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
루시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그 뒤를 뒤따라가려던 조이는 어째서인지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왜 루시님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섬뜩함이 새겨진 걸까.
던전에 들어가는 게 처음이었던 조이는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상하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이런 식인 건가?
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루시의 뒤를 따라서 던전의 안으로 향했다.
문 하나를 넘어섰을 뿐인데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한 때는 연구실이었으나 무슨 사고로 폐쇄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은 조이로서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 가운데에 팔짱을 낀 채 방 바깥으로 나오는 길을 살펴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항상 얄미운 표정만을 짓고 있던 루시의 진지한 표정.
조이는 이 사람이 그래도 집중할 때는 집중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이는 루시가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난장을 부리던 루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시가 알른 가문의 기사에게 배움을 받았다는 것?
그래. 배움을 받았을 수는 있지.
근데 배우는 것과 그를 실전에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알른 가문의 기사들은 분명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이들이지만 그게 루시에게 신용을 주진 않았다.
뒤에서 흐르는 여러 가지의 소문은 루시가 교육을 받는다고 나아질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왜 조이가 루시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느냐 하면 그 이유는 별 대단 한 게 아니었다.
루시의 도발에 열이 받아서.
그렇게 자신이 넘치면 망치건 말건 네가 알아서 해보라는 식으로 넘겨준 것이었다.
그래서 조이는 루시에게 감정적으로 지휘권을 넘겨주고 나서 후회를 했다.
지금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인데 루시 같은 망나니에게 지휘를 맡겨도 되는 걸까 싶어서.
그렇지만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을 되돌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째선지 조이는 루시의 앞에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다니까.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던가?
왜 루시님의 앞에 서기만 하면 이렇게 충동적으로 변하는 걸까.
조이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제 루시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루시님과는 얽히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왜 지금은 루시님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걸까.
잔해를 밟는 소리와 함께 제이콥이 마지막으로 던전 안에 들어왔다.
모두가 던전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던전의 입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이 곳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던전을 공략하거나, 아니면 여기에 들어올 때 면접관이 준 긴급 탈출용 마도구를 사용하거나.
이 중에서 후자 같은 경우에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실격 당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 사실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는 것.
“얼빵 영애님.”
조이는 자길 부르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그냥 내 이름 대신 얼빵영애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셨나 보지?
두고 봐요.
이런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나면 당신은 망나니 영애가 될 거고 저는 조이 공작 영애가 될 거에요!
“조무래기.”
그래도 조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영애에다 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주지 않는가.
그에 반해 루시보다 계급과 입장이 낮은 제이콥은 제대로 된 호칭은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조무래기라니. 너무 심하지 않아?
최소한 이름 정도는 불러줘야지.
생각해보니까 내 이름도 안 부르는 마당에 리즈 영식의 이름을 부를 리가 없나.
“전에 말했던 대로 허접한 여러분 대신 제가 전위에 섭니다. 제가 앞서 갈 테니 후방을 경계하면서 뒤를 따라오세요. 던전에 관한 경험이 없는 허접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뭐야. 자기가 던전 공략을 한 번 해봤다고 뻗대는 거야?
그래 봐야 알른 가문의 기사단이 앞에 서고 자기는 뒤에서 구경만 했을 거면서!
조이는 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겉으로는 그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어디 실수 한 번 하기만 해봐.
잔뜩 트집을 잡아서 울상으로 만들어 줄 테다!
허나 안타깝게도 조이가 루시의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는 던전 공략을 서적으로만 배운 조이가 보기에도 거의 완벽하게 지휘를 이끌어 냈으니까.
“전방에 저흴 멍청이로 보는 함정이 있어요. 누가 설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저런 함정에 걸리는 멍청이라 남들도 저딴 함정에 걸릴 거라 생각한 모양이네요.”
루시는 탐색을 하는 내내 아카데미에서 설치를 해두었을 함정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 함정을 어찌 해체를 하는 지도 모두 알고 있었던 터라 조이와 제이콥은 함정이 나왔을 때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이 뒤에 가만있으면 루시가 알아서 모든 걸 해결했으니까.
혼자서 모든 걸 하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제이콥이 루시를 도우려고 다가갔지만 루시는 단호하게 그 도움을 거부했다.
“조무래기. 네 허접한 손길로 일을 망치려고 그래? 뒤에 찌그러져 있어.”
다소 강한 어조였지만 조이가 보기에도 루시의 판단은 옳았다.
제이콥이란 사람을 처음 보는 조이지만 그녀가 보기에도 제이콥은 어설퍼 보였다.
아마 그도 자신처럼 던전이 처음인 게 아닐까?
이것이 연습을 위한 자리라면 모를까 지금 이 장소는 시험을 보기 위한 곳.
실수를 할 게 뻔해 보이는 제이콥에게 역할을 줄 순 없었다.
조이는 시무룩해져서 돌아온 제이콥에게 위로하듯 말을 해 주었다.
“괜찮아요. 각자에겐 역할이 있는 거니까.”
어째서인지 제이콥은 조이가 해 준 말을 듣고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깨를 푹 늘어 트렸다.
왜 오히려 기가 죽는 거야?!
나 방금 위로해줬잖아.
어투가 이상했나 아니면 행동? 단어 선택이 잘못됐다거나?
으으. 전혀 추측이 되질 않아.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있자.
더 이상 이야기를 해봐야 사기만 떨어트릴 뿐일 테니까.
조이는 삭막해진 파티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라버니!
아카데미 시험을 치고 있을 다른 영애분들!
어디 간 거에요! 오늘따라 여러분들이 보고 싶어요!
루시의 활약은 함정을 찾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색적이라는 부분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골목을 돌고 나면 낡아빠진 골렘 셋이 있을 거에요. 제가 먼저 가서 그 골동품들의 주의를 끌 테니까 허접분들은 알아서 뒤 편에서 지원을 해주세요.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그녀의 말대로 골목을 돌자마자 인간의 형태를 한 골렘 셋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둥이 비스무리한 것을 들고 있는 골렘 둘과 그 뒤에서 약간 거리를 벌리고 있는 봉을 든 골렘 하나.
처음 겪어보는 실전이기에 조이가 입술을 굳히며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루시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낡아빠진 쓰레기들♡ 관절이 망가져서 삐걱삐걱거리는 거야?♡”
지성도 뭣도 없을 골렘을 향해 도발을 하는 루시의 모습은 조이가 보기에 쓸모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전투에 들어가며 자신감을 보충하기 위한 자기암시 같은 걸까?
허나 루시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골렘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약되었다.
루시가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저건 또 뭐야?
의아함이 절로 생겨났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도 괜찮은 일이었다.
지금은 루시를 도울 차례였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또 루시의 조막만한 입에서 그녀를 무시하는 말이 나올 게 분명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루시님한테 이 이상 무시당하고 싶진 않아!
우선 루시님을 지원하자.
골렘들의 움직임을 마법으로 늦추고 화력의 지원은 그 후에 생각해도 괜찮을 거야.
“잔혹한 겨울의 바람이여.”
조이가 마법의 실을 짜냄으로써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는 것은 북방의 겨울에 몰아치는 모든 걸 얼어 붙이는 바람일지니.
마법진이 완성됨과 동시에 골렘의 발을 바닥에서 생겨난 얼음이 붙잡아 놓았다.
갑작스럽게 봉쇄된 움직임에 골렘이 비틀거리는 것을 루시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메이스가 휘둘러지고 골렘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좋아. 첫 수는 완벽했어.
이제 다음 마법을.
“얼빵 영애. 헛짓거리 하지 말고 마력 아껴요.”
짜내려던 순간 루시가 그를 제지했다.
“이 고물들은 혼자서 폐기처분 할 수 있으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허접한 마력을 낭비하지 말란 거에요.”
조이는 순간 루시의 말에 발끈했지만 그 이상 따지지 않고 루시의 말을 따랐다.
마력은 무한하지 않다. 아낄 수 있는 게 옳은 일이었다.
루시는 자신이 선언을 했던 것처럼 여유롭게 골렘 둘을 처리했다.
방패로 공격을 쳐내 틈을 만들어낸 후 일격으로 골렘의 머리를 박살내버리는 그 모습은 꼭 골렘이 별 것 아닌 상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입학시험이라 그런 걸까요. 약한 몬스터가 나오네요.”
“제이콥. 당신이 저걸 상대하면 고전할 걸요.”
“네?”
공작가의 소양으로 기본적인 호신을 배운 조이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강함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골렘은 약하지 않았다. 느리긴 해도 명확한 움직임을 보이는 저들은 분명 까다로운 상대였다.
단지 루시가 그것보다도 더 강했을 뿐.
무기를 쥐는 것조차 서툴러 보이는 제이콥이 저 골렘 셋에게 둘러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몽둥이에 얻어맞다가 그대로 실격처리를 당했을 것이다.
“거기 둘.”
세 개의 골렘을 거의 혼자 상대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숨도 차지 않은 상태였다.
체력이 엄청 좋아지셨네.
예전에 계단 올라가다가 헐떡이면서 난간에 기대어 쉬던 루시님은 어디에 간 걸까.
“빨리 가죠. 쉴 틈 없어요.”
루시의 여러 능력 중에서도 조이가 가장 감탄을 한 부분은 그녀가 지닌 길을 찾는 능력이었다.
분명 루시나 조이나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와 본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 터인데 루시는 이상할 정도로 길을 잘 찾아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이 던전을 만들어 낸 교사라도 되는 것처럼 여러 숨겨진 통로를 보란 듯이 찾아내 보였다.
“루시님. 어떻게 길을 그렇게 잘 찾아내시는 건가요?”
그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던 조이는 망나니 영애라고 부르는 것조차 잊고 그런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숨겨진 통로로 발을 들이던 루시가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평소와 같은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궁금하신가요?”
“네.”
“계속 궁금해 하세요. 안 가르쳐 줄 테니까.”
*
던전에 나오는 골렘들은 하나 같이 낡아빠진 골동품들이었다.
메이스로 머리를 한 번 찍어주면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폐품들을 상대하다보니 점점 긴장감이 옅어졌다.
이상하다.
아무리 조이의 적절한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쉬워도 되나?
게임에 나오는 골렘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강했던 것 같은데.
아카데미 입학시험이라고 난이도를 조절해 놓은 걸까.
분명 그런 걸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토록 편할 리가 없으니까.
덕분에 나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펼칠 수 있었다.
전투가 고되었더라면 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했을 테지만 이번엔 편안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던전의 보스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소울 아카데미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기록이겠죠?”
대답을 바라고 질문은 던졌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거친 숨을 다스리느라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 너무 배려 없이 달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