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설원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위에, 검은 도시가 우뚝 솟아있었다.
주변의 날카로운 바위들은 마치 도시를 보호하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 사신이 아무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이 도시의 인간만이 주변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인간들로 보였다.
도시의 중심에는 거대한 증기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장과도 같이 규칙적으로 맥동하며, 도시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증기탑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파이프들은 혈관처럼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도시에 잔뜩 튀어나온 굴뚝들은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이 연기는 하늘을 뒤덮어, 마치 영원한 밤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붉은 사신은 그런 매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숨어든 뒤,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시선에서 몸을 숨긴 채, 인간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뭔가를 잔뜩 태우고 있는데도 추워.’
중앙의 증기탑에서 발생한 열기가 파이프들을 통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지만, 혹독한 추위 때문에 열기는 도시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았다.
중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건물 외벽에는 거대한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로 몸을 감싸고 언제나 바쁜 것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인간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김으로 변해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도시 곳곳에 뚫린 거대한 광산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도저히 들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바위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광산에 들어간 인간들은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전부 오브젝트로 보이는 ‘푸른 돌멩이’를 잔뜩 짊어지고 나왔다.
‘힘들어 보여.’
인간이었다가 미니 사신이 된 붉은 사신은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생각은 ‘미니 사신’으로서 든 생각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기억이 만든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의 감정에서는 힘들다는 느낌보다는, 작게 빛나는 희망이 느껴졌으니까.
더 나아질 미래에 대한 미약한 희망.
그 감정을 느낀 평범한 미니 사신들이라면 힘내라고 토닥이며 간식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인간 바라기인 황금 사신이었다면 후다닥 달려가서 약한 근력으로라도 인간들을 도와주겠다고 저 푸른 돌멩이 부스러기라도 같이 옮겨주었겠지.
인간이었던 붉은 사신은 미니 사신처럼 응원 정도만 한 뒤, 그냥 지나치고 싶지는 않았다.
붉은 사신이 양손을 펼치자, 작은 티끌 같은 불씨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사람들 몸에 달라붙어서 미약한 온기를 부여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를.
물론 엄마라면 이 사람들을 모두 세희 연구소로 옮기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회색 사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를 부를 때는 너희들이 다쳤을 때뿐이야.’
엄마는 위험할 때만 부르라고 했으니까.
‘나는 모든 인간의 염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야.’
붉은 사신은 엄마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엄마를 부르는 것은 포기했다.
엄마는 정말 고양이 같아서, 해달라고 하면 할수록 해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붉은 사신은 조금은 따뜻해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중앙 증기탑을 향해 움직였다.
‘아무리 찾아도, 애착 인간이 없네….’
검은 도시에는 붉은 사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붉은 사신은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아직도 애착 인간을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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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붉은 사신은 중앙 증기탑 근처에서 한 인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커다란 스피커 옆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선전을 하는 한 남자였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기분 나쁜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나쁜… 인간…!’
붉은 사신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붉은 사신이 된 지금은 토할 수 없었다.
미니 사신이 된 순간, 이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미니 사신이 된 뒤로 간식이 너무 맛있고, 별거 아닌 조그마한 일들도 너무너무 즐거워졌다.
미니 사신들과 가위바위보만 해도 즐거울 정도!
그리고 인간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반대로 나쁜 오브젝트와 나쁜 인간을 보면 혐오감이 들었다.
하지만 붉은 사신이 생각하기에 ‘나쁜’의 기준은 너무나 모호하게 느껴졌다.
살인? 청부업자를 애착 인간으로 한 미니 사신도 있었다.
외모? 미니 사신이 된 뒤로는 인간이기만 하면 미추의 구분이 힘들어졌다.
전부 잘생겨 보였으니까.
성격? 직업? 관심? 전부 아닌 것 같아. 잘 모르겠어.
‘….’
붉은 사신은 당장에라도 나쁜 인간을 전부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인간 시절의 기억으로 애써 참았다.
‘보는 것만으로 토할 것 같고, 기분 나쁘다는 것만으로 죽이는 건 너무 한 것 같아….’
붉은 사신은 감시용 불씨를 남자의 몸에 붙인 뒤, 애써 시선을 돌렸다.
‘나쁜 짓을 하면, 정말로 나쁜 짓을 하는 걸 보면 죽이자.’
인간이었던 붉은 사신에게 아무 이유도 없는 살인은 아직 조금 힘들었다.
붉은 사신은 중앙탑이 보기도 싫은 것처럼, 도시 외곽을 향했다.
온기가 닿지 않는 춥고 어두운 곳으로.
***
세희 연구소, 플라스크 공작소.
나는 공작소 구석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연구소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집중하고 있었다.
손에는 다양한 모양의 유리 용기들이 들려 있었다.
병목이 긴 플라스크부터 둥근 어항 모양까지,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이었다.
작은 흙 한 줌, 정교하게 고른 자갈 몇 개, 그리고 섬세한 식물들이 차례로 그런 유리 용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병 속에 작은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손재주 좋네….’
직원들은 업무랑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작업을 하는데도 상당히 능숙해 보였다.
오히려 업무랑 상관없어서 잘하는 건가?
“오랜만에 일하려니 엄청 힘들어.”
한 직원이 허리를 펴며 중얼거리자, 직원의 정수리에 앉아 있던 황금 사신이 ‘힘내!’라고 외치는 표정으로 정수리를 토닥여 주었다.
미니 사신들은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해서 그런지, 애착 인간이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너무 놀다가 일을 하게 돼서 그런 것 같았지만 말이다.
지금 직원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세희 연구소의 신상품이었다.
일명 미니 사신 플라스크!
잘 꾸며진 테라리움 안에 미니 사신을 같이 넣어둔 상품이었다.
테마파크 때문에 세희 연구소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줄어버려서 세희가 새롭게 만들어 낸 상품이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미니 사신 플라스크’가 상당한 인기를 끌면서, 세희 연구소 방문객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격은 무려 보통의 테라리움의 몇 배나 비싼 가격!
판매 조건은 내부의 미니 사신이 고객을 반기면 판매 가능!
굉장히 비싼 데다가 조건도 있었지만,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는 인기 상품이었다.
비싸서 안 산다는 사람도, 플라스크 안에 있는 미니 사신이 시무룩한 표정을 한번 지어주면 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런 과소비를 하게 되는 데에는 매장 내부를 잔뜩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의 지분도 꽤 있을 것이다.
태양을 닮은 향기를 맡으면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세희는 새로운 상품을 구상하려는지, 황금 사신을 향낭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으앙! 인간이 괴롭혀!’
하지만 황금 사신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향낭에 들어가기 싫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황금 사신 향낭은 실패인가.”
세희는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황금 사신을 풀어주었다.
나는 세희의 그런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완성된 미니 사신 플라스크들을 하나하나 감상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다양하네? 단순하게 만들어서 폭리를 취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연을 꾸민 플라스크도 있었고, 중세 시대 성처럼 꾸민 플라스크도 있었다.
내부에 담긴 미니 사신의 복장도 다양했다.
평범하게 나처럼 아무것도 안 입은 황금 사신도 있었고, 화려한 성을 배경으로 드레스를 챙겨입은 황금 사신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는 중, 유독 가격이 싼 플라스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청 작은 하얀 아귀가 행복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꽤 커다란 유리 용기였다.
‘흠.’
하얀 아귀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플라스크에 적절한 조치를 한 뒤, 히히 웃으며 미니 사신 플라스크 제작실을 벗어났다.
‘미니 사신’ 플라스크니까, 미니 사신이 있어야지.
히히.
***
통. 통. 통.
물방울이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가 산호빛 소녀의 귀에 스며들었다.
그 리듬은 마치 시계추처럼 규칙적이었고, 소녀의 의식을 서서히 깨웠다.
눈꺼풀이 무겁게 열리자, 끔찍한 추위가 그녀를 덮쳤다.
폐기된 증기 기관실의 허술한 벽으로는 제대로 냉기를 막을 수도, 온기를 제대로 지킬 수도 없었으니까.
벽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찬 공기는 마치 얇은 칼날 같았다.
산호빛 소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고, 낡은 담요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하룻밤을 아슬아슬하게 보낼 수 있는 푸른 석탄이 조금 일찍 다 타버린 모양이었다.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상황이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마치 누군가가 따뜻한 이불을 덮어준 것 같은 포근함.
소녀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 성냥불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오브젝트가 있었다.
붉은 오브젝트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소녀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따스함과 친근함이 가득했다.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공포?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가 연결된 것 같은 충족감과 호기심이 그녀의 눈동자를 채웠다.
그것은 산호빛 소녀와 붉은 사신, 애착 인간과 애착 사신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때, 멀리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눈보라가 도시 ‘프로스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며 납빛으로 물들었고, 차가운 바람이 도시의 거리를 휘감으며 불길한 전조를 전했다.
마치 눈의 벽처럼 보이는 눈보라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전진했다.
그 모습은 하얀 산맥이 움직이는 듯했고, 그 위용에 지상의 모든 것이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검은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재앙의 편린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