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1
교황.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안 그래도 어지러웠던 정신이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만나야 할 상대이기는 하다. 내가 페이비의 친구인 이상, 그리고 주신의 사도인 이상. 교황이 벌이려 하는 일을 반드시 막아내야 하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이르다. 교황을 마주하기에는 지금 내가 지닌 것들이 너무 부족해.
“왜 그 노망난 노친네가 여기에 오는 거야?”
“요한 주교가 이야기하길, 라샤에게 얼마 전 사건에 대한 직접 경고를 주기 위함이라더군요.”
헛소리였다. 교황은 이미 라샤와 일종의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기로 한 지가 오래일 텐데 경고는 무슨 경고인가.
뭣보다 교황은 교회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에 분노를 느낄 인간이 아니다.
주변의 시선이 있으니 화를 내는 체는 하겠지만 그 속은 한없이 냉정할 터. 그런 인간이 무얼 하러 자신이 직접 맺은 계약을 회수하겠는가.
라샤는 핑계다. 그가 이 곳에 오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아줌마.”
“지금 변장 중입니다.”
“이미 소리 차단했으면서 히스테리부리긴. 그러니까 다들 널 보면 피해 다니는 거 아냐.”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됐고. 내가 개허접한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바깥으로 허접 주신의 징그러운 기운이 흘러나온 적 있어?”
“어. 모르셨습니까? 안에 들어가신 후로 계속해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만.”
…젠장. 허접 주신. 왜 자꾸 쓸데없이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냐고. 그러니까 나방이 네 빛을 따라오잖아.
입술을 꾹 깨문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친구들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던 이들은 어느새 협력하여 다음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있었다.
시기가 좋지 못했다. 며칠만 더 있으면 이 군도에 있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며칠도 아니다. 빡빡하게 움직인다 가정하면 이틀만 더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물러날 수 있겠지.
허나 그 미련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확신하긴 어려웠다.
“아줌마. 꼴통 주교는?”
“숙소에 대기 중입니다.”
*
숙소에 대기하던 요한 주교는 성직자의 복장을 벗어던진 것은 물론 간소하게나마 변장을 하고 있었다.
카리아나 알새틴의 변장처럼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깐깐한 성미의 요한이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변장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교황 성하께서 지금 어디쯤 계신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요한은 수염이 불편한 듯 그를 매만지면서 내 물음에 답했다.
“그 분은 성녀님께서 복귀하시자마자 자리를 비웠습니다. 개인적으로 할 일이 여럿 있으시다면서요.”
“교황쯤 되는 인간이 그래도 되는 거야?”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카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요한이 웃었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됩니다만 현 주신 교회엔 성하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답니다. 그 분께서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죠.”
“…그만한 절대권력은 테르샤 제국에도 없을 것 같은데.”
“하하.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디에서 서신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 어디쯤에 있을지 추측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이미 이 근처에 계실지도 모르죠.”
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지만 그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교황은 이 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일정 이상의 실력을 지닌 성직자라면 그의 존재감을 못 알아차릴 리는 없으니.
“그러니 한시 빨리 이 섬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영애.”
그럼에도 저런 과장스러운 이야기를 한 까닭은 내게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교황이란 존재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가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그를 무너트려야 한다 확신해 온 성직자는 아직 내가 교황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의 경고를 들은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허공에 띄워 놓은 퀘스트 창을 살폈다.
[군도의 보물을 찾아라!]
솔직히 말해서 난 아직 이 섬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허접 주신이 안배해 둔 모든 것을 이 눈에 새기고 싶었다.
루시의 과거를 모두 살핀다면 부모의 모욕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차오르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베네딕을 볼 때마다 간지럽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으니까. 뭣보다 허접 주신이 무얼 위해 군도에 귀찮은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이 곳에 있는 게 나 혼자였다면 난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다.
오히려 스피드런이라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모니터 너머였다면 새 이벤트라며 환호했겠지.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고 이번 일로 내가 교황과 얽히면 곤란해질 사람도 나 하나가 아니다.
가만 퀘스트창을 노려보던 나는 여태 죽어라 아껴두었던 보상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진짜 죽을 위기가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 띠링.
경쾌한 알림음을 들은 순간 생각이 끊어졌다.
[퀘스트 보류!]
[나중에 다시 도전하십시오!]
푸른 창 안에 담긴 메시지를 몇 번이나 확인하던 나는 절로 새 나오는 웃음을 견디지 못했다.
언제가 되도 좋으니 여기에 와서 퀘스트를 수행하란 소리야? 당신의 안배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잠시 물러나도 상관 없다는 거구나?
정확히 네가 뭘 바라는 건지는 몰라도 네게 루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한 거야.
요한과 카리아의 영문을 모르겠단 시선을 받으면서도 한참 동안 키득거리던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됐네. 이 낡아빠진 촌구석에도 질린 지 오래였는데 말야.”
일단은 물러서겠지만 다시 돌아오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거다.
아카데미의 2학년들은 외부의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권리와 몇 개의 던전에서 성과를 내야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니까.
“다행히 여기의 역겨운 향취가 옮기 전에 돌아갈 수 있겠어.”
다시 이 곳에 돌아올 때 난 반드시 루시의 모든 과거를 살필 거야.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 알아내고 말 거라고.
“…치사해요! 조금만 더 있으면 내기에서 이길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얼빵이의 말이 옳다! 루시 알른! 질 것 같으니 도주하는 것이냐!”
“왕자님?! 왜 갑자기 저도 같이 공격하시는 거죠?!”
“시끄럽다! 지금이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왕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조이와 아서가 정색을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기에서 이길 방책이 보이는데 왜 돌아가야하느냔 거겠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선 내기에서 질 것 같으니 도망치는 모습으로 보이려나.
“결사반대. 우리는 당하기만 했어.”
근데 프레이 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저 두 사람이야 토끼 머리띠에 수염에 이제는 꼬리까지 착용하고 있으니 화를 내는 게 당연하지만 프레이는 아무것도 당한 게 없잖아.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더니 프레이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에 편승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난 못 돌아간다! 돌아갈 거라면 혼자 가라!”
“저도요! 다른 모험가 한 분을 고용해서라도 이 곳의 던전을 공략하고 말겠어요!”
“왜 하나야?”
“네? 그야 켄트 영애께서도 저희와 함께 할 거잖아요?”
“내가 왜? 나 루시랑 같이 돌아갈 건데.”
“네에?!”
“프레이 켄트! 우리를 배신하다니!”
왁왁대며 다투는 세 사람을 구경하던 나는 피식 웃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우리 주변을 호위하던 알른의 기사들이 셋. 정확하게는 내게 협력적인 프레이를 제한 두 사람을 둘러쌌다.
“영애?”
“루시 알른. 이건 뭐 하는 짓이냐.”
“멍청한 허접 둘. 내가 다른 사람의 바보 같은 헛소리에 귀 기울일 사람처럼 보여?”
어지간한 상황이라면 두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교황과 함께 라샤가 군도에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소중해진 두 사람을 그 위험천만한 곳에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무엄하다! 이 몸은 솔라딘 왕국의 3왕자 아서 솔라딘이다! 감히 변경백의 기사들이 내게 손을 대느냐!”
내가 무얼 하려는지 눈치 챈 아서가 자신의 권위를 들먹였지만 그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알른의 기사단은 분명 왕국에 충성하지만 그 이전에 알른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왕자님. 포기하죠? 이분들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 잘 아시잖아요?”
“조이! 네가 그러니까 그 얼빵함을 고치질 못하는 거다! 이럴 때 더 필사적으로 나서야지!”
“그러는 왕자님도 아무것도 못 하고 계시면서!”
왕자와 공작 영애라는 지위를 버린 채 소꿉친구가 되어 다투는 두 사람을 구경하던 난 어찌하면 좋으냐는 칼의 시선을 받고 어깨를 으쓱였다.
“불쌍왕자님께서 그렇게나 훈련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잘 알겠어요. 제가 특~별히 신경을 써드릴게요.”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루시 알른.”
“허접 아카데미가 열릴 때까지 알른의 멍청이들 사이에서 놀 수 있게 해드릴게요. 불쌍왕자님께서 바라던 대로.”
내 말을 들은 아서의 얼굴이 굳는다. 알른 기사단에서 받았던 훈련이 무척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가 기뻐하니 나도 기뻤다.
“왕자님. 그러니까 제가 저항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괜히 난리를 치니까.”
“얼빵아. 당연히 너도 함께야.”
“…네? 그게 무슨. 아니! 그! 저는 파트란 가문에서 해야하는 일들이 있어요!”
“정말 넌 마법 말고 다른 분야에선 멍청하구나? 내가 귀여운 목소리로 해준 말 잊었어? 허술 공작한테 다 허락 맡고 왔다고 했을 텐데?”
“그러어어언!”
아서의 옆에서 똑같은 절망에 빠진 조이의 모습에 나는 표정을 가꾸는 것도 잊고 진심을 담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
루시 일행이 아르테아 가문의 범선을 타고서 떠나고 이틀 뒤. 물 바깥으로 올라온 라샤는 어느새 입 안에 새 들어온 소금물을 뱉어냈다.
젠장. 설마 뱃사람 중 단 한 사람도 날 태워주지 않을 줄은 몰랐어. 내가 깽판을 자주 치는 건 사실이지만 군도에서 깽판 친다 해서 그 녀석들한테 피해가 갈 것도 없을 텐데.
“오랜만이군. 라샤.”
투덜투덜거리며 그녀가 상의를 벗은 라샤가 옷에서 물을 짜내려던 순간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라샤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적의 어린 목소리를 냈다.
“다 뒤져가는 노친네. 무슨 일이야.”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경고를 하러 왔지.”
“지랄하네. 내가 안했어도 네가 했을 거잖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능청스러운 노인의 어투에 라샤가 한숨을 내뱉는다. 공식 석상에서 말을 할 때는 졸라게 근엄한 체를 하더만 왜 따로 만날 때는 저 따위인지.
“그래서 뭔데.”
“같이 던전을 좀 공략해주었으면 한다만.”
“싫어. 당신이 옆에 있으면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이는 느낌이란 말야.”
“오해가 있는 듯 하군. 자네에게 선택권은 없다네.”
“…씨발. 진짜.”
부욱! 라샤의 분노가 손에까지 묻어난 탓일까. 조심스레 다루려 했던 옷이 반으로 찢어져버렸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라샤는 넝마가 되어버린 옷을 노인에게 던졌다.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피해냈다.