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0
‘바보 파파. 저 사교계에 나갈 거에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던 루시가 갑자기 베네딕에게 사교계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게 영웅담 속의 이야기였다면 자신을 지켜 줄 이를 잃어버린 아이가 알을 깨고서 나아가는 정경을 상상하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썩어 문드러진 마음이 눈동자에 새겨진 아이는 그저 세상에 자신의 증오를 드러내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고통만을 선사한 세계에 똑같은 아픔을 선사하고자 할 따름이었다.
만약. 혹시나. 베네딕이 딸의 아픔을 눈치 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여느 때처럼 딸을 지키고자 했다면 루시는 자신을 내던지지 않았을 거다.
허나 아내를 잃었단 절망에 가라앉아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베네딕은 루시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예. 바보… 아버님.’
그렇게 아이는 구원을 포기했다.
환상이 무너져내림과 동시에 루시가 품었던 절망이 뇌리에 새겨진다. 사회에서 닳고 닳은 어른조차도 견디기 어려운 어둠이 마음을 짓누른다.
그를 견디느라 이를 꽉 깨물고 있던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이번에도 옛 기억을 보았느냐?>
‘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조금 쉬다 가는 게 어떠냐.>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별 거 아니에요.’
할배에게 무덤덤하게 대답을 한 나는 비틀거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었다.
<별 거 아니라고?>
‘…시끄러워요.’
놓쳐버리고 만 방패가 저 멀리로 나가떨어진 게 보였다. 한숨과 함께 그를 집어 들려던 나는 새하얀 방패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초췌해진 아이의 얼굴을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 나가면 칼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치겠네. 카리아도 안 그런 척 하며 걱정을 할 테고.
흐으. 최소한 평소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될 때까진 여기 있어야겠다.
긴 한숨과 함께 바닥에 앉은 나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봤다.
허접 주신은 왜 나에게 이걸 보여주려는 걸까.
단순히 악신에 대항해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 그 녀석의 목표라면 이런 건 필요 없어. 오히려 방해지. 내가 혼란스러워하게 되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이젠 사라져버린 루시를 위로하기 위함이라 하기도 어려워. 이 세상에서 메스가키라는 축복을 내린 건 허접주신이잖아.
스스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허접주신이 그런 위선을 저지를리는 없어.
그럼 뭐지? 허접 주신은 뭘 바라는 거지? 멍하니 그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조금 있으면 미라의 기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안 순간 어째선지 마음이 한 층 더 울적해져서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
“이번 사건은 라샤가 알른 영애를 지키기 위해 벌인 일인 듯 합니다.”
조금 있으면 주신 교회의 행사가 시작되기에 성지에 방문한 요한은 차를 마시며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영애님을요?”
“예. 그 여자는 강자가 될 새싹을 사랑하니까요. 혹여 자라나다 꺾이지 않게 신경을 써줬겠죠.”
“저어.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알른 영애와 관련 있다 확신하는 건가요? 제국의 투기장에는 다른 강자들도 있잖아요?”
“이유가 여럿 있습니다만. 확신을 하게 된 이유는 라샤가 살해한 이들이 모두 알른 영애가 지닌 특이성을 눈에 새기려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페이비는 왜 흑마법을 다루는 자들과 성직자들만이 살해당했는지를 이해했다.
흑마법사들은 주신의 사도를 훌륭한 제물정도로 여길 것이 분명했기에 죽였을 것이고. 주신 교회의 성직자들은 주신의 사도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죽였겠죠.
그러니까.
“라샤님께서는 영애님의 진실을 눈치 챘단 건가요?”
“그럴 겁니다. 그 여자는 파괴의 악신의 사도니까.”
“…예?”
“모르셨습니까? 아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요한이 꺼낸 말에 페이비가 눈을 끔뻑였다.
“라샤님께서 악신을 모시는 자라고요?”
“모신다는 표현은 애매하군요. 그 여자에게는 신앙이 없으니까요.”
라샤가 파괴의 악신과 관계되어있음을 깨달았을 때 교회는 그녀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자신의 행적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라샤는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토벌하러 온 이들을 상대했고 모든 자들을 기꺼이 쓰러트렸다.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더한 강자를 데리고 오란 외침과 함께.
허나 라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교황 성하께서 말씀하시길 믿음 없는 자가 사도의 직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교회에 희소식일 지어니 이 이상 희생을 낼 필요가 없다 하셨거든요.”
“교황 성하다운 말씀이네요. 성하께서는 무척 실리적인 분이니까요.”
“라샤 본인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후로 주신 교회는 라샤의 행보를 지켜볼 뿐 개입하진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한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라샤가 또 다시 교회를 도발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고. 그러니 무시해야 한다고.
페이비의 변화를 인지한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어느 정도 세력을 만들어낸 요한은 교회의 여론을 이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오늘은 기도를 길게 해야겠네요.”
페이비는 슬픈 눈으로 찻잔의 가운데를 바라봤다. 요한은 오늘 페이비의 기도에 죽은 자들을 향한 애도가 들어가기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 일 분 정도 침묵이 지나간 후 요한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키런입니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교황 성하께서 성녀님께 전하는 서신을 들고 왔습니다.”
무엇을 그리도 바쁘게 움직이시는지 교회에 연락도 드문드문 주시는 분께서 성녀님께 서신을 보냈다고?
요한은 의문을 품었지만 사제가 전달해 준 서신에는 분명 교황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페이비는 사제가 돌아간 후 서신을 펼쳤다.
“…요한 주교님. 교황 성하께선 분명 실리적이지만 차가운 분은 아니었지요.”
“그렇죠. 작금의 교회가 교회의 형체를 갖추고 있는데엔 그 분의 공이 크니. 근데 그것은 갑자기 왜?”
“성하께서 직접 라샤님께 경고를 하시겠다는군요.”
“성하께서 말입니까?”
요한의 목소리에는 놀람이 담겨 있었다. 그 분께서 이번 일을 그토록 심각히 여기고 있었다는 말인가.
…잠깐. 얼마 전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라샤는 지금 군도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는 소리는 지금 따로 움직이고 계시는 교황 성하의 목적지도 군도가 될 가능성이 높단 것이지.
그리고 얼마 전 카리아 측의 사람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지금 알른 영애께서도 분명 군도에 있다 했어.
교황 성하께서는 선한 분이지만 마냥 선하진 않다. 합리에 따라 무엇이건 가차 없이 잘라낼 수 있는 사람이지.
그 분께서 지금의 알른 영애를 본다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
거기까지 생각한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 주교님?”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다급하게 할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아직은 너무 일러.
아직은.
*
어제 그 던전에서 마주했던 게 사교계에 가겠단 루시의 선언이었지.
그렇다면 오늘 보게 될 건 어제보다 더 음울하겠네. 오늘 저녁은 먹으면 안 되겠다. 환상을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속을 게워 낼 게 분명하니까.
“루시 알른!”
아서의 외침을 들은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갑각의 집게가 보였다.
피하기엔 늦다. 방어를 하기에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하는가.
박살내야지.
방패 대신 메이스를 치켜 든 내가 집게의 한 가운데를 내리친 순간 무수한 공격에도 금 하나 가지 않던 집게가 박살나며 주변으로 비산했다.
고통에 차서 발버둥치는 던전의 보스를 확인한 나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앞에서 적당히 방패 역할만 수행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공략의 진도가 너무 빨라지잖아.
어떡하지? 다른 애들 모르게 치료를 해줘야 하나?
너무 치졸한 행동 같아서 별로이긴 하지만 내기에서 지는 것보다는.
<걱정마라. 어차피 내기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으니.>
‘진짜요? 휴우. 다행이다.’
<그리고 말이다. 네가 저 갑각을 치료할 시간도 없을 거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내 물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뒤편에서 거대한 마력의 발현이 느껴졌으니까.
“좋았어요! 영애! 덕분에 틈이 생겼어요!”
마력을 따라 고갤 돌린 나는 조이의 뒤 편에서 넘실거리는 마법진을 보았다.
몇 개의 마법진을 엮어서 만들어낸 거대한 마법진. 지금의 나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물건이었지만 어째선지 무슨 마법이 발현될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마법진에서 끝없는 차가움이 느껴졌으니까.
“얼어붙어라!”
째앵! 자그마한 동산처럼 느껴지는 거구의 갑각이 일순에 얼음 안에 갇히며 동굴 전체가 냉기로 가득 찼다.
이 일로 마력을 다 날려버려서 몸을 데울 힘조차 없는지 조이는 오들오들 몸을 떨어댔지만 정작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성공했다! 될지 안 될지 몰랐는데 성공했어!”
마법사 특유의 괴짜스러움이 발현된 그녀에겐 귀족의 예법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환희를 표출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난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그녀의 주변을 신성으로 뒤덮었다. 그러자 조이의 떨림이 멈췄다.
“아. 영애. 정말 감사…”
“얼빵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확인사살이라는 단어 몰라?”
“네?”
“진짜 모르는거야? 얼빵하긴 해도 머리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좀. 아니 많이 실망스럽네.”
“아니! 그 단어를 모르진 않아요! 그렇지만 저건 분명!”
쩌억! 동굴 안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을 단번에 얼어 붙인 얼음 속에서도 갑각은 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엑?”
눈을 끔뻑이는 조이를 보고 있자니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놈의 얼빵함은 진짜 사라지질 않는구나.
“조이! 루시 알른! 그럴 때가 아니다! 좀 있으면 저 놈이 부활을 할 터!”
“괜찮아.”
프레이의 무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휘둘러진다.
무채색이 뒤섞여 무엇이라도 될 수 있지만 무엇도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검격은 얼음 채로 갑각을 반토막 내어 놈의 생명을 끊어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갑각의 머리가 떨어진 후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드러났다.
“이제 끝.”
프레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검을 거두었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셋은 아니었다.
하. 저 녀석. 정말로 2학년이 되기 전에 색을 발현하다니.
재능에도 정도가 있지.
이러다 쟤 2학년 끝날 즈음이면 베네딕이랑 맞대결을 하겠다.
“왕자님. 왕자님. 이럴 시간 없어. 시간.”
“아! 시간! 그래!”
프레이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아서는 조이를 데리고서 던전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공략 시간을 재고 있을 이들에게 확인을 받기 위해서.
할배로부터 이미 결과를 전해들은 나는 오늘은 뭘로 겁을 줘볼까 생각을 하며 느긋이 그 뒤를 따랐다.
예상대로 세 사람은 내기에서 패했음에 절망하고 있었다.
“얼빵이! 네가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왕자님께서도 그 땐 그게 맞다고 하셨잖아요! 이번 건 제 탓만은!…”
키득거리며 둘의 다툼을 보던 중 변장을 하고 있던 카리아가 다가왔다.
“알른 영애님. 아무래도 저희들은 지금 당장 군도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선자리라도 잡혔어? 어느 불쌍한 멍청이가 너한테 걸린 거야?”
“…교황이 이 곳에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요한 주교가 직접 전달해 준 정보이니 틀릴 리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