곳을 드나들었던 그녀에게, 완성된 모습은 조금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우선 밥부터 먹고 놀자!”라고 외친 세희 언니의 의견에 따라, 예린 일행은 회색 사신 테마파크 식당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식당가로 향하는 길, 예린은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예전에는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호의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들이었다.
찰칵찰칵.
멀리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왔다.
“사신이는 이제 완전 연예인이네!”
예린은 웃으며 회색 사신의 포니테일을 살짝 쓰다듬었다.
‘….’
회색 사신은 오브젝트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별 반응을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핥아 먹고만 있었다.
예린은 이제까지 들려왔던 셔터음이 약간 신경 쓰여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갖 종류의 인터넷 커뮤니티부터 시작해서 뉴스까지 회색 사신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회색 사신의 애착 인간이 부럽다는 의견을 읽을 때는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사진으로 보니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하다는 의견을 읽을 때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사신이는 귀엽지!’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의견들을 보고 곧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보면 이상한 압박감이 느껴져서 다가가기 힘들더라.
-다가가서 사진 찍고 싶어도 발이 안 떨어져.
-진짜로 아무도 안 다가가더라. 진짜 직접 보면 호랑이 같은 맹수 같은 느낌이 약간 있어.
이런 의견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힝.
예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예린 일행 주변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힝. 사신이 귀여운데….”
예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
나는 세희와 서아, 그리고 예린이와 함께 회색 사신 테마파크 식당가에 앉아 있었다.
예린이의 자유이용권은 내 머리카락에 머리띠처럼 묶여 있었는데, 이게 영 거슬렸다.
‘머리띠 엄청 귀찮아.’
나는 투덜거리며 자유이용권을 톡톡 건드렸다.
별로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 쓰면 신경 쓸수록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인간 시절로 치면 안경 구석에 사인펜으로 작은 점을 찍어둔 것만큼 불편했다.
시선을 돌리자, 예린이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과 함께 밀려드는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자, 내 마음도 순식간에 누그러져 버렸다.
‘뭐, 예린이가 저 정도로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주변을 둘러보니, 식당은 어디를 봐도 미니 사신들이 가득했다.
식탁 위에 앉아, 애착 인간과 푸딩을 야금야금 먹는 황금 사신.
맛있는 간식을 노리고 식당 주변을 돌아다니는 야생 황금 사신.
그리고 손을 나이프로 바꿔, 잘 구워진 폭립을 정성스레 해체해서 애착 인간에게 먹여주는 검은 사신도 보였다.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버블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작은 황금 사신이었다.
빨대가 너무 커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황금 사신은 자신의 입보다 훨씬 커다란 빨대에 입을 집어넣거나, 눈으로 그 속을 바라보거나 했다.
“아, 그러면 안 돼!”
급기야 황금 사신이 빨대에 머리를 집어넣으려고 하자, 황금 사신의 애착 인간이 깜짝 놀라서 황금 사신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황금 사신의 머리를 빨대에 억지로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야생 황금 사신 하나를 붙잡아 빨대에 밀어 넣어보았다.
‘으앙! 엄마가 괴롭혀!’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황금 사신의 머리가 버블티 빨대보단 커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실험을 마친 야생 황금 사신을 풀어주자, 황금 사신은 잔뜩 화가 나서 내 정수리에 뚜시뚜시를 날리기 시작했다.
옴뇸뇸.
나는 예린이가 먹여주는 푸딩을 천천히 먹으면서, 식탁 위의 쿠키를 작게 뜯어서 화가 난 황금 사신에게 먹여주었다.
‘그래, 그래. 엄마가 미안해.’
그러자 황금 사신은 금세 표정을 풀고 헤실헤실 웃었다.
찰칵찰칵.
그렇게 예린 일행이랑 식사를 즐기던 도중, 일제히 울려 퍼지는 카메라 셔터음에 고개를 들었다.
‘?’
주변의 인간들이 시선을 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쟤네, 뉴스에서 본 적이 있어.”
“황금 사신 기사단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하얀 아귀를 탄 황금 사신들이 창을 들고 어딘가로 바쁘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그런 가벼운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돌리고 다시 땅콩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늦은 오후, 잿빛 소녀는 노란 사신과 함께 테마파크를 만끽하고 있었다.
잿빛 소녀는 <하얀 아귀 서커스>라고 적힌 커다란 천막에서 나오며 눈을 반짝였다.
뀨힝힝.
잿빛 소녀가 나온 천막에서는 불타는 고리에 타오르는 하얀 아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었어!”
소녀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기쁨이 가득 담겨있었다.
노란 사신은 잿빛 소녀의 흥분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
잿빛 소녀와 노란 사신은 천천히 테마파크를 거닐며 각종 놀이기구와 구경거리를 즐겼다.
잿빛 소녀는 어린아이가 탈 수 있는 놀이기구는 전부 타려고 노력했다.
미니 사신과 자연스럽게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미니 사신 포토 존’이 보이면, 노란 사신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테마파크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다 보니, 잿빛 소녀는 배가 고파졌다.
“저기 붕어빵 파는 곳이 있어!”
소녀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푸드 트럭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다.
트럭 안에서 요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검은 사신이었다.
검은 사신은 뜨거운 강철틀 위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능숙하게 반죽을 부었다.
소녀는 자유이용권에 검은 사신 붕어빵 스탬프를 찍는 미니 사신에게서 붕어빵을 받아 들며 감탄했다.
“여기선 사신들이 이런 일도 하는구나.”
그리고 붕어빵을 먹던 소녀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미래에는 밖에서도 미니 사신들이 점원 같은 걸 할지도 모르겠네.”
그 말을 들은 노란 사신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빨리 그런 때가 오면 좋겠어.”
그러면 온 세상이 동화 속에 있는 느낌이 날 것 같아서, 잿빛 소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일어선 잿빛 소녀는 큰 테마파크 지도 앞에 섰다.
소녀의 눈이 반짝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다음은 저곳에 가보자!”
소녀가 가리키는 곳은 <오브젝트 관람관>이었다.
***
늦은 오후, 잿빛 소녀는 다양한 오브젝트들이 전시된 관람관에 도착했다.
잿빛 소녀는 그중에서 투명하고 커다란 젤리들을,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색채 슬라임 군집.>
<위험 등급 : 2급.>
<닿은 물체의 색상을 인지해서 색을 바꿀 수 있는 것이 확인됨.>
<색상마다 다른 특징을 보인다.>
<색을 다수 획득할 경우,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몸속을 돌아다니는 핵을 부수면 파괴된다.>
<투명한 물질로 가둬둘 것.>
젤리의 투명한 몸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잿빛 소녀는 슬라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잿빛 소녀가 생각하기에 전시하기에는 좀 위험한 오브젝트처럼 보였지만, 어른들이 잘 대비했을 거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
다른 전시물로 넘어가려는 순간, 미세한 파열음이 잿빛 소녀의 귀에 들어왔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커다란 폭발 소리와 함께 관람관에 설치된 투명한 격리벽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깨진 격리벽을 통해서 오브젝트들이 하나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관람객은 깜짝 놀라서 몸이 굳었고, 일부는 재빨리 관람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잿빛 소녀는 몸이 굳어버린 쪽이었다.
‘어… 어떡하지?’
이리저리 색깔을 바꾸며 꿈틀거리는 색채 슬라임을 올려다보며, 잿빛 소녀는 얼어붙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잿빛 소녀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순간.
노란 사신이 괜찮다는 것처럼, 잿빛 소녀의 뺨을 토닥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잿빛 소녀가 시선을 옮겨 확인해 보자, 슬라임 속에 황금색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슬라임의 코어 근처를 해맑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이었다.
‘나쁜 오브젝트?’
‘나쁜 오브젝트…?’
황금 사신이 코어 근처를 헤엄치기 시작하자, 젤리는 금세 쭈글쭈글해졌다.
위협적인 몸놀림으로 격리실을 빠져나온 다른 오브젝트들도 얌전히 쭈그러들었다.
[잠시 후, 회색 사신 테마파크 퍼레이드가 시작됩니다.]
그 순간, 퍼레이드가 시작된다는 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테마파크 직원 모자를 쓴 황금 사신이 나타나서, 의지를 뿜어냈다.
‘파티!’
‘파티!!’
양손을 번쩍 들고 해맑게 웃으며 의지를 뿜어내자, 관람관에 있던 미니 사신들도 따라 웃으며 의지를 내뿜었다.
황금 사신들이 굳어있는 오브젝트들을 툭툭 건드리며 의지를 전했다.
‘같이 놀자!’
‘가자!’
그러자 시작되는 미니 사신 & 오브젝트의 행렬.
사람들은 그걸 보고 웅성거렸다.
“설마 유리 깨지는 것도 연출이었나?”
태양을 닮은 향기와 늦은 오후의 석양, 그리고 오브젝트 퍼레이드의 순간이었다.
***
태양이 지고, 형형색색의 달이 떠오른 밤.
오브젝트와 인간과 미니 사신이 어지럽게 섞인 퍼레이드 행렬이 테마파크를 행진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인간은 간단하게 삼킬 정도로 커다란 호랑이부터 시작해서, 몸에 해로워 보이는 알록달록한 젤리들까지.
“!!!!”
서아는 행렬에 위험 오브젝트들이 섞인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테마파크 보안실로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 듯했다.
세희와 예린은 저 오브젝트들이 뭔지 알면서도 웃으면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있었다.
“투명할 때는 잘 몰랐는데, 저 젤리 엄청 예뻐요. 세희 언니.”
“그러네, 저거 우리 연구소에 하나 둘까? 숫자도 많아 보이는데….”
예린이는 황금 사신이 잔뜩 헤엄치고 있는 젤리를 가리키며 세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 젤리는 황금 사신들에게 협박당하는 불쌍한 오브젝트로 보였다.
아마 아귀처럼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뀨힝힝하고 울지 않았을까?
퍼레이드 근처에는 보기 힘든 노란 사신도 자리 잡고 있었다.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애착 인간의 어깨 위에 앉아서, 애착 인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예린이 주변에는 세희 연구소 직원들이 모여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있었다.
헬멧 위에 황금 사신을 얹은 연구원부터 시작해서, 전부.
테마파크를 돌아다닐 때는 모두 흩어져서 놀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자리에 모여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세희 연구소랑 잘 어울리는 엉망진창에 즐거운 테마파크의 마무리라고.
***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의 최상층.
그곳에서 제임스는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사신 테마파크’의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북극 인근의 급격한 온도 저하에 관한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골치 아프군.”
제임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태평양 사태로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웠던 시기를 겨우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새로운 위기가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애착 인간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제임스의 황금 사신은 똑같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임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며, 황금 사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황금 사신은 ‘인간이 웃었어!’라고 의지를 뿜어내며, 히히 웃었다.
제임스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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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인근의 급격한 온도 저하.
이는 분명 오브젝트와 관련이 있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설원의 달’ 때문에 극지방을 포기했던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프로스트….”
제임스는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프로스트는 오브젝트 사태 이후 극지방의 바위 더미 위에 세워진 독립 도시였다.
‘설원의 달’이 나타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극지방이기도 했다.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고, 외부와의 교류도 거의 없이 자체적으로 석유를 채굴하며 살아가는 곳.
그곳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제임스의 연구소조차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그들에게 도시를 포기하라고 해 봤자 소용없을 텐데….”
축제가 한창인 창밖과 달리, 제임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