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9
내게서 던전 공략을 배운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덕분일까?
군도의 던전 공략은 어제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큰 틀은 발상이 빠른 조이가 잡아주고 그녀가 얼빵하게 놓친 부분은 아서가 해결을 해주니 자연스레 속도가 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했고 던전 공략의 제한 시간을 세 시간으로 잡아뒀지.
내 말을 들은 아서와 조이는 어제에 비해 한 시간이나 줄이는 게 말이 되냐면서 투정을 부렸지만 그럼 두 시간 안에 해보겠냐는 나의 협박 앞에서는 얌전히 고갤 주억거려야만 했다.
“걱정 마. 내가 너희들이 얼마나 허접하고 멍청한지 모르는 게 아니잖아? 오늘은 특~별히 두 번의 기회를 주도록 할게.”
제한 시간을 줄인 대신에 나는 그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내어줬다. 오늘 있을 두 번의 공략 중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내기에 승리하는 걸로 말이다.
두 사람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세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한 것을 확신했기에 한 말이었지만 난 첫 던전의 공략이 끝날 즈음 아침의 거만했던 자신을 원망하게 됐다.
“젠장. 이십분만 더 빨랐어도.”
“그래도 희망을 봤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해요.”
“그래. 다음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문제점 좀 보완하자고.”
내 예상이 틀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이가 훨씬 더 똑똑했다는 점이 컸다.
어젯밤 내게서 던전 공략집을 받은 그녀는 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빠른 속도로 책을 읽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대충 훑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조이는 속독을 하면서도 그 안에 있던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싶지? 나도 대충 외웠다 그러는 조이의 말을 듣고 똑같이 생각을 했거든? 근데 조이 얘 진짜로 중요하다 싶은 부분은 모두 암기한 상태더라.
심지어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서적에 적어둔 걸 그대로 적용시킬 때는 진짜 와. 조이가 마법사 캐릭터 중에서 최상위 재능을 지닌 건 사실이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지능이 높을 줄이야! 순간적으로 그 지능의 반만 달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니까?!
그래도 조이는 조이라서 중간중간에 실수를 저지르긴 하거든?
근데 옆에 있던 아서가 그걸 즉시 바로잡아 주니까 조이의 능력이 배가 되더라.
오늘따라 프레이가 의욕이 넘치는 것도 큰 문제였어. 평소 같았으면 제멋대로 튀어나갈 녀석이 왜 오늘은 적극적으로 아서랑 조이한테 협력을 하는 건지!
덕분에 진행이 너무 빨라져서 중간에 분탕을 쳐야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했어! 이대로 가다간 진짜 내기에서 질 것 같았단 말야!
그래도 뭐 이번에는 위기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원래 가려했던 곳보다 어려운 장소로 가면 되니까.
저 두 사람의 수준을 대충 파악했으니 세 시간 내에 공략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하면 난 안전해! 자존심도 지키고 내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젠장!”
“조금만 더 빨랐으면 됐는데 아쉽네요.”
맘먹고 내기에서 이길 생각으로 데려간 던전이었지만 결과는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얘네 둘 왤케 성장이 빨라? 이게 소울 아카데미에서 동료로 들일 수 있는 최상위 캐릭터 두 사람인가!?
여기에 페이비까지 추가됐다면 진짜로 내기에서 졌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난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건 간에 결국 내기에서 승리한 쪽은 나였으니까.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를 앞에 둔 채 오늘을 복기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 선 나는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패배자들. 즐~거운 벌칙시간이야. 기다리고 있었어? 두근두근대는 중일까?”
내 말을 들은 조이는 토끼 귀를 한 아서를 보고는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고 아서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울분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루시 알른. 이것만 알아둬라.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많이 남았단 사실을 말이다.”
“와아. 너~무 무섭네요~ 점점 변태가 되어가는 불쌍왕자님께서 저한테 어떤 수치스러운 걸 시키려는 지 상상도 안 돼요.”
“아니. 난 딱히.”
“어떡하지? 얼빵아? 불쌍왕자님이 날 덮치면 어떻게 해야 해?”
“…세상에. 왕자님.”
“왕자님. 어마어마한 변태?”
“아니 그럴 생각 없다고 말하지 않으냐! 나도 내 목숨이 아깝다! 알른 백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세 명의 집중포화에 당한 아서는 기겁을 하며 목소리를 드높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됐다. 마음대로 해라.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이다.”
“잘 됐다. 얼빵아. 왕자님이 벌칙 받아준대. 푸핳. 꼴에 남자라고 멋진 척 하나봐.”
“뭐?”
“네?!”
희미한 기대를 담은 조이의 눈빛과 무슨 헛소리냐는 듯 당혹을 담은 아서의 눈빛이 마주한 순간 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던 두 사람의 멍청한 모습이 주는 대비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키득거리던 나는 눈가에 스민 눈물을 닦아내면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야. 얼빵아. 혼자 살아남을 생각을 한 거야? 정말 치졸하고 못됐네.”
“아. 아니. 전.”
“그리고 불쌍왕자님께서는 그 정도 희생도 하기 싫어하는 쪼잔한 사람이셨네요. 그 본성 아주 잘 이해했어요.”
“…젠장. 또 당했나.”
두 사람을 놀려먹을 만큼 놀린 나는 아서와 조이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공평하게 벌칙을 베풀어주었다.
*
던전의 공략을 끝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후. 아서와 조이는 프레이를 간식으로 끌어들인 다음 내기에서 이기기 위한 작전의 회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이토록 다급하게 움직이는 까닭은 하나였다. 이대로 루시가 내미는 벌칙에 당하고 있다간 그 끝에 험악한 꼴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처음에는 토끼 머리띠였고 그 다음에는 잉크로 토끼수염을 그렸다. 루시 알른이 노리는 바는 명확해. 그 녀석은 토끼 장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하게 만들려는 거다.”
토끼 머리띠만을 착용 중인 조이는 심각한 어투로 말을 잇는 아서를 바라보다가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고개를 숙였다.
진중한 어투와 토끼 귀에 토끼 수염을 지닌 아서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괴리가 너무 거대했던 것이다.
스스로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듯 아서는 양 뺨을 벌겋게 물들인 채 애써 침착한 체를 했다.
“조이. 토끼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가 있느냐.”
“큽. 그. 크흡. 그게.”
“됐다. 말하지 마라. 내 생각에 다음에 올 것은 토끼의 코나 꼬리 같은 것이라 본다.”
굳이 토끼 귀에 이어 수염을 그린 이유는 이후에 벌칙도 토끼와 관련된 것이라는 예고일 것이라 아서는 생각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거지.”
아직 던전을 공략할 날이 5일이나 남아있다. 헌데 그에 비해 예상되는 벌칙의 개수는 너무도 작아. 토끼의 코나 꼬리, 팔다리까지 흉내낸다 치더라도 일자가 남는단 말이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인지한 조이는 웃음을 그치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왕자님께선 무슨 벌칙이 주어질 거라 생각하시나요?”
“내 어디선가 듣기로 토끼를 흉내 낸 복장이 있는 것으로 안다. 루시 알른은 그걸 최후의 벌칙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겠느냐.”
조이는 반년 전쯤 현장학습 때 보았던 루시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숲의 주인과 협상하기 위해 입었던 노출이 과다한 복장 말이다.
만약. 만약 그게 최후의 벌칙이라면.
“절대 안 돼요!”
그 복장을 걸친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한 조이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서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그것만큼은 입을 수 없어요! 파트란 가문의 영애가 지녀야 할 명예이전의 문제라구요!”
“짐작 가는 바가 있나보군. 본 적 있나?”
“…왕자님은 본 적 없으세요?”
“이야기로만 들었다. 어떤 식인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게. 그. 그러니까아아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조이는 결국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침몰했다.
옆에서 과자를 우물거리던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이는 아서를 보고는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왕자님. 변태.”
“대체 방금 그 대화의 어디에 변태 소리를 들을 여지가 있었던 거냐?”
“변태. 변태.”
*
저녁을 먹고 나서 바로 숙소에서 빠져나온 나는 지도가 가리키는 바를 따라 이동했다.
이번에도 결계를 지날 수 있는 것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어제 새벽의 일 때문일까. 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별 다른 걱정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칼이야 뭐 여느 때처럼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 주장했지만 결계를 넘지 못하는 이상 그 모든 이야기는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이동불가지역에 들어선 나를 맞이해 준 것은 지난번의 던전이 그러했듯 과거에 공략해 보았던 던전이었다.
살벌한 난이도를 지니고 있기에 한 번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하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던전 말이다.
이쯤 되면 알겠지만 던전의 끝 또한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또 다시 루시가 지녔던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게 됐다.
‘괜찮단다. 루시. 이 엄마가 어디 쉽게 죽을 사람이니?’
침대에 앉아있는 미라의 얼굴을 어제와 달리 초췌했다. 병마가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베네딕은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 미라의 병을 치료하고자 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 어떤 성직자도. 그 어떤 마법사도. 마리가 품은 병을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우리 루시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옆에 있을 거란다.’
점차 악화되는 병마 속에서 정신을 부여잡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미라였지만 그녀는 루시의 앞에서는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어머니이고자 했다. 자신의 약하디 약한 딸아이의 버팀목이 되고자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루시.’
허나 인간의 의지는 결국 운명을 이겨내지 못했다. 미라는 루시가 열 살이 되기 직전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말았고 루시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본래 무너져가는 루시를 지탱해주어야 할 베네딕은 찢어져버린 자신의 마음을 부여잡는 것조차 벅차했다.
루시의 주변에 머무르는 사용인들은 루시를 동정하지 않았다. 루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수업을 듣지 않겠다 그러는 루시를 설득하는 대신 기꺼이 가정교사의 자리를 포기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저택에서 혼자가 되어버린 루시는 방 안에 틀어박혀 점차 썩어 문드러져갔다.
왜 나는 어머님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전할 수 없었던 거야?
왜나는 어머님께 변변찮은 말 한 마디 건넬 수 없는 거야?
왜 나는 동정어린 말대신 꼴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어째서 나만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 거야?
왜 나만이 미움을 사야 하는 거야?
왜.
왜.
왜!
미라가 죽고서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저주 속에서도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선하려 노력했던 아이는 사라졌다.
어두운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저 세상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고자 하는 불쌍한 여자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